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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말4: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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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2.5.13 |
엘리야=세례 요한=예수(1)
말라기4:4-6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짚어 보았습니다. 그것은 대략, 다양한 떠돌이 생활을 하거나 노예의 신분이었던 이들이 과감하게 현실을 떨치고 일어나서, 남들과 같지 않은 새로운 나라인 ‘야훼의 나라’, ‘평등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광야의 삶을 살았고, 가나안에 정착해서 그곳 하층 거류민들과 새로운 촌락을 건설하였으며, 사울에 사무엘에 이르기까지는 평등공동체를 유지하다가, 사울 왕에서부터 솔로몬까지는 그들이 도망쳐 나온 애굽과 다를 바 없는 전제왕국을 세워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솔로몬에 이르러서 반 야훼적인 이스라엘은 공동체는 자체적인 분열과 주변국의 침입으로 망하게 됩니다.
오늘은 이스라엘이 전제국가로서 최고점에 이르렀던 시절, 이스라엘을 강성대국으로 만들었던 오므리(BC885-873), 아합왕조(BC873-851)시대에 활동한 예언자인 엘리야를 톺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한 시간에 당시의 이야기를 다 할 수 있을지, 아니면 다음 주까지 갈지는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엘리야를 너무 잘 아시죠?
이를테면,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이긴 이야기며, 엘리사로부터 갑절이나 많은 영력을 물려받은 감동적인 이야기, 이세벨에게 쫓겨 광야로 도망을 갔지만 거기서 하나님의 까마귀를 만나는 것과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 말입니다. 그러면 그런 좋은 이야기 말고는 좀 더 자세하게 엘리야에게 대해서 아는바가 없으시죠? 그래서 우리는 이제부터 그런 뻔한 이야기는 빼고, 지금껏 듣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엘리야의 숨은 이야기들을 해 드리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성서의 표면에 나타나는 지엽적인 것을 넘어서는 본질적인 교훈에 접근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히브리 제1성서가 아니라 제2 성서인 신약성서에서 엘리야를 만나게 됩니다. 아마 구약의 인물 중 엘리야만큼 비중 있게 신약에 등장하는 인물도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엘리야에 대한 흠모가 깊었으면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부활한 엘리야처럼 보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활동하며, 낙타 털옷을 입으며, 가죽 허리띠 같은 의복이나 메뚜기와 들 꿀 같은 음식을 먹는 모습은 영락없는 엘리야였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세례자 요한에게서 엘리야를 보는 듯 했습니다. 요한은 군중들로 하여금 엘리야를 상기 할 것을 바라면서 그런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은 엘리야를 역사의 기억 속에 저장해 두고 있는 것일까요?
말라기 4:4-6을 읽어 봅시다.
“너희는 율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여라. 그것은 내가 호렙산에서 내 종 모세를 시켜서, 온 이스라엘이 지키도록 이른 것이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겠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이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내가 가서 이 땅에 저주를 내리겠다.”
이처럼 엘리야를 기다리는 대중의 기억은 ‘종말’과 ‘심판’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 코드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전제국가로서는 부흥기였지만 종교적으로는 야훼의 법을 다 팔아먹었던(다윗의 계약으로 바뀐)때였습니다. 그래서 말라기 예언자는 엘이야 같은 이가 등장하여 어그러진 법들을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황이 예수님 시대의 세례자 요한과 맞닿아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무엇이었습니까?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여라.”(막1:13) 가 아닙니까? 어떻습니까? 말라기의 문장을 닮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를 따라 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나 말라기는 동일하게 현 체제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증폭시키고 종말에 대한 신앙과 연결지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이 요한의 운동을 계승했을 때 대중의 기억 속에서 다시 부활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니, 헤롯왕이 그 소문을 들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죽은 사란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 그 때문에 그가 이런 놀라운 응력을 발휘하는 것이다.’하고, 또 더러는 말하기를 ‘그는 엘리야다’하고, 또 더러는 ‘옛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막6:14-15)
곧 요한의 부활한 몸이 예수님이라는 대중적인 인식은 엘리야=요한이라는 대중의 믿음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에게서 엘리야를 떠올리는 연상 작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저는 히브리 제1성서에 등장하는 엘리야를 말하려고 그 주변적인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처절한 고통 속에 신음 하실 때 쏟아낸 절규는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다니”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때 이 소리를 어떻게 들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외마디 소리를 “엘리야를 부른다”고 했습니다(막15:34-35). 