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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세상에 눈 뜨다(Opened to See God’s World)
요한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578 추천 수 0 2013.01.24 23:20:04성경본문 : | 요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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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2010년 12월 5일 |
2010년 12월 5일 주일 설교 “내 곁에 온 하늘 (2)”
“하나님의 세상에 눈 뜨다”(Opened to See God’s World)
--요한복음 1:1-5, 14, 18
1.
우리는 지난 주에 요한복음 1장 1절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사건을 기록하면서 요한은 우리에게 ‘태초’를 생각해 보라고 권고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나오는 ‘태초’가 아니라, 그보다 이전, 즉 시간과 공간이 창조되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창조되기 이전, 그 영원의 상태,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의 세상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은 쉬운데, 실제로는 감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영원’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로서는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의 공간 이상을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스테펜 호킹(Stephen Hawking)에 의하면 현대 물리학은 11차원까지 파악하고 있다니, 물리학에 문외한인 우리에게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산다’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 세 가지 단어, 즉 ‘영원’, ‘천국’, 그리고 ‘영생’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두가 우리의 경험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고 자기 방식대로 믿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눈부시게 발전하는 과학의 도움을 받아 이 세 가지 개념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현대 물리학에 문외한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제가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영원과 천국과 영생에 대해 과거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현대 물리학이 우리에게 전해 준 새로운 발견의 빛에서 천국과 영원과 영생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이미 해결한 분들에게는 확인의 차원이 될 것이고, 아직 믿기 어려워 하는 분들에게는 좀 더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계기가 되기 바랍니다.
2.
먼저, ‘천국’ 혹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많은 이들이 천국 혹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때, 우주에 있는 어떤 공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94년 2월 8일, 아주 신뢰하기 어려운 태블로이드판 신문 Weekly World News는 “허블 망원경이 찍은 천국”(Heaven Photographed By Hubble Telescope)라는 기사를 낸 적이 있습니다. 아래의 사진과 함께 말입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이 사진은 우주 연구가 마르시아 매쏜(Marcia Masson)이라는 사람이 나사(NASA)가 숨기고 있는 사진들 중 하나를 비밀스럽게 빼낸 것입니다. 이것은 허블 망원경이 우주의 한 쪽에 있는 이상한 소우주(galaxy)를 간신히 초점을 잡아 찍은 것입니다. 은하계만한 크기의 우주에 거룩한 성처럼 건물이 지어져 있습니다. 매쏜 박사에 의하면, 나사에서는 여러 가지 분석 결과 여기가 천국일 것이라고 판단했고, 바티칸에 보내어 교황에게까지 알렸으나, 일반인들에게 미칠 충격을 고려해 그 사진을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기사 밑에 메를린(Merlyn)이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답글을 달아 놓았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진실입니다. 허블 망원경은 천국이 진짜 존재하며 그곳이 하나님의 세계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우리 모두가 그곳에 오도록 초청하십니다. 우리 모두 그곳에 갑시다.” 이 사진과 기사가 아직도 일부의 사람들에게 숨겨진 진실처럼 취급되며 유포되고 있습니다. 천국 혹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주 어딘가에 있는 또 다른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이같은 기사에 혹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 4:17). 메를린이라는 사람처럼 천국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을 마치 혜성이 지구를 향해 근접해 오는 것처럼 이해합니다. 저 우주 공간 어딘가에 있는 천국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향해 오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말할 때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느 다른 공간으로 옮겨 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뢰할만한 물리학적 연구의 빛에서 보면, 천국, 하늘 나라 혹은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 존재하는 3차원 공간이 아니라, 3차원을 넘어서는 공간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옳습니다. 오늘 설교에서 저는 ‘1차원’, ‘2차원’, 혹은 ‘3차원’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할 것입니다. 요즈음 3D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3D TV’라고 하면, 2차원 평면 스크린에서 3차원의 입체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든 것을 말합니다. 1차원은 선, 2차원은 평면, 그리고 3차원은 입체 공간을 생각하면 됩니다. 더 복잡한 것은 저도 잘 모르고, 여러분도 이 분야의 전문가 외에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3차원을 넘어서는 공간이라? 도대체 그런 것이 있는지, 궁금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마음으로 3차원 이상의 공간을 경험해 왔습니다.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꿈 꿀 때, 우리는 3차원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 마음대로 옮겨 다닙니다. 물리적인 공간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았던 일들이 마음에서는 가능해집니다. 꿈 속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그것이 마음 안에서만 가능하지만, 그것이 현실로 가능해지는 세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천국이란 다른 곳에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마음으로 경험하는 것이 현실처럼 되는 공간일 것입니다.
