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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삿12: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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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2.2.29 설교 |
사사 [입다]를 둘러싼 어둠
삿12:5-6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구약성서에는 왜 그토록 참혹한 살인 사건들이 많이 나오느냐?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악행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설명해보라.”
이런 질문을 받아 본적은 없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이런 고민에 빠졌던 적은 없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해 또는 자신에게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오늘 저는 이 질문과 함께 사시시대의 참혹한 학살사건 하나를 더 소개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사기 12:5-6에 나오는 이른바 ‘쉬볼렛’사건입니다. 이 때 42,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단지 ‘쉬볼렛’이라는 발음 때문에 죽임을 당해야 했다고 합니다.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요단강과 압복강이 만나는 여울목에 살기등등한 길르앗 병사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혹 한 명이라도 에브라임 족속 패잔병들이 살아 돌아갈까 하여 그들의 경비는 철통같았습니다. 강을 건너려다 붙잡힌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채 길르앗 병사들에게 심문을 받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쉬볼렛’이라고 발음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곡식 이삭’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브라임 사람들은 길르앗의 말인 ‘쉬볼렛’을 발음 할 때 ‘시볼렛’이라고 발음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경상도 사람들이 ‘굴뚝’을 ‘꿀떡’과 같이 발음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죽을힘을 다해 ‘시볼렛’을 ‘쉬볼렛’이라고 발음해 보려고 하지만 결국 목이 베이고 맙니다. 이렇게 길르앗에 쳐들어온 에브라임 병사들을 전멸시키고야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그 때 죽은 사람이 42,000명이라고 하지만, 이 숫자는 사실이 아닌 듯합니다. 이스라엘 중부 산간지대에 정착한 초기 인구는 다 합해도 45,000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숫자는 에브라임 족속이 모두 전멸했다는 뜻일 겁니다. 숫자의 의미보다는 참혹한 현상을 전하기 위한 의도라는 말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기억의 한 가운데 있는 것이 ‘쉬볼렛’ ‘시볼렛’이고, 이 사건은 사사기 시대의 말기에 해당합니다.
저는 삼손의 이야기에서부터 ‘사사시대의 말기’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오늘 사사 입다(8번 째 사사)의 시대에 벌어진 이 학살 사건도 사사시대 말기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배후가 결국은 ‘사랑이신 하나님이 왜 구약성서에서는 그렇게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는가?’라는 의문에 답을 낼 수 있는 출발이 됩니다.
사사시대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혹자가 ‘야훼 신앙의 위대한 정신의 제도화’라고 규정짓는 시대입니다. 쉽게 말하면 ‘창조 하나님의 정신이 이스라엘만 사랑하고 보호한다는 이데올로기로 변하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보편적이고 전 인류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만, 나만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잘못 정착되기 시작하는 시대라는 겁니다.
평등이상으로 넘쳐 나고, 남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억제해야 하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 대한 보호와 복권의 정신이 고무되는 사회가 망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전쟁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 이상과 인간 사회의 변질된 가치가 충돌하는 현장입니다.
오늘 우리가 거론하는 이야기의 중심인 에브라임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길르앗의 장군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가 사사 입다입니다. 사사기 11장에 의하면 입다는 길르앗이라는 남자가 매춘하는 여인에게서 낳은 자식입니다. 아무튼 이 남자의 본처 자식들은 아비가 죽자 창녀의 자식이 아비의 재산을 상속 받을 수 없게 하려고 입다를 집에서 쫓아냅니다. 성을 팔아 살아가야 했던 여자, 그리고 그를 거둔 아비의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라났고 끝내 추방당한 자식, 평등 이상을 추구한다던 사회의 위선은 여자와 그녀의 자식에게 던져진 고통의 발원지가 됩니다.
쫓겨난 입다가 정착한 곳은 북쪽의 ‘돕’이라는 갈릴리 호수 남쪽의 고읍이었습니다. 그곳에 대해서 더 많은 정보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맥상 척박하거나 족속의 경계 지역쯤 되는, 그리하여 길르앗 남자가 족속의 도움을 받는 것이 쉽지 않는 땅, 곧 그 자신에겐 ‘버림받음을 의미 하는 땅’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입다 주변에는 입다와 같은 버림받은(사회에서), 그렇지만 힘께나 쓰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입다는 이들을 이끌고, 사람들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안위를 지켜 주는 대신 대가를 지불 받는 비정상적 무장 집단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조직 폭력배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초기의 다윗과 같은 것입니다. 폭력의 대상이 되어 추방당했던 이들이 폭력의 주체가 되어 그 사회 속에서 생존하고 있었던 거죠. 그게 입다였습니다.
