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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눈으로 삼손 보기

사사기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702 추천 수 0 2013.01.17 23: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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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삿14:5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2.2.20설교 
예수의 눈으로 삼손 보기
사사기 14:5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지도아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무사히 들어가게 됩니다. 물론, 애굽에서부터 시작된 모세의 장엄하고 위대한 역사가 느보산에서 개인적인 결말도 얻지 못하고 끝나게 될 때는 몇 가지 의아한 점이 있지만 말입니다. 융이나 프로이드 같은 심리학자들은 그래서 여호수아가 모세를 암살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합니다. 성서에서는 자연스러운 권력 승계 같이 보이지만, 인류역사 속에서 정치권력의 승계란 그렇게 단순하지 만은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는 여유로운 생각도 할 수 있겠죠. 한 발 더 나아가 프로이드라는 심리학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깔려 있는 의식 속에는 모세암살에 대한 죄의식이 남아 있어서 훗날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에도 그들이 암묵적으로 동의를 했다고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설교가 아닌 다른 시간에 기회가 닿는다면 할 수 있겠고, 오늘은 그저 삼손의 이야기를 다른 관점에서 읽을 겁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무렵에는 이스라엘을 제외한 주변 국가들은 대부분 왕정제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왕정제도’란 왕이 국가를 통치하는 권력구조로서의 사회라는 뜻이죠. 그런 반면에 이스라엘은 아직 왕을 두고 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왕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면에는 사람이 사람을 부릴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그 대신에 사사라고 하는 직분을 두어 유사시에는 그로 하여금 지도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러니 그 직분 ‘사사’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위태로운 국가를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던지는 일 밖에는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이득이 없는 그런 직분이었죠. 그러므로 사사는 자원하는 이들도 없었고 자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각양의 사람들이 거절하지 못하고 맡아야 하는 그런 역할이었습니다. 이런 때에 사사 삼손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사사기 13-16에 나오는 삼손의 모습을 보면 아주 폭력적입니다. 우선 그들은 블레셋이라는 이방 민족에게 오랫동안 압제를 당했다고 되어 있습니다(13:1). 뿐만 아니라 그이 어머니는 임신을 하지 못하는 여자였는데 기적적으로 수태되어 삼손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에는 국가와 개인이 동시에 폭력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지금은 다르지만, 과거에는 아이 못 낳는 여자가 당하는 사회적이고 가정적인 폭력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삼손이 태어나기 이전의 외부적이고 내부적인 상황은 폭력적이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삼손의 어머니는 살아서는 볼 수 없다는 천사를 만나게 됩니다. 당시 신은 사람에게 다가 올수도 없고, 만약 사람에게 나타난다면 신을 신을 본 사람은 죽게 된다는 게 당시의 통념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어머니가 당하는 압박은 또 다른 폭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삼손은 그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나실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출생의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어른이 되어서 결혼을 할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이 긴장과 갈등 그리고 폭력이 등장하게 됩니다. 속고 속이는 음모, 잔치를 하는 중에도 기쁨과 축복이 있기는커녕 긴장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보복이 진행되고, 살육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삼손의 과거와 현재는 폭력으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이것이 삼손을 규정하는 울타리입니다.  

사사기가 흥미로운 점은 다른 사사들과는 달리 사사로서의 공적 활동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금지된 사랑 행각을 둘러싼 개인적인 이야기들로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탄생이야기는 영웅 신화입니다. 불임의 어머니, 신의 계시에 의한 기적적인 탄생, 그리고 신의 소명이 그렇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이 그를 크게 쓰려고 점지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전혀 나실 사람으로서 살지 않습니다(민6:1-21).술이 오가는 잔치의 주역이 되었고, 죽은 시신을 가까이 하며, 원수의 딸과 결혼을 하려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나실 사람으로 쓰려고 합니다. ‘나실’사람이라는 것은 한 개인의 욕망과는 배치된 그 무엇들이죠. 목사(신부가 더 맞는 말이겠지만)로 산다는 것이 ‘세상의 욕망과 배치되는 일’인 것처럼 말입니다. 삼손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긴장과 갈등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의 난폭은 거기서 왔는지 모릅니다. 왜, 우리들 중에도 ‘서원’해서 낳은 아들들이 있지 않습니까? 만약 그 아이들이 자랄 때 ‘너는 서원해서 낳은 아들이니 이건 하면 안 되고 저건 해야 하고’하는 주문을 계속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것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규칙이 있다면 그 아이는 삐뚤어지기 십상일 겁니다.

