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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 속에 계신 하나님(God Who Abides In A Tent)

요한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1898 추천 수 0 2013.01.24 23:24:06
.........
성경본문 : 요1:14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2010년 12월 12일 

2010년 12월 12일 <강림절과 주현절을 위한 연속설교>

 “내 곁에 온 하늘” (3)

“텐트 속에 계신 하나님”(God Who Abides In A Tent)
--요한복음 1:14

 

1.

지난 두 주일 동안 우리는 ‘태초’를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가늠해 보았습니다. 아직도 그 전모가 다 드러나지 않은 어마 어마한 우주를 지으신 분, 지금 우리의 인식 능력으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영원’의 차원에 계신 분, 그리고 허블 망원경으로 드러난 우주의 실체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하늘 나라’의 주인,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이같이 ‘영원’, ‘천국, ‘영생’ 혹은 ‘하나님’ 같은 주제들을 붙들고 씨름하다 보면, 바울 사도가 한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노래하는 가운데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고전 13:12)

 

지금 우리가 보는 사용하는 거울은 솜털까지도 다 보여 주지만, 바울 당시의 청동 거울은 대강의 윤곽만을 보여 줄 뿐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영원에 대해, 천국에 대해 혹은 영생에 대해 더듬어 생각하는 것이 마치 청동 거울로 얼굴을 비추어 보는 것과 같습니다. 눈을 감고 코끼리를 더듬어 알려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더듬어 알기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요즈음 많이 불리는 찬양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다 표현 못해도 나 표현하리라
다 고백 못해도 나 고백하리라
다 알 수 없어도 나 알아가리라
다 닮지 못해도 나 닮아가리라

 

이 노래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것인데, 우리가 믿는 것에 모두 적용할 수 있는 가사입니다. 천국에 대해, 영원에 대해 그리고 영생에 대해서 우리는 다 알 수도 없고, 다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부단히 알아가야 하고 또한 할 수 있는대로 표현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점점 더 깊이 알아 가게 될 것입니다.  

 

2.

성령께서는 요한으로 하여금 어마어마한 선언으로써 예수님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하십니다. 나사렛 청년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읽기 전에 먼저 천지창조 이전의 그 태초의 시점으로 우리의 눈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1:1)

 

하지만 성령께서는 요한의 손을 빌어 곧바로 이렇게 쓰게 하십니다. 태초로 향했던 눈길을 다시금 이 땅으로, 현재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아무 것도 창조되기 이전의 ‘태초’로 눈길을 돌렸던 우리에게 다시금 눈길을 돌려 남루한 옷을 입고 팔레스틴 땅을 돌아다니며 전도했던 나사렛 청년 예수를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 말씀,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하나님 자신이기도 했던 그 말씀이 2천 년 전 역사의 한 시점에서 지구의 한 구석에 오시어 나사렛 청년 예수에게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육신의 교리’(doctrine of incarnation)라고 부릅니다. ‘성육신’이라는 말은 ‘거룩한 육신’이라는 뜻이 아니라, ‘육신이 되었다’(成肉)는 뜻입니다. 한자로 ‘화육’(化肉)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선언은 그 중요성 때문에 그리고 이 구절에 담겨진 심오한 의미 때문에 여러 가지로 번역되어 왔습니다. 그 뜻을 담아 저 나름대로 다시 번역해 본다면 다음과 같이 할 수 있습니다.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텐트를 치고 한 동안 살다 가셨다.

 

