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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7: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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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아브라함 |
17장 1절-10절.
1절-10절: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우리 신앙생활에는 사욕적인 신앙생활이 있고 공욕적인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사욕이라고 하는 사욕은 나 혼자만 육에 대한 것을 가진 욕심이고 공욕은 하나님도 그 일에 대해서 욕심을 가져주시는 일, 심지어 마귀도 그 일에 욕심을 품는 일이라 그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천군천사는 물론이고 만물들도 그렇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물질적 부자가 되겠다’ 하는 이것은, 육신적으로 부자가 되겠다고 내가 원할 때는 온 세상사람들이 내가 부자 되는 걸 다 원하느냐? 나와 같은 욕심을 나를 향해 가져주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그 말이요. 다 자기가 부자 되려고 그러지 자기는 가난하고 다른 사람을 부자 만들어 주겠다고 하는 마음은 없다 그 말이요. 천군천사들도 내가 부자가 되는 그 일에 욕심을 가져주느냐? 물질적 부자 되는 일에 욕심을 가져주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그 말이요. 그러니 만큼 이 세상사람들은 누구든지 다 각자 자기만 부자 되는 그 욕심을 갖고 있으니 사욕이라 그렇게 본다 그 말이지요.
우리 성도가 내가 천국의 면류관에 대해서 쓰고 싶은 욕심을 갖고 있을 때에 하나님도 나에게 그 면류관을 씌워주고 싶은 그런 욕심을 품는 거. 천군천사들도 그 욕심을 품고 만물이 다 원하고 앞서 간 성도들도 원하고 아브라함도 원하고 롯도 원하고. 그래서 그게 이제 공욕이라 그렇게 볼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도 욕심을 품어주는 것. 나처럼.
롯과 아브라함은 시대적 시간적으로 지나간 사람들입니다만 그러나 그 사건적으로 볼 때에, 우리가 계시적 측면에서 영적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에 롯이 지금 자기의 이력으로 우리에게 말을 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나처럼 살지 말아라. 나처럼 살면 망한다.’ 롯 역시 하는 말이 ‘나처럼 살지 말고 아브라함처럼 살아라.’ 우리 앞서 간 성도들 잘 믿고 간 성도들 모두가 우리를 향해서 공욕을 품으라고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마귀가 우리가 공욕을 품는 일에 반대를 하고 그러는 것 같지만 가만 보면 협조를 하는 겁니다. 호응을 하고 협조를 하는 거. 주님의 사역에 가룟유다는 제 멋대로 한 거고 로마군인들도 제 멋대로 합심해서 한 거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주님의 구원의 일에 결과적으로 협조를 한 셈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협조했다는 말은 하지 않지요. 자가들 소원 목적대로 한 거니까.
어쨌든 우리 성도가 영이 주격이 되어가지고 공욕만 바로 가진다면 모든 것이 다 나의 일을 돕는 겁니다. 세상만사 모든 것이 다 나의 일을 돕는다. 마귀도 방해보다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내가 품은 공욕에 대하여 협조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영 주격이 돼가지고 공욕을 품고 가는 그 일에는 아무도 방해할 자가 없다는 것. 전혀 방해할 자가 없다는 것. 방해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자기 속의 옛사람이 방해를 할지언정 다른 그 무엇도 자기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공욕적인 일에는 방해할 자가 없다. 전혀 없는 겁니다.
여러분들, 순종을 하는 것이 어려울까요, 모든 사건 환경을 동원시키는 그 일이 더 어려울까요? 로마군인들 대제사장들 불러 모으는 그 일을 내가 할 수가 있습니까? 못해요. 그러나 순종하는 것은 할 수가 있는 거지요. 순종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다.
오늘날 마지막 시대에 타락된 기독자들이 주일날 인인간의 화목, 예를 들어서 주일날 누가 결혼하다고 하면 인인관계 화목을 위해서 그리로는 잘 쫓아가고 하나님께서 ‘너랑 나랑 화목하자’ 하는 주일날은 하나님과 멀리 떨어지고. 그게 다 공욕 사욕이란 말이요. 하나님을 빼놓고 사욕으로 몰리는 거요. 영이 주격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면 그게 신앙생활이고 그게 잘 믿는 거지.
