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마1:22-23 |
---|---|
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2010년 12월 25일 설교 |
2010년 12월 25일 설교
<강림절과 주현절을 위한 연속설교> ‘내 곁에 온 하늘’ (5)
“하나님의 살갗”(God’s Skin)
--마태복음 1:22-23; 요한복음 1:14
1.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특별히, 오늘 예배에 함께 하신 평화나눔 공동체 형제 자매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성탄절의 의미를 설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을 보면,
천사가 요셉에게 그 의미를 전합니다. 천사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면서 이사야서
7장 14절의 예언을 상기시킵니다. 그 예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마태는 독자들을 위해서 ‘임마누엘’이라는 히브리어의 뜻을 친절하게 설명해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오신 사건입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는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계셨고,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온 우주와 생명을 창조하신 그 로고스, 그 말씀, 즉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사건을 축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빌립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한 번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요 14:8). 사실, 이 질문은 신에 대해 의문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두 번쯤은 가지는 질문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에서 가르칠 때, 학생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도 이 질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예수께서 남긴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 우리 번역으로 ‘영’은 ‘유령’ 혹은 ‘혼령’과 같은 의미와 뒤섞여 있어서,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씀의 뜻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이라는 말의 히브리말 ‘루아흐’(ruach)은 ‘숨’, ‘바람’을 뜻하고, 헬라말 ‘프뉴마’(pneuma)도 ‘바람’을 뜻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바람이시다”라고 바꾸어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령이나 혼령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바람처럼 손에 잡을 수 없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그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웬만한 사람들은 신이 존재한다면 마땅히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렇게 알고 그렇게 믿는 사람들도 때로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제게 좀 보여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좀 더 절실히, 좀 더 가까이, 좀 더 실감나게 그분을 느껴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같은 영적인 갈구가 저에게도 있고, 여러분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2천 년 전, 우리 중에 일어난 성탄의 사건은 바로 이 영적 갈망에 대한 대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싶은 열망,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싶은 열망, 하나님을 손에 잡은 듯이 확실하게 믿고 싶은 열망에 대해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성탄의 사건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게 우리와 만나 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게 해 달라는 빌립에서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답하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 일을 하신다. (요 14:9-10)
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조용히 머물러 앉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바람이신 성령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좋지만, 혹은 성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좋지만, 더 자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2천 년 전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던 그 분, 우리와 동일한 유혹과 번민과 아픔을 겪으셨던 그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던 그 분,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부활하여 우리의 주님이 되신 분, 그리고 장차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심판하시고 온전하게 하실 분, 그 예수의 이름을 불러 보십시오. 그렇게 부르며 기다리면, 바람같이 잡기 힘들었던 하나님이 손에 잡히는 것처럼, 혹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여러분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새벽, 성탄의 의미를 묵상하며 기도하던 중에 제게서 다음과 같은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시여,
당신은 저의 구원자이십니다.
저의 희망이십니다.
그리스도시여,
나의 주님이시여,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셨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시여,
나의 주님이시여,
주님을 사랑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갈릴리 땅을 걸으셨고
사마리아 땅을 방문하셨으며
때로 유대 땅에 다니신 주님,
가르치시고 전도하시며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주님,
주님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 예수시여,
당신의 백성들에게 버림받고
제자들에게 배신 당한 채
강도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시여,
당신이 저의 구원자이십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경배합니다.
당신은 저의 구원자요 저의 소망입니다.
저를 주님께 바칩니다.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2천 년 전에 우리 가운데 육신이 되어 오셨던 그 예수님을 생각하며 한 참을 고백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 주님이 저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새롭게 느껴지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이 몸에 퍼졌습니다. 임마누엘의 경험, 즉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새로이 경험한 것입니다.
이렇듯, 성령이나 성부 하나님을 생각하면 때로 막연하게 느껴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훨씬 구체적으로 생각되고, 그래서 더 인격적이고 친근한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따로 또 같이’ 활동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므로, 누구를 통하든 결국은 하나님을 전체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분의 임재를 온 몸으로 느낄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위로와 기쁨과 용기가 우리의 존재를 덮습니다.