이 번역은 헬라어 원전에서 사용된 단어의 의미를 최대한 살려서 의역한 것입니다. ‘사셨다’라고 번역한 헬라어 ‘스케노오’는 텐트를 의미하는 ‘스케네’에서 나온 동사입니다. 또한 ‘사셨다’는 동사의 시제는 과거에 한 동안 지속되다가 끝난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텐트를 치고 한 동안 살다 가셨다”고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번역해 놓고 보면, 두 가지 사실이 부각됩니다. 첫째, 태초의 그 말씀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일시적인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텐트는 영구적인 처소가 아닙니다. 특별히, 유목 생활에 익숙했던 요한복음의 독자들은 그 의미를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것입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한 장소에서 정해진 기간 동안만 머물다 가는 것이 텐트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활동한 것은 한시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둘째, 텐트의 모습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즈음에 판매되는 텐트는 값비싼 것도 있고, 고급스러운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의 텐트는 탄탄하기는 했지만 볼품이 없었습니다.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사용하다 보니, 대개는 얼룩지고 해어지고 닳아버린 것들이 많았습니다. 자주 옮겨 다녀야 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텐트의 미덕은 실용성에 있었지 미관에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도 도시나 촌락에는 호화로운 저택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텐트는 매력에서 매우 뒤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 말씀’이 인간으로 오셨을 때, 그 모습이 마치 유목민들이 사용하는 텐토처럼 별 볼품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3.

영원의 차원에 계시던 그 말씀이 시간의 차원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가 누리는 수명에 비하면 너무도 짧은 30 남짓 살다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의 차원’이 30여년이라는 짧은 시간을 도드라지게 만듭니다. 인류의 역사만 생각해 보아도, 예수님의 30여년의 인생 그리고 3년도 채 되지 않는 그분의 공생애는 하나의 점과 같습니다. 그런데 영원이 한 점과 같은 시간 안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정신사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과 비교할 때, 예수님은 너무도 짧은 생애를 사셨습니다. 석가모니는 80 이상을 살았고, 45년 정도를 여행하며 가르쳤습니다. 공자는 72세를 살았고, 소크라테스도 70세를 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수 십 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그 절반도 살지 못했고, 대중에게 나타나 활동한 시간은 10분의 1도 되지 않습니다. 그 짧디 짧은 활동을 통해 인류 역사에 그토록 깊고 넓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또한,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의 어마어마한 위엄과 영광을 생각하면서 허름한 텐트를 상상해 보십시다. 고대 이집트의 왕이 그의 모든 위엄으로 차려 입고 양치기의 텐트 안에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됩니다. 혹은 오바마 대통령이 DC에 있는 무숙자 쉼터에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태초의 그 말씀’이 인간이 되기를 선택했을 때, 그분은 가장 낮고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름 없는 처녀 마리아를 어머니로 택하셨고, 목수 요셉을 양아버지로 택하셨습니다. 이름 없는 동네 베들레헴의 어느 동굴을 탄생의 장소로 삼으셨고, 짐승의 먹이통을 잠자리로 선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는 동네 나사렛을 고향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텐트를 치고 그 속에 앉아계신 형국입니다.

 

기독교가 다른 세계 종교와 차원을 달리하는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세계 종교들에서 신은 언제나 그 사회의 엘리트 계층을 선택하고 그들을 통해서 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 계층에 도전하는 것은 곧 신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하지만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선택하여 일하십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공생애를 잘 관찰해 보면, 이같은 경향이 뚜렷합니다. 그분 자신이 가난한 가정에서 탄생하셨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셨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왕에게 반역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것이 아닐 수 있어도, 가난하고 힘 없는 한 사람을 눈물 흘리게 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이 눈물 흘리게 만드는 일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기독교는 세계 다른 종교와 뚜렷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은 30 여년의 짧은 인생을 살았던 그 사람, 사람들에게 나타나 활동한 것이 채 3년도 되지 않는 그 사람,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시골에서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 사람, 교육과 경험에 있어서 변변히 내세울 것이 없던 그 사람,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그 사람, 그 예수를 제대로 보라는 것입니다. 겉모습만 보지 말고, 그 짧은 시간 안에 농축된 영원을 보고, 변변하지 못한 이력에 담긴 영원한 존재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다지 매력 있어 보이지 않는 외모에 담긴 ‘태초의 그 말씀’을 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후반부에서 요한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여기서 ‘보았다’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 ‘테아오마이’는 ‘주의해서 보다’ 혹은 ‘집중해서 보다’라는 뜻입니다. 극장을 뜻하는 영어 theater가 이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마치, 극장에서 연극을 보는 사람처럼 예수님을 집중해서 보면, 그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는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었지만,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보아야만 합니다.