삼손은 그래서 부모의 뜻을 거슬러 이방 여자와 결혼하려고 홀로 그녀를 찾아 나섭니다(14:5). 요즘은 자못 멋지게 보이는 장면이겠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일정한 전통을 가진 종교적인 관습의 입장으로는 난폭하기 그지없는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를 맞이하는 여자, 딤나의 입장은 어떨까요? 남자다워서 좋아할까요? 아니면 불안한 마음일까요? 그러나 그녀의 감정이나 생각과 상관없이 그녀는 운명의 늪에 빠져야 합니다. 결혼은 부모가 정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청혼은 삼손의 험악한 상황에 끌려 억지로 진행이 됩니다. 난데없이 수수께끼를 내고 동네 사람들을 협박합니다. 그녀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폭력상황에 빠져들고 맙니다. 그러다가 삼손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딤나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보내집니다. 그러나 그일 때문에 또 다시 삼손의 살육이 시작되죠. 14장과 15장은 참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참혹한 폭력의 현장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우꼬리에 불을 달아 곡식과 식량들을 불태웁니다. 나귀의 턱뼈로 천 명을 죽였다고도 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20년을 사사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얻은 여자가 기생 들릴라 이야기죠. 하지만 두 번째 이야기도 앞의 이야기와 대동소이합니다. 약간 다른 게 있다면 들릴라 라는 여인은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피해가기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는 정도일 것입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수많은 상상력을 제공하는 대신 성서와의 연결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단지 이 이야기는 ‘러브 스토리’와 ‘영웅담’으로만 우리 속에 남아 있습니다. 가끔 머리만지는 미용실이 ‘삼손과 들릴라’라는 상호를 쓰기도 하고, 술집의 웨이터가 ‘힘’을 상징으로 하여 자신의 이름을 ‘삼손’으로, 유혹의 상징으로 ‘들릴라’라는 이름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면 삼손의 이야기는 단지 여자의 ‘유혹’과 남자의 ‘힘’이 어울려지는 ‘러브스토리’일까요? 이것이 성서의 관심사항일까요?

아니죠. 오히려 이 이야기는 사랑을 빙자하여 벌어지는 남자의 여체에 대한 욕구와 여자의 물질에 대한 욕구가 교차하는 지점에 삼손과 들릴라 이야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을 종교사회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공동체적이었던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개인주의로 전환하는 지점에 삼손의 이야기가 배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공평하고 하나님만이 왕이었던 때가 물러가고 점차 인간의 개인적인 욕망이 증대하여 힘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부리게 되는 사회변화 현상의 시초를 그려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삼손 시대의 사람들은 이미 변질된 출애굽 신앙을 그들의 삶에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본시 창조하나님은 피조물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부리게 하지 않았습니다. 또 누구도 사람의 노예가 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삼손의 일탈행동은 굉장히 커다란 창조 윤리에 위배되는 행동들입니다. 그런데도 누구하나 삼손의 그 패역한 행위들을 나무라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는 과정에서 과도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은혜를 개인 또는 씨족중심으로 해석을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우리를 또는 나를 특별히 더 사랑하신다’는 우월의식 말입니다. 이른바 선민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야훼 이데올로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이걸 이들은 출애굽 신앙의 전통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응원하신다는 사고인 것입니다. 이 흥미진진한 삼손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민족의 우월성’을 다른 민족에 대해서는 ‘배타주의’를 정당화 시키는 대중적인 매체구실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삼손의 이야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경우든지 우리 민족을 사랑하신다는 교과서 였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삼손의 이야기를 다시 읽을 때는 그때의 단 지파가 받아 들였던 눈으로 이 이야기를 읽고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창조신앙의 하나님 이해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은 믿는 자의 편이라는, 그가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러도 결국은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주신다는 생각은 잘못되고 나쁜 해석이고 적용인 것입니다. 삼손이 조금 웃기는 인간이기는 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그에게 마지막 힘을 주셔서 삼손을 괴롭힌 원수들을 건물 속에 장사지내는 역전의 상황이 벌어지듯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은 다른 누구보다, 다른 어떤 믿는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므로 내가 어떤 나쁜 짓을 해도 결국 하나님은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서는 이런 변질된 이데올로기를 유포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삼손이 속한 지파 때문입니다. 삼손은 단 지파의 사람인데, 이스라엘의 북쪽에는 에브라임 지파가, 남쪽은 유다지파가, 동쪽은 베냐민 지파가 있었고 그 옆에 아주 강대하고 큰 블레셋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단 지파는 베냐민 지파와 블레셋 사이에 낀 아주 작은 군소족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지파동맹은 ‘땅의 경계석을 옮기지 못하게’되어 있습니다(신27:17). 그래서 단 지파는 어디로든지 지경을 넓혀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맹관계인 이스라엘 공동체로는 안 됩니다. 당연히 이방 민족인 블레셋 땅을 먹어야 하는데 블레셋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벽입니다.

상황이 이렇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지파를 이끌고 있는 누군가는 뭔가 희망찬 이야기를 유포하여 백성들을 고무시켜야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삼손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삼손은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에 눈이 어두워 사사라는 공동체적인 임무를 게을리 한 존재가 아니라, 그 반대로 앞뒤가 꽉꽉 막혀서 희망이 없는 지파의 미래에 한 가닥 희망을 던져주는 빛과 같은 존재로 읽혀졌던 것이죠. 우리로서는 삼손의 행위들이 일탈된 영웅의 행색이지만, 당시의 단 지파로서는 ‘하나님이 여전히 단 지파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삼손이 블레셋을 휘 젖듯이 블레셋은 우리가 상대하기에 그렇게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는 자신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 삼손의 이야기가 유포되었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도 그들을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고 해야 하는 겁니까? 그래서 내가 어떤 일탈된 짓을 해도 결국은 하나님이 내 편이 될 거라는 확신을 갖는 게 좋은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변질된 창조신앙의 하나님 이해 때문에,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믿음 때문에 결국은 다음 주에 나눌 다윗 ‘왕’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왕정 제도는 사람이 사람을 부리고, 다시 준 노예 상태로의 복귀입니다. 그 때부터 인간들은 개인주의, 계급과 차별, 권위와 복종의 삶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사람이 대신하는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경계선에 삼손의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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