그런데 우리가 사욕을 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걸 당신의 주권적으로 말리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데 그렇게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계약적으로 못하는 겁니다.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각자 자기가 하나님의 공욕을 품고 있는지 항상 자기를 심사해야 되겠습니다.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공욕으로 가는 것 같고, 16장에는 소원대로 인본주의를 써가지고 자기 소원대로 이루어졌지만 천국은 가리어져 버렸습니다.
우리 신앙성도가 보편적으로 신앙이 떨어지면 안 됩니다. ‘신앙인이다. 영적으로 산다’ 하는 건 일반인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성도에게만 있는 것이기 때문에 특수적이다 그렇게 되는 거지요. 예수님도 특수적인 걸음걸이. 생활은 보편적인 방편으로 보이지만. 성도가 신앙의 정신이 일반적으로 되면 그건 보편적으로 떨어진 거요. 보편적 신앙생활 가지고는 신앙이 성장을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마찰과 충돌과 대립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 안에 싸움이 일어나고 가정 밖에 싸움이 일어나고 주종 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자기와 하나님과 단절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속에는 평안이 없는 싸움이 되겠습니다.
우리의 중생된 영은 언제든지 하나님과 단절됨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와 신인양성적으로 결합을 시켰는데, 롬8:16인가 보면 진리와 영감이 내재해 계신다 그 말이지요. 기독자가 죄를 지어도 이 내재적 성령은 계십니다. 중생된 그 영이 죄 짓는 일에 동참을 하느냐 하면 하지 않고 그 속에서 중생된 영은 한탄을 하고 있다.
하나님과 단절은 역시 이성도 하나님과 단절이 되겠어요. 몸과 이성은 항상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데 이성은 희로애락을 느끼는 하나의 기관이지요. 벌써 뭘 느꼈다고 할 때는 어느 한 쪽과의 연결이 된 상태가 되겠어요. 영적으로 느꼈다 하면 영이 작용이 벌써 된 거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이성은 진리만 붙잡으면 돼요. 이성이 또 영과 중단이 되면 구원중단이 또 되고.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할 때도 영과 연결이 되는 그런 연결된 기도가 있고 또 영광 끊어진 기도가 있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가 있어요.
아브라함의 가정에 평안이 없는데 고장이 어디서 난 거지요? 누가 원인이 돼 있어요? 충돌과 마찰과 대립으로 평안이 없어. 이스마엘인가? 이스마엘에 의해서 고장이 났어요? 아브라함에게서 고장이 났지.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단절이 돼버리면 사라도 하갈도 다 대립 마찰이 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창세기로 올라가면 에덴동산으로 올라가면 짐승들이 먼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까, 아담이 먼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까? 누가 먼저 거역을 했지요? 짐승이 먼저 거역했지요? 안 그래요? 어디까지나 인간 자기지요. 하나님 떠나게 되면 자기 속에는 평안이 없다는 것. 자기가 원인이 되어 있으면 가정에도 평안이 없지요. 그렇게 되면 온 가정이 쑥밭이 돼버리지요.
그래서 오늘날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상당히 문제를 많이 얘기하는데 특히 아이들이 뭐 압니까? 가정 소란스러운 거. 부모들이 보면 아이들로 주로 말을 많이 하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을 하는지? 아이들이 문제입니까, 부모들이 문제입니까? 어디까지나 부모들이 문제 아닙니까? 부모들이 먼저 하나님과 끊어졌다. 그러니까 부모입장에서는 아이들이, 내 가정의 아이나 옆집 아니나 그렇게 돌아갈 때는 부모입장에서 먼저 하나님과의 자기와의 밀착관계를 가지려고 해야 할 텐데 그런 데는 물론 일반사회에서는 모르니까 그런 거지만 믿는 부모입장에서 그걸 그렇게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질 않는 것 같아요. 그러니 결국 사회가 ‘어떠니 저떠니’ 해도 맨날 얘기해봐야 벗어나지를 못 해. 될 수가 없어. 불가능이야.