입다 패거리의 영향력은 날로 커져갔습니다. 그들은 길르앗 전체에서도 가장 유명한 폭력배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동족에 위치해 있던 암몬 왕국이 길르앗을 침략했습니다. 그러자 길르앗의 유지들은 입다를 ‘콰신’(11:6)즉 ‘장군’으로 임명 할 테니 암몬하고 싸워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것은 임시 지휘관입니다. 그러나 입다는 말하길 만약 이 싸움에서 이기면 ‘로쉬’즉 ‘상설지휘관’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유지들은 그렇게 계약을 합니다.
입다가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약에 따라 길르앗의 상설지휘관 즉 군대장관으로 취임을 합니다. 그러자 그 주변에 있던 다른 부족들, 므낫세, 베냐민, 마길, 단, 르우벤, 갓 같은 부족들이 이 길르앗의 입다를 두려워하여 연합전선을 구성합니다. 그게 에브라임 연합전선입니다. 이들 부족들은 길르앗과는 달리 창조신앙 전통, 즉 부족들 간의 평등사상을 잘 지키고 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창조시대부터 내려오던 평등주의 정신과 가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연합으로 길르앗의 폭력적인 세력의 확대를 막고 싶었던 것입니다. 길르앗의 상설군대장관이 된 입다가 향후 어떻게 진화할지 짐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에브라임 연합체는 훗날 왕국 시대가 되어서도 평등사상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사무엘과 엘리집단, 아비아달, 아히야, 예레미야).
그래서 그들은 길르앗의 장수가 된 폭력배 입다를 단속해야 했던 겁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인들은 강을 건너 출병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 행동도 선을 지키기 위해 악을 사용하는 악폐에 해당했던 것이죠. 그것은 다름 아니라 부족 동맹의 평등주의 사상을 지킨다는 명분아래 평등사상을 깨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입다가 그들을 가만 두었겠어요? 그는 폭력배인데다가, 출신에서부터 차별을 받고 평등을 주장하면서 불평등한 처사를 일삼은 집단에 대해서 이를 갈고 있던 존재였던 겁니다. 입다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거기 ‘쉬볼렛’‘시볼렛’에 대한 발음사건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입다는 치명적인 패배를 에브라임에 안겼으면서도 그 씨를 말리기 위해 쉬볼렛/시볼렛을 살육의 언어적인 수단으로 삼은 것입니다.
자, 이것이 길르앗의 사사 입다의 출생과 성장과 사사가 된 배경입니다. 그리고 그로인해 벌어진 만행입니다. 이 비극은 나쁜 이상과 좋은 이상이 충돌한 게 아닙니다. 이 비극은 아름다운 이상을 가진, 평등주의를 잘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서 출발합니다. 거기서부터 폭력과 대량학살, 사랑의 하나님을 빙자한 살인사건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뭘까요?
훗날 유대인이면서도 배타적인 시오니즘에 대항한 위대한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에 대한 나치시대 독일인의 학살은 특별한 악의 축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배타적 시오니즘’이라는 게 뭡니까? ‘하나님은 우리만, 나만 사랑하신다’는 이기주의 즉 ‘선민사상’인 것입니다. 이게 독일인으로 하여금 유태인을 학살하게 한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배타주의가 과거에만 존재했던, 입다의 시대, 유태인이 학살되던 2차 세계 대전 때에나 있었던 일일까요?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도 이 ‘배타주의’에 깊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확장이 필요한 목회자들에 의해 ‘배타주의’는 점점 더 확산 되고 견고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배타주의를 낳는데, 그것은 속칭 ‘구원파’와 ‘구원’에 대한 그릇된 도를 가르치는 이들에 의해서입니다. ‘나만 구원을 받았다’거나, ‘나는 14만4천명에 들었다’는 식의 어긋난 가르침들이 그것입니다. 이게 모두 ‘입다’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선’한 존재이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악’한 존재라는 이분법이 그것입니다. 하나는 양이 되고 하나는 염소가 된다는 사고는 지금도 이 땅에 수많은 십자군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곳곳에서 쉬볼렛/ 시볼렛의 비극을 잉태한 주역들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전도 표어가 그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수많은 장군 ‘입다’를 훈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극이라는 것이고, 사사시대의 입다를 통해 우리가 오늘 얻게 되는 리플렉스(reflex)인 것입니다.