그렇게 오인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간난 쟁이 아이를 둔 어머니가 어느 날 아이가 응얼거리는 소리를 그만 ‘엄마’하고 불렀다고 생각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만큼 아이에게 집중하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참한 민족의 앞날에 엘리야가 뭔가 새로운 일을 도모해 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세례요한=예수로 이어지는 ‘엘리야 신드롬’이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단 시일 내에 이스라엘의 민중 속에 각인이 된 이유 중 하나를 말한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물론 그의 특이한 말씀, 기이한 이적들이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는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반대로 그런 일들로 인해 예수는 당시의 기득권층에게는 반사회적인 인물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로 보건데 단순히 특이한 말씀, 기이한 이적과 가르침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산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를 엘리야로 동일시하는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삽시간에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행동과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사모하는 엘리야와 닮아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예수 당시 900년 전 인물입니다. 그 인물과 예수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엘리야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기적 한 두 가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엘리야를 아는 것은 세례요한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신약의 전반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신약성서(히브리 제2 성서)에 나타난 장면들을 좀 더 언급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혹시 랍비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엘리야를 언급하고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을까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엘리야를 볼 만큼 ‘엘리야 신드롬’에 걸려 있는데, 정작 성서를 잘 아는 이들은, 성서대로 산다는 이들은 조금도 엘리야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서를 잘 아는 저들이 무식한 백성들의 사고를 무시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당시의 보통 사람들과 종교 지배층간의 희망에 대한 격차가 있기 때문일까요? 다시 말씀드리면, 서로 기대하고 바라는 게 다르기 때문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렇지만 말라기를 보면 꼭 그렇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종말에 대한 상징이 함축된 문서인 말라기엔 엘리야가 들어가 있거든요.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에도 예수와 엘리야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면 지식 계층도 대중들과 같은 희망의 체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슬람교 문헌에도 엘리야는 의인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오늘 엘리야 이야기를 다 할 수 없겠습니다. 여기서 마치고 다음 주에 다시 이어서 할 텐데요, 구약시대의 마지막과 신약시대의 처음에 연결고리처럼 등장하는 엘리야는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유능한 기도의 능력자’거나, ‘성공적인 믿음의 사람’이라거나, ‘우리도 그의 믿음의 능력을 전수 받아야 할’ 그런 모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세례요한이고, 세례요한은 곧 예수라고 이해하는 이스라엘 민중의 기억이 왜 생겨났는지, 그 기억이 시대를 달리 하면서도 왜 사그러들지 않는 것인지, 이것이 장차 어떻게 신약시대의 예수 삶을 이끌어 가는지, 그리고 그 예수가 왜 십자가처형을 선택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엘리야에게 있는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 이어서 엘리야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엘리야=세례 요한=예수(2)
열상17:8-16
엘리야는 북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BC885-873)와 아합왕조 시대(BC873-851)에 등장했던 예언자입니다. 이 시대는 정치 경제적으로 이스라엘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였습니다. 영토만 보더라도, 요르단 동편의 암몬, 그 남부의 모압, 그리고 에돔과 유다를 속국화 시켰고, 북으로는 갈릴리 북부지역 끝의 단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다마스커스 왕국과의 국경인 시리아 남부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상부 갈릴리 북단의 하솔과, 하부 갈릴리의 므깃도와 이스르엘,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에서 당시의 왕궁 및 요새 터가 발굴되었는데, 그 규모나 세련미가 당대뿐 아니라 후대에까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빼어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때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하 수로와 마굿간의 규모는 이 왕조가 얼마나 강력한 유용을 가진 나라였는지를 말해 줍니다.
이처럼 엘리야 시대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예언자가 등장하여 국가의 시책이나 정책을 비난할 아무런 조건도 엿보이지 않는, 차라리 어용 종교인들처럼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국가가 잘살 게 되었고 세계 일류 국가가 되어간다’고 칭송할만한 시대였던 것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좀 더 아합과 오므리 왕조시대의 이스라엘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좀 더 살펴 보겠습니다. 훗날 이스라엘을 집어 삼킨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의 비문에는 앗시라아의 서방 원정군을 대항하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세력의 주축은 아합왕이고, 앗시리아를 막기 위해 파견된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마전차 2000승과 보병 1만 명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보건데 아합왕의 군대는 평지 전투에 관한한 앗시리아의 팽창을 막아 내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합 정권은 잘 짜인 관료제도와, 왕실 직속의 대규모 예언자와 사제학교를 운영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직속 신학교를 만들어서 정부정책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설득하는데 그들을 운영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엘리사라는 신학생도 있었던 거구요.