우리가 그런 뉴스나 교회적으로나 다 보고 들을 때 이제 교회적으로 보면 교회목사들부터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어야 된다는 거. 그러기 전에는 잡히지 않아요. 불가능이야. 사람의 기준은 하나님이지. 주님이지. 기준을 놓치고 사람 되게 하는 것을 어떻게 고쳐. 못 고치는 거 아니요? 교회도 바로 고치려면 하나님께로 가야지. 천국을 봐야지 뭐. 안 그러면 못 고쳐. 고칠 길이 없어. 불가능이야. 백 날 떠들어 싸도 불가능이야.
왜 어른이 있고 애가 있습니까? 어른부터 고치라고 있는 거지요. 아이들을 보고 자라나고. 교회로 주격으로 보면서 사회적으로 볼 때 큰일 났어. 아무리 생각해도 큰일 났어.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의 원칙에서 볼 때에 가정에는 누가 주격이 돼가지고 누구의 의사대로 돌아가야 됩니까? 창조의 원칙에서 봐야지요. 남편이지요. 그 가정의 가장. 창조의 원리가 그렇게 돼 있습니다. 원리를 거스르면 안 되지요. 창조의 원리. ‘나는 안 그렇다’ 그게 아니라 원리를 거스르면 그거는 어그러지는 거예요.
그런데 남편이 가장이 하나님의 원리대로 안 돌아갈 때는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갈아치웁니까? 부인이 하려고 하면 남자가 가만있나? 신앙지식적으로 말은 쉬운데 실질적으로 살아가기는 보통 어려운 게 아닐 거요. 실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신앙 면은 양보하면 안 되겠고, 그 다음에 이제 일반적인 것은 남편에게 순종이 돼야지요. 일반적인 가정사 삶에 있어서. 그렇잖아요? 이를테면 남편이 돈 못 벌어온다고 신앙적인 일은 우리가 양보할 수 없으나 그러나 일반적인 자질구레한 남편의 명령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럴 때 아내입장에서 말이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남편의 자존심은 건드리지 말아야지. 그렇지 않겠어요? 건드리지 말고 아내는 옆에서의 어찌하든지 하나님과 연결이 되도록 어떤 희생적이면서 신앙적으로 리드를 할 수 있는, 하나님과 가깝게 해 줄 수 있는 마음씀씀이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강한 여자가 있고 부드러운 여자가 있지요? 그러니까 강하게 나가지 말고 부드럽게. 내적인 신앙 면은 강하게 가지지만 활동 면에서 남편을 대함에 있어서는 부드럽게 할 수가 있는 거지요. 그게 신앙적이 아닐까? 여자로서의 그게 신앙적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안 그러면 어떤 발언이라도 강압적으로 나가게 되면 충돌이 날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가정에 더 불안을 가져오게 되지 않겠느냐? 실질적인 면에 있어서. 그러니까 그럴 때에는 아내로서 지혜를 더 많이 구해야지요. 안 그러면 안 되지요. 그런 원칙을 우리가 안다면 모든 가정사가 다 그런 것 같아요. 역시 자녀들 문제도 그렇고.
그런데 이게 참 제가 늘 잔소리처럼 자꾸 말합니다만 창조의 원리에서 전부 이탈이 돼가지고 어그러지고 뻐그러져 버렸어요. 보통 큰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가정에서 의논을 한다고 해도 믿는 가정에서 영적 신앙적인 면에서 죽어버리면 그것도 또 하나님과의 대립성이란 말이요. 한두 번 그런 의사성이 나올 때는 혹 그 가정이 잘 될지는 모르지만 나가면서 시간이 흐르면서는 벌어질 수밖에 없는 거지요.