삿12:5-6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구약성서에는 왜 그토록 참혹한 살인 사건들이 많이 나오느냐?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악행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설명해보라.”
이런 질문을 받아 본적은 없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이런 고민에 빠졌던 적은 없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해 또는 자신에게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오늘 저는 이 질문과 함께 사시시대의 참혹한 학살사건 하나를 더 소개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사기 12:5-6에 나오는 이른바 ‘쉬볼렛’사건입니다. 이 때 42,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단지 ‘쉬볼렛’이라는 발음 때문에 죽임을 당해야 했다고 합니다.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요단강과 압복강이 만나는 여울목에 살기등등한 길르앗 병사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혹 한 명이라도 에브라임 족속 패잔병들이 살아 돌아갈까 하여 그들의 경비는 철통같았습니다. 강을 건너려다 붙잡힌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채 길르앗 병사들에게 심문을 받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쉬볼렛’이라고 발음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곡식 이삭’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브라임 사람들은 길르앗의 말인 ‘쉬볼렛’을 발음 할 때 ‘시볼렛’이라고 발음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경상도 사람들이 ‘굴뚝’을 ‘꿀떡’과 같이 발음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죽을힘을 다해 ‘시볼렛’을 ‘쉬볼렛’이라고 발음해 보려고 하지만 결국 목이 베이고 맙니다. 이렇게 길르앗에 쳐들어온 에브라임 병사들을 전멸시키고야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그 때 죽은 사람이 42,000명이라고 하지만, 이 숫자는 사실이 아닌 듯합니다. 이스라엘 중부 산간지대에 정착한 초기 인구는 다 합해도 45,000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숫자는 에브라임 족속이 모두 전멸했다는 뜻일 겁니다. 숫자의 의미보다는 참혹한 현상을 전하기 위한 의도라는 말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기억의 한 가운데 있는 것이 ‘쉬볼렛’ ‘시볼렛’이고, 이 사건은 사사기 시대의 말기에 해당합니다.
저는 삼손의 이야기에서부터 ‘사사시대의 말기’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오늘 사사 입다(8번 째 사사)의 시대에 벌어진 이 학살 사건도 사사시대 말기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배후가 결국은 ‘사랑이신 하나님이 왜 구약성서에서는 그렇게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는가?’라는 의문에 답을 낼 수 있는 출발이 됩니다.
사사시대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혹자가 ‘야훼 신앙의 위대한 정신의 제도화’라고 규정짓는 시대입니다. 쉽게 말하면 ‘창조 하나님의 정신이 이스라엘만 사랑하고 보호한다는 이데올로기로 변하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보편적이고 전 인류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만, 나만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잘못 정착되기 시작하는 시대라는 겁니다.
평등이상으로 넘쳐 나고, 남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억제해야 하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 대한 보호와 복권의 정신이 고무되는 사회가 망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전쟁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 이상과 인간 사회의 변질된 가치가 충돌하는 현장입니다.
오늘 우리가 거론하는 이야기의 중심인 에브라임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길르앗의 장군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가 사사 입다입니다. 사사기 11장에 의하면 입다는 길르앗이라는 남자가 매춘하는 여인에게서 낳은 자식입니다. 아무튼 이 남자의 본처 자식들은 아비가 죽자 창녀의 자식이 아비의 재산을 상속 받을 수 없게 하려고 입다를 집에서 쫓아냅니다. 성을 팔아 살아가야 했던 여자, 그리고 그를 거둔 아비의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라났고 끝내 추방당한 자식, 평등 이상을 추구한다던 사회의 위선은 여자와 그녀의 자식에게 던져진 고통의 발원지가 됩니다.
쫓겨난 입다가 정착한 곳은 북쪽의 ‘돕’이라는 갈릴리 호수 남쪽의 고읍이었습니다. 그곳에 대해서 더 많은 정보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맥상 척박하거나 족속의 경계 지역쯤 되는, 그리하여 길르앗 남자가 족속의 도움을 받는 것이 쉽지 않는 땅, 곧 그 자신에겐 ‘버림받음을 의미 하는 땅’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입다 주변에는 입다와 같은 버림받은(사회에서), 그렇지만 힘께나 쓰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입다는 이들을 이끌고, 사람들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안위를 지켜 주는 대신 대가를 지불 받는 비정상적 무장 집단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조직 폭력배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초기의 다윗과 같은 것입니다. 폭력의 대상이 되어 추방당했던 이들이 폭력의 주체가 되어 그 사회 속에서 생존하고 있었던 거죠. 그게 입다였습니다.