 

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을 보실 때, 무엇을 보셨습니까? 여러분이 보신대로 판단한다면,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안토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의 우화집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성 속옷을 파는 전문점의 점원인 샘이 유럽 여행에서 돌아왔습니다. 같은 가게에서 일하는 동료가 궁금하여 물어봅니다.
“샘, 로마에도 가 봤어?”
“물론이지!”
“그러면 교황님도 보았어?”
“교황님을 보았냐구? 그분과 일대 일로 만났다면 믿겠어?”
“그럴 수가!”
동료 점원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묻습니다.
“그래, 교황님이 어떻게 생겼던가?”
샘이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내 생각에 110 싸이즈면 맞을 것 같아!”

 

혹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교황을 알현하고 나서 그의 속옷 치수만을 보고 나오는 사람과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과연,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까지 유심히 그리고 집중하여 그분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겉으로 보이는 것에 근거하여 판단하고 지나쳐 버립니까?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이같은 잘못을 범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을 방문합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그분이 설교를 하시는데, 그 말씀에서 범상치 않은 권위가 느껴졌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막 6:2-3)때로는 안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앎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심히, 주의 깊게 그분을 관찰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에게 뭔가 이상한 것이 있음을 알아차렸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는 마음으로 집중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그들도 예수님에게서 ‘외아들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차이입니다. 교황을 알현하고 나서 속옷 싸이즈만 알아냈다면, 그 만남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만남을 통해 교황의 인격과 신앙의 향기를 느꼈다면, 그 만남은 그 사람의 삶에 큰 변화를 안겨 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실제 예수님을 실제 그분보다 작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믿지만 그분에게서 받는 영향력이 미미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고 그분을 그분답게 믿는 것이 필요합니다. 

 

5.

많은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교리 중 하나가 예수님의 신성입니다. 나사렛 청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믿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한 인간이 인간이면도 동시에 신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몸을 해부학 실험실에서 분석하면 보통 사람의 몸과 다른 점이 발견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 예수님의 신성이 이해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초대 교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이유는 그분의 해부학적 구조를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즉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고대 교회에서 예수님에 대해 “참된 인간이요, 참된 신이다”라고 결론 지은 것도 그분을 주목해 보고 낸 결론입니다. 마치,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사람들처럼 예수님에 대해 깊이 관찰한 결과 내린 결론입니다.

 

저자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어느 고독한 생애’(One Solitary Life)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저자가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전하는 사람마다 약간씩 다릅니다만, 예수를 깊이 관찰한 사람의 깨달음을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거의 2천 년 전, 잘 알려지지 않은 어느 마을에서 한 노동자의 아내에게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다른 동네로 이사 가 30세가지 목수로 살았습니다. 그런 다음 3년 동안 그는 방랑 전도자로 삽니다.

 

이 사람은 대학이나 신학대학에 가 본 일이 없습니다.책을 쓴 적도 없습니다. 공직을 가져 본 일도 없습니다. 가정을 꾸려 본 일도 없고, 집을 소유한 적도 없습니다. 그는 큰 도시에 가 본 일도 없고, 태어난 곳에서 200마일 이상을 가 본 일이 없습니다. 위대한 인물이 하나 둘쯤은 가지고 있을 이같은 이력이 그에게는 하나도 없었지만, 일단의 사람들이 그를 좇았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 외에는 다른 보증서가 없었습니다.