가정사도 보면 그런 게 있고 주로 의논을 해가지고 하는 것도 있고, 어쨌든 남편의 의사대로 따르던 남편의 입장에서 너그러운 마음이 있어가지고 아내 말을 들어보니 ‘저 말이 옳다’ 해서 아내의 의사를 따르고 이렇게 해서 각자의 마음속에서 신앙심이 우러나와서 그 가정이 신앙적으로 나가는 그런 가정이라면 두 말할 것도 없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쨌든 원리상 남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 버리면 대립이 올 수밖에 없다. 어쨌든 고통을 안게 된다.
원칙은 우리가 창조의 원칙도 있고, 다 아는 거지만 예수님은 신랑이다. 성도는 신부다. 이게 뭐지요? 그게 다 원리에 입각되는 원칙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 달라. 그러니까 인간의 어떤 사감적인 개인적 소원 욕망 그런 마음을 품고서 ‘내 뜻대로 이루어 주옵소서’ 하는 그게 있습니까? 전혀 없단 말이요. 예수님께서 품는 모든 감정 느낌 소원 목적은 전부 다 공욕이었지요. 그렇잖아요?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도 그렇게 돼야 되겠지요. 공욕.
내 가정에서 가장으로서 품는 그 욕심이 공욕. 어느 가정이 그 가정으로 보아도 ‘정말 저 가정에서 가장이 품는 욕심은 정말 공욕이다’ 정말 그렇게 되길 바란다. 그렇게 돼야 된단 말이요. 각 가정에서 가장들이 품는 욕심 공욕. 갑이라고 하는 집에서 그 가장이 품는 욕심이 공욕, 을이라고 하는 가정의 가장이 품는 욕심 역시도 공욕. 하나님이 원하시는 욕심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상에서 성도들의 가장이라도 공욕을 얼마나 품고 있을까? 그게 문제인 것 같아요. 공욕이 없으면 사욕이지 별 수 있나?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러나 비진리적 신앙을 가졌다면 ‘내 뜻대로 하옵소서’ 그거 아니겠어요? 자타의 구원에 대한 기도라면 그 욕심이라면 그 얼마나 공욕이냐? 그런 거 보기가 힘들다.
우리가 원리상 간단하잖아요? 어느 법대로 누구의 법대로 살아야만 자기의 구원 자기의 천국이 이루어지겠느냐 그 말이요. 완전히 주님께로 귀순을 해야지요. 주님께로 가야지요. 주님께로 간다고 해서 주님이 당신 스스로에게 좋은 게 뭐가 있어요? ‘주님께로 오라. 가라. 공욕을 품으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 말씀을 하는 거라 그 말이요.
아브라함의 가정에 늙은 종이 있지요. 아브라함이 늙은 종을 불러서 ‘자기 며느리를 찾아서 데려오너라’ 그렇게 해서 며느리를 찾아나가는데 며느리를 찾아나갈 때에 시아버지가 가야 마음에 드는 처녀를 데리고 올 텐데 늙은 종 엘리에셀이 아브라함 주인의 집에 있으면서 우리가 참 공욕이냐 사욕이나 하는 이런 면을 염두에 두면서 생각을 해 볼 때에 이 엘리에셀이 누굴 닮았지요? 아브라함을 닮았지요. 아브라함의 마음을 정신을 사상을 닮았으니까 ‘가서 데리고 오너라’ 하는 거란 말이요.