3.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두려워서 예루살렘의 어느 골방에 숨어서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홀연히 나타나십니다. 문이 그대로 잠겨 있는데, 예수께서 들어오신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 그분을 알아보자 예수님은 홀연히 사라지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은 같은 시간에 갈릴리에도 나타나시고 예루살렘에도 나타나셨습니다. 도대체 전설같은 이야기요 신화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3차원 공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 안에서 그리고 꿈 속에서는 언제나 경험하는 일입니다. 만일, 3차원을 넘어서는 공간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아무 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셨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장면을 이렇게 그려 놓았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다음에, 그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들려 올라가시니, 구름에 싸여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1:9)
이 묘사 대로라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공중에 들려 올려져 지구가 아닌 다른 공간으로 이동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승천은 예수님이3차원 공간에서 신적인 차원(divine dimension)으로 옮겨 간 것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요 1:14)은 신적인 차원에서 3차원으로 내려 온 것이며, 영원의 차원에서 시간의 차원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이 부활하여 승천하셨다는 것은 다시금 신적인 차원으로 돌아가신 것이며, 영원의 차원으로 돌아가신 것을 말합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허블 망원경이 찍은 우주의 사진을 가지고 우주 여행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 것인지를 조금이나마 느껴 보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은하계 안에는 약 2천억개의 별들이, 적어도 4광년의 거리를 두고, 적어도 시속 48만 마일의 속도로 회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은하계와 비슷한 소우주(galaxy)가 천 이백 오십억개라고 합니다. 하나의 소우주와 소우주 사이는 약 2백만 광년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우주 안에 있는 소우주와 별의 수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어마어마한 우주를 상상하면서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우주 공간은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공간이기에 이 엄청난 별들과 소우주들이 각각 제게 주어진 길을 찾아 순환하고 있을까요? 그 우주의 끝으로 가면 그 모든 것을 가두고 있는 벽이 있을까요? 적어도 그런 벽이 있어야 서로 끌고 미는 힘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 벽이 얼마나 클까요? 그 벽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물리학자들이 제안하는 것처럼 풍선처럼 생겼을까요? 그렇다면, 그 풍선형의 우주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아니면, 그런 경계가 없는, 한 없이 열려진 공간일까요? 우주가 한 없이 열려진 공간이라면, 어떻게 그 거대한 소우주들이 매달려 순환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정답을 제공할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같은 생각을 통해서 얻는 결론이 있습니다. 적어도 우주 공간은 우리가 경험하는 3차원 공간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 보십시다. 저는 지금도 인터넷을 통해 경험하는 ‘가상 공간’(cyber space)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문학도인 저에게는 모든 말이 암호처럼 들릴 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컴퓨터를 통해 인터넷에 접속하여 상상할 수 없는 정보의 바다를 헤엄쳐 다닙니다. 그 모든 정보가 어느 곳에 어떻게 저장되어 있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어마어마한 공간을 인류가 발견해 내어 이제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공간을 우리 말로 ‘가상 공간’(virtual space) 혹은 ‘가상 현실’(virtual reality)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말의 ‘가상’은 ‘실제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인터넷 공간은 엄연한 실제입니다.
이처럼,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공간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천국, 하늘 나라 혹은 하나님의 나라를 인정하기가 훨씬 수월해집니다. 3차원의 제한 안에 갇힌 우리로서는 그 세상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런 세상이 있을 수 없다고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4.
이번에는 ‘영원’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시간은 1차원 즉 선과 같습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를 흘러갑니다. 어느 소설가가 한 말이 기억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뒷걸음질로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왜 뒷걸음질로 갑니까? 시간을 붙들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시간의 시작점을 바라보며 안 가려고 버팁니다. 그런데 발걸음은 저절로 움직여져 시간의 끝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것이 시간의 선 위에 있는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옛 시조가 생각이 납니다. 고려 시대의 선비 우탁 선생이 지은 ‘탄로가’(嘆老歌)입니다.
한 손에 막대를 쥐고 또 한 손에는 가시를 쥐고
늙는 길을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 했더니
백발이 제가 먼저 알고서 지름길로 오는구나
막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탄식한 노래입니다. 얼마나 늙는 것이 아쉽고 서러웠으면 이렇게 노래를 했겠습니까?
이렇게, 우리는 직선처럼 진행하는 1차원의 시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영원’을 한 없이 시간이 지속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일직선이 무한히 이어지는 것을 영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대 물리학이 가르쳐 준 바를 응용한다면, 영원은 일직선과 같은 시간의 흐름을 넘어서는 것을 가리킨다 할 수 있습니다.
잠시, 상상력을 동원하여 2차원의 시간을 생각해 보십시다. 시간이 직선으로 흘러가지 않고 평면으로 펼쳐져 있다고 생각해 보자는 말입니다. 시간의 선 위에서 오직 앞으로만 갈 수밖에 없던 우리는 시간의 평면 위에서 자유 자재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실제로 평면의 시간을 경험하고 있음을 아십니까? 우리는 마음으로 과거로 혹은 미래로 혹은 시간의 흐름을 벗어나 다닐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는 시간이 평면과 같습니다.