그런데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아합의 부인인 페니키아 왕녀인 이세벨입니다. 얼마 전 수요일에 페니키아는 상업도시로서, 개개인이 자기 소유를 가지고 있을 수 있었고, 사제들은 그런 자본가들이 더 많은 소유를 얻게 해달라고 기도해주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바알’신 이라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상인 ‘바알’은 이렇듯 개인의 소유를 증대시켜주는 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에는 이 여인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합니다. 그만큼 이세벨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아합의 정책에서 중요한 것입니다. ‘열왕기’는 그것을 바알과 아세라 신앙과 연결 짓고 있습니다. 그게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 열왕기를 다루는 저작자는 신명기를 쓴 사가들입니다(이들은 남쪽 유다 출신들입니다). 그들은 이 아합 왕정의 문제를 이처럼 종교 혼합주의, 이를테면 아합 왕이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간단히 우상숭배로 둘러댈 일이 아닙니다.
우선 몇 가지를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므리 왕조는 여전히 종족 연합체였습니다. 단일 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형태가 아니라 이집트를 탈출한 떠돌이 집단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국가였습니다. 남북 이스라엘 전체로 치면 12지파 또는 종족이라고 하는 것이고, 북쪽 이스라엘 오므리 왕조는 10개 정도의 종족이 모여 형성된 종족연합체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효과적으로 통제하기가 어렵습니다. 군사적인 통제야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몰라도, 각기 다른 종족들의 경험과 기억을 하나로 묶는 일은 쉽지 않은 법입니다. 그러니 지방 권력과 중앙 권력이 따로 놀았겠죠? 그래서 오므리 왕조 때에는 수도가 둘이었습니다.
열상16:24에 보면 사마리아를 돈으로 사들여 수도로 만듭니다. 그리고 다른 곳 이스르엘인데, 이곳은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에서 보듯이 토착민의 땅을 빼앗아서 수도로 삼은 곳입니다(열상21:23). 이렇게 오므리가 두 곳에 수도를 정했다는 뜻은, 한곳은 종교적인(사마리아) 수도로, 다른 한 곳은 정치적인(이스르엘) 수도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오므리는 얍삽하게도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야훼 신앙의’정치와, 이스르엘을 중심으로 하는 전제군주정치를 양면으로 시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왕국을 세운 남쪽 유다는 몰라도 북쪽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의 지지에 의해 왕의 통치가 용이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오므리 왕을 지지하는 예언자는 성서에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정황이라면 마땅히 오므리는 야훼전통을 지닌 어떤 장소에 종교적인 의미의 성소를 세워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필요에 의해 세운 게 사마리아 수도였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오므리는 이스라엘 출신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이방인 용병출신으로 쿠테타를 통해서 정권을 잡은 인물입니다. 오므리는 이스라엘의 정당성이 없는 인물이죠. 그게 늘 약점으로 작용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정통성을 위해서라도 사마리아에 야훼정신을 담은 수도를 만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강력한 전제국가를 만들어야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야훼 신앙전통을 갖추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아들을 페니카의 왕녀인 이세벨에게 장가들게 하고, 그들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들여와 국가적인 제의를 만들어서 정치에 이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므리나 아합왕 이전에는 이런 혼합주의가 없었느냐? 아닙니다. 이미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나라를 세운 직후 이미 일상화된 신앙 양식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이 오므리와 아합왕의 이방신을 섬겼던 것을 문제 삼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들여온 바알과 아세라 신이 팔레스타인 안에 있던 전통적인 신앙들이 아니라 페니키아에서 들어온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들이 유입되기 이전에도 토착적인 민간 신앙들이 야훼 신앙과 결탁을 했지만, 페니키아의 바알과 아세라 신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신들은 개인의 소유의 후원자 신학이었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의 부귀영달을 위해 복을 빌어주는 신이 바로 바알과 아세라 신이었단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야훼신은 공동체의 아픔을 해결하고,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먹이고 살리는 신이었지 이런 개인의 소유물을 쥐락펴락하는 신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의미의 바알과 아세라 신의 유입으로 오므리 왕조와 아합 왕조는 팽창주의,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전제국가적인 욕망을 정당화 하게 되었고, 이것이 국가의 발전과 성장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오므리 왕조는 이런 신학을 바탕으로 건물을 대대적으로 짓고, 대규모 제의를 벌이고, 화려한 전례행사를 개최해서 성공주의를 국민들에게 선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 엘리야가 등장을 하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성공 중심 세상의 흐름을 바른 눈으로 꿰뚫어 보는 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엘리야입니다. 왕조의 성공주의가 전 이스라엘을 휩쓸던 그 무렵, 어느 나라를 또 점령했다는 전령의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연일 들리고, 침략한 나라에서 보내온 공물의 행렬이 줄을 이어 산더미처럼 쌓이던 그 성공의 시절에, 그런 장면을 불편하게 여기던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왜 엘리야가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고, 그런 엘리야를 왜 백성들은 환호하며 열렬히 지지하고, 마음속에 새겼는지를 알려면, 엘리야를 잘 알기 위해서는 사람들 속에 전해 내려오던 전설 같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너무나 자라는 사렙다 과부의 기름병 이야기입니다. 열상17:8-16절,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이 엘리야를 바로 보는 처음 이야기입니다.