입다 패거리의 영향력은 날로 커져갔습니다. 그들은 길르앗 전체에서도 가장 유명한 폭력배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동족에 위치해 있던 암몬 왕국이 길르앗을 침략했습니다. 그러자 길르앗의 유지들은 입다를 ‘콰신’(11:6)즉 ‘장군’으로 임명 할 테니 암몬하고 싸워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것은 임시 지휘관입니다. 그러나 입다는 말하길 만약 이 싸움에서 이기면 ‘로쉬’즉 ‘상설지휘관’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유지들은 그렇게 계약을 합니다.
입다가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약에 따라 길르앗의 상설지휘관 즉 군대장관으로 취임을 합니다. 그러자 그 주변에 있던 다른 부족들, 므낫세, 베냐민, 마길, 단, 르우벤, 갓 같은 부족들이 이 길르앗의 입다를 두려워하여 연합전선을 구성합니다. 그게 에브라임 연합전선입니다. 이들 부족들은 길르앗과는 달리 창조신앙 전통, 즉 부족들 간의 평등사상을 잘 지키고 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창조시대부터 내려오던 평등주의 정신과 가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연합으로 길르앗의 폭력적인 세력의 확대를 막고 싶었던 것입니다. 길르앗의 상설군대장관이 된 입다가 향후 어떻게 진화할지 짐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에브라임 연합체는 훗날 왕국 시대가 되어서도 평등사상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사무엘과 엘리집단, 아비아달, 아히야, 예레미야).
그래서 그들은 길르앗의 장수가 된 폭력배 입다를 단속해야 했던 겁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인들은 강을 건너 출병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 행동도 선을 지키기 위해 악을 사용하는 악폐에 해당했던 것이죠. 그것은 다름 아니라 부족 동맹의 평등주의 사상을 지킨다는 명분아래 평등사상을 깨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입다가 그들을 가만 두었겠어요? 그는 폭력배인데다가, 출신에서부터 차별을 받고 평등을 주장하면서 불평등한 처사를 일삼은 집단에 대해서 이를 갈고 있던 존재였던 겁니다. 입다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거기 ‘쉬볼렛’‘시볼렛’에 대한 발음사건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입다는 치명적인 패배를 에브라임에 안겼으면서도 그 씨를 말리기 위해 쉬볼렛/시볼렛을 살육의 언어적인 수단으로 삼은 것입니다.
자, 이것이 길르앗의 사사 입다의 출생과 성장과 사사가 된 배경입니다. 그리고 그로인해 벌어진 만행입니다. 이 비극은 나쁜 이상과 좋은 이상이 충돌한 게 아닙니다. 이 비극은 아름다운 이상을 가진, 평등주의를 잘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서 출발합니다. 거기서부터 폭력과 대량학살, 사랑의 하나님을 빙자한 살인사건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뭘까요?
훗날 유대인이면서도 배타적인 시오니즘에 대항한 위대한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에 대한 나치시대 독일인의 학살은 특별한 악의 축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배타적 시오니즘’이라는 게 뭡니까? ‘하나님은 우리만, 나만 사랑하신다’는 이기주의 즉 ‘선민사상’인 것입니다. 이게 독일인으로 하여금 유태인을 학살하게 한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배타주의가 과거에만 존재했던, 입다의 시대, 유태인이 학살되던 2차 세계 대전 때에나 있었던 일일까요?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도 이 ‘배타주의’에 깊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확장이 필요한 목회자들에 의해 ‘배타주의’는 점점 더 확산 되고 견고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배타주의를 낳는데, 그것은 속칭 ‘구원파’와 ‘구원’에 대한 그릇된 도를 가르치는 이들에 의해서입니다. ‘나만 구원을 받았다’거나, ‘나는 14만4천명에 들었다’는 식의 어긋난 가르침들이 그것입니다. 이게 모두 ‘입다’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선’한 존재이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악’한 존재라는 이분법이 그것입니다. 하나는 양이 되고 하나는 염소가 된다는 사고는 지금도 이 땅에 수많은 십자군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곳곳에서 쉬볼렛/ 시볼렛의 비극을 잉태한 주역들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전도 표어가 그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수많은 장군 ‘입다’를 훈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극이라는 것이고, 사사시대의 입다를 통해 우리가 오늘 얻게 되는 리플렉스(reflex)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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