가령, 아내와 심하게 싸우고 나서 잠자리에 눕습니다. 잠을 기다리면서 과거를 회상하고, 그러는 중에 첫 사랑의 상대를 기억합니다. ‘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 상상을 하다가 깜박 잠에 들어 꿈을 꿉니다. 그 꿈 속에서 첫 사랑의 연인과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보니 그 사람이 마녀와 다름이 없습니다. 술에 만취하여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다가 악몽에서 깨어납니다. 악몽을 뿌리치려 고개를 흔드는 순간, 방금 전까지 밉던 아내가 갑자기 고마워집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마음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2차원 평면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고, 미래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났다고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영원은 1차원의 시간을 뛰어 넘는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의 시간과 질적으로 다른 차원을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에서 느끼는 것처럼 평면일지, C. S. Lewis가 추측한대로 원과 같을지, 아니면 입체일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뛰어 넘는 차원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5.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영생’에 대해서도 생각이 달라집니다. 목숨이 한 없이 연장되는 것이 영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부활’은 죽은 몸이 과거의 상태로 되살아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 가운데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대목에서 침묵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영생이 지금 이 몸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불로초를 찾던 진시황제가 바라던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영생과 같은 것입니까? 혹은 이집트의 왕과 귀족들이 자신과 가족의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면서 꿈 꾸었던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영생과 같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인생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이 다른 삶입니다. 1차원의 시간을 뛰어 넘어 영원의 차원에서 사는 삶을 말합니다. 3차원 공간에 갇히지 않고 하나님의 차원에서 살아가는 삶을 가리킵니다. 지금의 목숨이 한 없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목숨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삶을 가리킵니다. 영생을 얻었다는 말은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생은 죽고 나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육신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안에서 ‘영생’이라는 말과 ‘생명’이라는 말이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생명’은 목숨을 포함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것을 가리킵니다. 육신만 꿈틀대는 그런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그분에 의해 새로움을 얻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에 힘 입어, 그분의 뜻을 이루어가며 살아가는 것이 생명입니다. 우리의 목숨은 이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이렇듯, 하나님 안에서 질적으로 다른 생명을 찾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차원 즉 영원의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고 영원을 더듬어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물 속에 있는 잠자리 유충이 잠자리의 세계를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세계를 알 수 있는 것은 그 세계에서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 줄 때만 가능합니다. 그것을 ‘계시’(revelation)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세상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4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성자께서 육신을 입고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뜻입니다. 영원의 차원에서 1차원 시간의 차원으로 들어오신 것이며,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높은 차원에서 3차원 공간 안으로 들어 오셨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의 세상에 대해 우리에게 알리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입니다. 영생이 무엇인지, 천국이 어떤 것인지, 영원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그분을 보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세상에 눈 뜨고, 새 세상에 눈 뜬 사람처럼 살고, 마침내 그 새 세상에 새로 태어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강림절의 의미요 성탄 사건의 의미입니다.
6.
어느 교우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직업 군인으로서 많은 전투를 치루었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총상으로 인해 입은 부상 때문에 얼마 살지 못할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8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저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벌써 죽었어야 할 몸이 지금까지 산 것을 생각하면, 더 바란다면 제가 나쁜 놈입니다. 영생이고 천국이고, 저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냥, 지금까지 산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고백을 듣고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따져 보니, 저도 그렇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산 것에 더해, 무엇을 더 바랄 자격이 없다 싶었습니다. 이 귀한 한 번의 목숨을 부여받고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것 만으로도 저는 감지덕지입니다. 때로 이런 저런 욕심을 가져 보지만, 제게 그럴 자격이 있어서 그런 바램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제 정신으로 말한다면, 저는 언제나 “저는 지금까지의 생에 대해 감사할 따름입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영생을 말하고 천국을 말하고 영원을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신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태 속에 있는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칩시다. “나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엄마의 태 속에서 10개월 동안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그것으로 저는 됐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때가 되면 모태로부터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영원, 하늘 나라, 그리고 영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때가 되면 그 현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세상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살고, 마침내 우렁찬 울음과 함께 새 세상에 태어나는 것,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현실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면, 우리 삶의 모든 면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심지어 늙어가는 것에 대해서도 다른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서두에서 저는 우탁 선생의 ‘탄로가’를 읽어 드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에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의 어쩔 수 없는 탄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서 영원에 눈을 뜨면, 늙어가는 것이 달리 보입니다.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이 쓴 ‘랍비 벤 에즈라’(Rabbi Ben Ezra)라는 시의 첫머리에서 노래한 것처럼 말입니다.
나와 함께 늙어라!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인생의 전반기는 후반기를 위해 있는 것.
우리의 시간은 그분의 손에 있다.
그분이 말씀하신다.
“모든 것을 내가 계획했다.
젊음은 반쪽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의지하라.
전체를 보고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라!”
오늘의 말씀이 영원, 천국, 하늘 나라, 하나님의 나라, 혹은 영생을 믿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부디, 성령께서 요한에게 불어 넣으셨던 영감의 메시지(inspired message)가 무엇이었는지, 좀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세계에 눈을 뜨고, 그 세계와 연결되어 하루 하루를 사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세상에서 자신을 발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영원에서 시간으로 들어오신 주님,
천국에서 이 땅으로 오신 주님,
목숨에 생명을 담으셨던 주님,
영으로서 육신을 입으셨던 주님,
저희의 눈을 뜨게 하소서.
시간 속에서 영원을 경험하게 하시고,
이 땅에서 천국을 보게 하시며,
목숨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시고,
육신을 입었지만 영적인 존재로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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