 

그가 아직 젊을 때, 여론이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달아났습니다. 그는 적대자들의 손에 넘어가 수치스러운 재판을 거쳤습니다. 그는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쳐형 당했습니다. 그가 죽어갈 때, 처형자들은 그의 유일한 유품인 외투를 놓고 내기를 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어느 친구가 제공해 준 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19세기가 오고 갔습니다. 오늘, 그는 인류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의 탄생은 인류의 역사를 두 시대로 나누는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일 주일에 하루는 그를 기념하는 일을 위해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큰 축제 두 개는 그의 탄생과 부활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예배당 종탑의 십자가는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한 사람의 생애는 그 누구 혹은 그 어떤 사건보다도 더 많은 노래와 책과 시와 그림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수의 학교와 병원과 고아원과 시설들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준 그 사람을 위해 지어졌습니다. 역사 상, 전쟁에 참가했던 모든 군대들, 해전에 참여했던 모든 전함들, 그동안 존재했던 모든 정부들, 그동안 권좌에 올랐던 모든 왕들을 다 합해도 이 고독했던 사람만큼 역사의 흐름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생애로부터 초월적인 사건들을 모두 배제했습니다. 예수님이 처녀에게서 탄생했다는 것,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 부활하셨다는 것, 부활하신 다음 40일만에 승천하셨다는 것을 모두 제외시켰습니다.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해도 그분에게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비로소 “그 말씀은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텐트를 치고 한 동안 살다 가셨다”는 요한복음 1장 14절의 선언에 귀 기우릴 수 있게 됩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여쭙니다. 여러분은 나사렛 예수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분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분을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혹시, 예수께서 남겨 놓으신 남루한 텐트 자락만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분이 대중에게 나타나 활동했던 짧은 시간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게 된다면, 그분에 대한 여러분의 평가는 기껏해야 ‘위대한 스승’이라는 결론을 넘어설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그분이 생애 동안에 남긴 업적으로 따진다면, 위대한 스승의 반열에도 들어가기 어렵고, 위인 전기 전집에 포함하기도 손색이 많아 보입니다. 정신적인 업적으로 본다면, 소크라테스나 공자가 더 커 보이고, 정치적인 업적으로 본다면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이 휠씬 더 커 보입니다.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분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왜 그분이 인류 역사에 이토록 깊고 넓은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이 활동한 시간이 찰나와 같았지만, 그 안에 영원이 담겨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분이 남긴 가르침의 분량이 한 줌 밖에 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진리의 절대성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하신 일들이 별 것 없어 보이지만, 그 일들 하나 하나가 영원의 차원에 연결되어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분의 삶과 죽음이 역사의 한 해프닝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보려면 대충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극장에서 연극을 보는 사람처럼 오래도록, 집중해서, 마음 다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읽고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우리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하나님의 절대 진리에 연결되어 있고, 그분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오며, 그분의 행동이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열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을 열고 지금도 우리 가운데 활동하시는 그분을 찾고 구하면, 그분이 여러분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보다 그분이 우리를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계 3:20)

 

우리 마음의 문은 그 손잡이가 안에만 있습니다. 밖에서는 열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손기척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을 초청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틀림 없이 오셔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그분이 누구인지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이 진실로 누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성령께서 요한을 통해 적은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7.

예수를 예수답게 믿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어 얻는 유익은 우리가 믿는 분량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위대한 예언자로만 믿으면, 그분은 위대한 예언자의 분량 만큼만 우리에게 유익을 끼칠 것입니다. 그분을 위대한 스승으로만 믿으면, 그분은 위대한 스승의 분량 만큼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굳이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다른 위인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를 믿고 따르면서도 영원에 눈 뜨지 못하고 하늘 나라를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교황을 만나고 나서 속옷 치수나 기억하는 샘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같은 구원을 주실 분은 하늘 아래 그리고 창세 이래 예수님 밖에 없었고 또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헬렌 켈러(Helen Keller)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성탄 시즌에 진정으로 눈 먼 사람은 그 마음에 예수의 탄생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입니다.”(The only blind person at Christmastime is the one who has not Christmas in his or her own heart.) 헬렌 켈러 자신이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일은 내 마음에 예수게서 태어나는 일입니다. 위대한 예언자로서가 아니라, 혹은 위대한 스승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태어나야만, 우리가 성탄절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것이 의미를 가집니다. 이같은 은총이 이번 성탄절에 저와 여러분 위에 임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름 없는 한 여인에게 임하셨던 주님,
저희에게도 오소서.
이름 없는 동네 베들레헴에 나셨던 주님,
저희의 오염된 마음에도 오소서.
저희의 눈을 뜨게 하셔서
주님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주님을 주님답게 믿게 하소서.
주님만이 줄 수 있는 은혜를
얻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 은혜를 또한 전하게 하소서.
아멘.
 