네 살짜리 여자 아이가 어느 날 잠을 자다가 한 밤 중에 깨어 일어났습니다. 그 아이는 어둠 속에 온갖 유령과 도깨비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이는 황급히 일어나 부모님이 자는 방으로 달려갔습니다. 어머니는 놀란 딸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손을 잡아 다시 그 아이의 방으로 이끌었습니다. 어머니는 불을 켜고는 딸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무서워할 필요 없다, 아가야. 너는 여기 혼자가 아니야. 하나님이 이 방에서 너와 함께 계신단다.” 그러자 그 아이가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것을 나도 알아요. 하지만 누군가 살갗을 가진 사람이 이 방에서 나와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것은 단지 네 살짜리 어린 아이의 바램만은 아닙니다. 때로 저의 바램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바램이기도 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손에 잡히지 않아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만, 때로는 그 하나님이 살갗을 입고 다가와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의심 한 톨 없이 그분을 믿고 의지하고 동행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실은 그 소원이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2천 년 전에 하나님께서 살갗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 살갗을 지금은 만질 수 없지만, 마치 그분이 살갗을 입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처럼 분명하고 실감나게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영적 임재를 믿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 그분이 마치 살갗을 가진 존재처럼 그렇게 실감나게 만나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게 예수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여, 살갗을 입고 나타나신 것처럼 분명하게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살갗을 입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루 하루를 주님과 실감나게 동행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예수의 이름, 그리스도의 이름, 그 고귀한 이름을 부를 때마다, 보이지 않는 그분의 손이 내 손을 잡아 주시고, 들리지 않는 그분의 음성이 내 귀에 들리는 은총과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께서 인간의 살갗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성탄절 사건을 생각할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살갗을 입고 오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역시 그렇게 다른 사람의 살갗을 입고 이웃에게 나가기를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위로와 평안과 용기와 소망을 주시는 것은 나 혼자만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그같은 구원의 사건이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먼저 그분을 만난 사람들을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이웃의 살갗을 입고 이웃에게 찾아간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첫째, 이웃을 제대로 만나려면, 이웃에게 진실한 관심을 가지고 그 사람의 상태로 내려가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이웃 사랑의 첫 번째 조건은 그 사람의 수준까지 내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준까지 내려 온 것처럼, 그리고 인간의 수준 중에서도 가장 낮은 수준까지 내려 온 것처럼, 우리가 진정으로 이웃을 만나려면 그가 처한 수준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낮아지는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렇게 낮아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을 통해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면, 이 낮아짐에로의 부름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그 은혜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탄 사건의 은총을 입은 우리는 마땅히 성탄 사건이 우리에게서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귀 기우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기 위해, 그의 자리까지 낮아져야 합니다. 믿음의 성숙성의 정도는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의 정도와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이웃을 찾아갈 때 살갗을 입어야 한다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우리의 사랑과 관심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음’과 ‘물질’이 함께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물질은 때로 역겹습니다. 반면, 물질로 표현되지 않는 마음은 공허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진정으로 관심한다면, 그 관심은 행동으로, 물질로, 시간으로, 눈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저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나눕니다. 한국에서 지낼 때,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부모님이 사시는 고향집에 내려가 하룻 밤을 자고 왔습니다. 집에 내려갈 때면 부모님께서 좋아하시는 과일과 음식을 몇 꾸러미 사서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런 것은 여기서도 살 수 있으니께, 애써 사오지 말구, 그냥 돈으루 다구. 그러먼 내가 알어서 아버지 좋아하시는 거 사다 드리께.”
사실, 듣던 중 반가운 말씀이었습니다. 내려 갈 때마다 뭘 살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시간을 절약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집에 갈 때마다 ‘빠닥돈’을 흰 봉투에 넣어 어머님께 드렸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서 어머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애비야, 그래두 그렇지, 어떻게 맨날 봉투만 내민다니? 그래두 가끔 뭣 좀 들구 와야지.”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저보고 어쩌라구요?” 반문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뒤통수를 강하게 내려 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머님께 드리는 봉투에 마음이 들어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귀신같은 제 어머님께서 그것을 느끼신 것입니다. 물론, 과일과 음식 몇 꾸러미를 사는 것보다 봉투를 드리는 것이 더 많은 돈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봉투를 드리면서부터, 부모님을 생각하고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좋은 물건을 사기 위해 마음 쓰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물질은 더 컸지만, 그 안에 마음이 없었습니다.
같은 이치입니다. 이웃을 향해 갈 때, 마음과 행동, 정성과 물질이 함께 가야 합니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질을 주었으니 다 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약 2:16-17)
이웃 사랑에 있어서 첫 번째는 그 사람의 수준으로 낮아지는 것이지만,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은 행동으로, 물질로, 눈물로, 시간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에 살갗을 입혀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에 피부를 입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사람은 우리가 만난 그 하나님께서 살갗을 입고 찾아오시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기쁨으로 채워주는 일입니다.
5.
2010년도에도 성탄을 맞으며 축하할 수 있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우리는 몇 번 더 성탄을 맞이하고 축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생각하면, 한 해 한 해 맞는 성탄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다. 얼마나 더 많은 성탄을 맞아야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부디, 이번 성탄이 여러분의 영적 여정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살갗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을 진실하게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여러분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살갗을 부비는 것만큼이나 분명하게 그분의 임재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 임재를 느낄 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안식과 용기와 소망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이웃의 살갗을 입고 이웃을 찾아가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우리를 흔들어 깨우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못한 이웃을 돌아 보며, 그 수준으로 스스로 내려가 진실하게 공감하며, 내 시간과 물질과 눈물을 내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만나는 동안, 그 이웃은 하나님이 살갗을 입고 찾아오시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물질과 시간이 이같은 고귀한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살갗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희가 그렇게 주님의 임재를 실감하고 싶습니다.
저희로 마음 다해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소서.
주님께서 살갗을 입고 저희 집에 오신 것처럼
그렇게 매일 동행하게 하소서.
그 은혜의 능력으로써
저희도 또한 이웃에게 눈을 돌리게 하시고
그의 살갗을 입고 다가가게 하소서.
저희를 통해
살갗을 입고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