백성들은 엘리야가 과부의 기름병을 채우는 ‘기적’ 때문에 환호 하는 게 압니다. 그들이 지니고 있던 사회적인 분노가 엘리야를 통해 메시아적으로 기억되기 때문에 그를 환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엘리야를 개인적인 삶을 유익하게 해 줄 능력자로 본 게 아니라 세상을 뒤집어엎을 메시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만큼 당시의 약자들, 가난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컸다는 뜻입니다. 나라는 부귀 강성해졌지만 실상 백성들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본문에는 그래서 엘리야의 기적의 수혜자가 과부와 어린아이로 나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오늘 본문의 여인이 살고 있던 곳은 페니키아입니다. 이스라엘 밖이라는 것은, 엘리야가 이스라엘 영토 밖에서 예언자적 사역을 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국가의 통치 이념인 ‘성공지상주의’ 발전주의‘ ’부흥주의‘라는 이데올로기와 대항하겠다는 뜻입니다.
엘리야의 관심은 나라가 잘살고 못사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발전의 틈바구니에서 고생하고 고통당하는 약자들의 아픔에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오므리와 아합왕의 그런 정치에 희생당하면서 불편해하고 있었습니다. 전제국가란 백성들의 희생을 동반하는 정책인데, 그걸 불편해하는 백성들의 기억 속에 엘리야는 그와 같은 자신들을 해방 시켜줄 메시야로 기억된 것입니다. 그러니 사렙다 과부의 기름병 사건이 ’축복‘이라면, 그것은 물질적인 증대의 축복이 아니라 해방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이게 기름병 하나에 얽힌 역사의 무게입니다.
21장에 나오는 나봇의 포도원 강탈 사건도 기름병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제권력 하에서 왕이나 귀족들은 멋대로 소농들의 토지를 몰수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나 부역에 동원 되어야 했던 백성들에게 땅을 지키는 일은 참으로 버거웠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과부와 고아는 무수히 양산되었고, 당연히 그들의 생존권은 물위 떠 있는 낙엽 같았습니다. 이런 일들은 국가의 발전주의 정책과 연결되어 있었고, 바알과 아세라신앙의 미화속에서 감춰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엘리야 들춰 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갈멜산(950명의 거짓 예언자들과 싸운)은 바로 페니키아와 이스라엘의 접경지입니다. 또한 이곳은 수도 이스르엘에서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이곳에 신전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사제들 1000여명을 학살합니다. 그리고 신전을 불태우는 일을 저지릅니다. 이 학살사건과 기름병 사건은 같은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대중의 아픔과 분노를 대변하는 엘리야의 행동이라는 측면에서 말입니다. 결국 엘리야는 그 일로 인해 이세벨의 공권력에 추격을 받아 유다 남부 네겝 지역인 브엘세바까지 도망을 해야 했습니다. 만약, 엘리야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기적을 일으키고 능력을 행하는 이로 해석을 한다면 이 장면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사건인 것입니다. 어떤 때는 없던 기름을 만들어내는 능력의 엘리야가 또 어떤 일에서는 수천 명을 죽이고 불을 지르고도 한 여자의 추격에 비참하게 도망을 가서 목숨을 구걸하는 이해 불가의 행동을 설명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엘리야는 초능력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칼을 든 예언자입니다. 그는 혁명가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공한 혁명가가 아니라 실패한 혁명가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그를 괄호 속에 넣어두고(홍길동 이야기처럼) 역사가 질곡에 빠질 때마다, 정치와 사회 속에서 고통을 당할 때마다, 그 괄호 속에 넣어 두었던 엘리야를 꺼내 희망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엘리야의 실패로 인해 더욱 강렬하게 그것을 완성해줄 제2, 제3의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세례요한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과 제가 믿고 따르는 예수는 이렇게, 이스라엘 민중들의 부패한 역사와 고통스러운 삶을 뒤집어엎다가 실패한 엘리야에서부터 시작하여, 세례요한으로 이어져 예수에게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의 예수는 결코 성공과 출세를 돕고 개개인의 소유를 증대시켜주는 수호신이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예수를 믿는 믿음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요? 바알과 아세라처럼 사유재산이나 지켜주는 물신이 되어 버린 예수, 그렇게 해서 사회나 교회가 번창하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는 ‘번영신학’으로부터 교회와 신앙 즉 공동체의 가치를 지켜내야 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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