<속회 자료> 2010년 12월 12일 주일 설교 “내 곁에 온 하늘” 세 번째
“텐트 속에 계신 하나님”(God Who Abides In a Tent)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85장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요한복음 1:1-18을 다시 읽습니다. 특별히 14절의 말씀을 묵상하며 예수님이 누구신지 생각해 봅니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한 가지씩만 나누어 보십시오.
2)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교리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믿게 되었으며,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3) 당신에게는 성탄절 사건(예수께서 당신의 마음에 들어오는 사건)이 언제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에게 태어난 그 예수가 지금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5. 중보기도

1)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2) 더 많은 이들에게 성탄절의 사건이 일어나도록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의 열정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6.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101장
7. 광고 후 주기도문을 드림으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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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8 요한복음 죽임 당하신 어린 양(The Lamb That Was Slain) 요1:29-31  김영봉 목사  2013-01-24 2324
8197 요한복음 나 답게 되기(To Be Myself) 요1:19-28  김영봉 목사  2013-01-24 2672
8196 요한복음 은혜와 진리가 만날 때(When Grace Meets Truth) 요1:14  김영봉 목사  2013-01-24 2539
8195 마태복음 하나님의 살갗(God’s Skin) 마1:22-23  김영봉 목사  2013-01-24 2069
8194 요한복음 빛이 되신 로고스(The Logos Who Is the Light) 요1:1-5  김영봉 목사  2013-01-24 2427
» 요한복음 텐트 속에 계신 하나님(God Who Abides In A Tent) 요1:14  김영봉 목사  2013-01-24 1898
8192 요한복음 하나님의 세상에 눈 뜨다(Opened to See God’s World) 요1:1-5  김영봉 목사  2013-01-24 2578
8191 요한복음 영원에서 온 메시지(A Message from Eternity) 요1:1-5  김영봉 목사  2013-01-24 4780
8190 마가복음 지금은 주의 인도를 받아야 할 때입니다 막2:1-11  이동원 목사  2013-01-24 2493
8189 예레미야 마중물이 되자 렘15:1-14  최장환 목사  2013-01-23 5912
8188 이사야 소망을 갖는 자 사26:1-15  최장환 목사  2013-01-23 5284
8187 고린도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 고후9:1-15  최장환 목사  2013-01-23 4111
8186 히브리서 함께하시는 주님 히9:1-14  최장환 목사  2013-01-23 3961
8185 출애굽기 기적과 술법 출7:20-25  이성희 목사  2013-01-22 3798
8184 출애굽기 물이 피가 되리라 출7:14-19  이성희 목사  2013-01-22 4110
8183 출애굽기 지팡이를 삼킨 지팡이 출7:8-13  이성희 목사  2013-01-22 3563
8182 출애굽기 손을 펴신 하나님 출7:5-7  이성희 목사  2013-01-22 4650
8181 출애굽기 순종을 가로막는 것들 출7:1~7  박봉수 목사  2013-01-22 3603
8180 출애굽기 대언자 아론 출7:1-4  이성희 목사  2013-01-22 1753
8179 출애굽기 인생의 자기 운영 출7:5~7  이정익 목사  2013-01-22 1843
8178 출애굽기 아론에게 배운다 출7:1-7  박흥규 목사  2013-01-22 1474
8177 출애굽기 강퍅한 마음을 향한 경고 출7:1-6  피영민 목사  2013-01-22 1891
8176 출애굽기 그대로 행하였더라 출7:1-7  윤대영 목사  2013-01-22 1492
8175 출애굽기 주일을 거룩히 지키자. [1] 출6:13-31  임덕순 목사  2013-01-21 2025
8174 출애굽기 바람직한 교회 출6:1-8  서정호 목사  2013-01-21 1848
8173 출애굽기 언약의 하나님 출6:2-27  성홍모 목사  2013-01-21 3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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