주인의 눈에 맞으면 종의 눈에도 맞고 종의 눈에 맞는 것을 주인에게 물어보니까 ‘어쩌면 너는 나를 그렇게 닮았느냐?’ 그래서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을 자기 아들로 삼으려고 했지요? 그런데 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사는 늙은 종은 그렇게 아브라함을 잘 닮았고, 아브라함은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마음을 좇아가고. 그런데 수십 년 동안을 아브라함과 같이 사는 조카 롯은 암만 가르쳐도 닮아지지를 않아. 암만 가르쳐도 바꾸어지지를 않아. 그 어떻게 해야 되겠지요? 닮아지도록 두들겨 패야 됩니까, 내버려둬야 됩니까?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여러 수십 년 동안.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떨 런지 모르겠어요. 주님의 대국적인 사역을 보면 물론 하나님께서 참으심이 있고 수 년 동안 또는 몇 십 년 동안 참으심이 있는데 교육적으로 보면 사건 환경을 일으켜서 어찌하든지 만들려고 하는 거거든. 그런데 개인적으로 볼 때 몇 번을 말을 해도 듣지 않으면 계속 따라다니면서 해야 됩니까, 어느 정도 하다가 그만둬야 됩니까? 이런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이를테면 한 집에서 같이 산다면 같이 있는 동안에 상대가 듣기 싫어도 ‘예수 가라사대’ 하고 자꾸 말해줘야 되겠고, 상대가 떠난다면 별 문제가 되겠지요. 그러나 암만 가르쳐도 되지 않는데 상대는 떠났다 할 때 내가 그거 바로 만들어 보려고 또 좇아가서 자꾸 그러고 하는 그거 어때요?
아브라함을 볼 때는 회복을 해서 올라오기는 올라왔지요. 올라왔으면 롯도 같이 올라왔을 때 신앙으로 감염됐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서도 아브라함 속에서는 롯을 생각하면 뭔가가 찜찜할 거야. 감염성이라는 게 무서워. 사욕을 품은 신앙행위에 있어서 사욕이 감염돼 나간다는 게 참 무서운 겁니다.
우리가 어찌하던지 사람 속에서 사람이 살기 때문에 안 볼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언제든지 표준은 하나님을 향하고 우리에게 주님으로 오셨으니까 오신 것은 ‘이렇게 닮아라. 이걸 보고 닮아라’ 하고 계시해서 준 것 아니요?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보고 닮아나와야 된다. 입맛 코맛 오각의 오감성을 모두 주님을 닮아나가야 된다. 그게 무슨 욕? 공욕이다. 그렇게 마음을 품는 것은 공욕이요. 그렇게 나갈 때에 모든 천군천사 모든 만물이 하나님이 심지어 마귀까지 공욕을 품고 나가는 일에 다 호응을 한다는 거. 그래서 우리가 성화구원을 보면 전혀 말릴 사람이 없어요. 환경적으로 어떤 환경에 처해졌던 그 환경으로서 거기에 성화구원의 수입이 잡혀지는 거지 성화구원에 손해 보게 만들려고 하는 그건 아니란 말이요. 말릴 사람이 없고. 그러니까 ‘사욕을 품느냐, 공욕을 품느냐’ 하는 것은 자기 할 탓에 있다.
예수 믿기 편하지요? 어렵습니까? 편하지요? 어떤 환경에 처해졌던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을 닮았듯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대로 살려고 했듯이 우리들도 이 사건을 보고 아브라함의 사건을 보고 하나님을 닮아나가야 된다.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아브라함을 등용시켜서 아브라함의 신행을 우리가 보고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의 그 신행의 걸음걸이가 온 세상만물 성도들 천군천사 할 것 없이 아브라함이 영이 기준이 되어 공욕을 품고 나갈 때에 그 신행의 발걸음걸을 모두 좋아하고 호응을 한 것을 저희들은 볼 수가 있습니다.
원합니다. 저희들의 마음속에도 소원적으로 목적적으로 아브라함과 똑같은 그 믿는 마음 우리 속에서도 움직이는 역사가 되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가 공욕을 품고 살 때에 아버지 하나님도 그 마음이 좋아서 주님 닮아가는 일에 호응을 하고 도와주고 모든 사건 환경을 동원시켜 주시고, 이것이 바로 공욕인 줄 압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 그 공욕을 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육을 위한 사욕적인 것이 많음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여 원합니다. 우리로 소원도 그렇고 목적도 그렇고 하나님께 향하여 갖는 모든 기도가 공욕을 품은 기도가 되어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옳은 기도가 될 수 있도록 축복을 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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