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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답게 되기(To Be Myself)

요한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672 추천 수 0 2013.01.24 23:38:58
.........
성경본문 : 요1:19-28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2011년 1월 9일 설교와싱톤한인교회 

2011년 1월 9일 설교 
‘강림절과 주현절을 위한 연속설교: 내 곁에 온 하늘(7)
“나 답게 되기”(To Be Myself)
요한복음(John) 1:19-28

1.

예수께서 갈릴리에 나타나서 활동하기 얼마 전, 유대 광야에서 활동을 하면서 상당한 주목을 받던 사람이 있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나이 들어 얻은 아들 요한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세례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세례를 베푸는 것이 그의 활동 중 가장 특이한 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특별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세례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베푸는 의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받으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방인들이나 받게 되어 있는 세례를 유대인들에게 받으라고 요청했다는 것은 상당한 물의를 일으킬만한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던 선민으로서의 특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십시다. 어느 목회자가 우리 교회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칩시다. “여러분, 저에게 다시 세례를 받으십시오.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이든 아직 받지 않은 사람이든 상관 없습니다. 저에게 다시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 교회에서 베푼 세례는 모두 무효라는 뜻입니다.

과거, 근본주의적인 입장을 가진 침례교 목회자들에게 그런 경향이 있어서 믿는 사람들이 쓸 데 없는 혼란을 겪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약 20여 년 전, 캐나다 토론토에서 목회할 때 이 문제로 인해 한 여자 청년과 아주 고통스러운 대화를 나눈 기억이 납니다. 그 청년은 대학 신앙 서클을 통해 어느 침례교 목회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목회자로부터 몸 전체를 물에 담그는 ‘침례’(baptism by immersion) 외에는 그 어떤 형식의 세례도 무효라고 세뇌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침례를 다시 받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청년에게 ‘세례’(baptism by sprinkling)와 ‘침례’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해 주었지만, 그 청년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 침례교회 목회자에 의해서 그 청년의 마음이 완전히 침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이렇게 주장하는 분이 계시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진실한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라면, 침례든 세례든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청소년 세례를 베풀 때, 침례와 세례 중에서 선택하게 합니다. 두 의식의 영적 효력은 동일하지만, 각자의 생각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르지만 틀리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하도록 돕습니다. 때로, 지엽적이고 형식적인 문제를 가지고 마치 신앙의 본질인 것처럼 요란을 떠는 사람들을 만나면, 숨이 꽉 막히는 듯합니다.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받으라고 요청한 것은 그런 지엽적이고 형식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의 본질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선민 의식은 매우 강했고, 선민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구원 받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같은 믿음이 그들의 삶 속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외적인 행동에 있어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별되었습니다만, 삶의 질에서 있어서는 다를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은 없고, 그 믿음에 걸맞는 행실도 없으니, 선민으로서의 자격은 무효가 되었다는 것이 요한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마 3:7-10)

2.

이같은 메시지를 선포하며 세례를 베풀고 있었던 요한은 유대교의 기득권자들에게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들 생각에, 요한은 제 정신이 아니거나, 제 정신이라면 뭔가 깊은 뜻을 품고 있는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요한이 미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혹시나 그가 400년 넘게 대가 끊어졌던 예언자의 대를 잇는 사람이 아닌가? 아니면, 학수고대한 메시야는 아닐까?’ 그들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당시 유대교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에서 제사장과 레위 지파 사람들이 요한을 찾아왔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예루살렘 성전을 파먹고 살았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유대인들을 대표하여 요한에게 찾아와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19절) 요한은 그렇게 묻는 그들의 의중을 알아챘습니다. “혹시, 당신이 그리스도 즉 메시야가 아닙니까?”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20절)  

그러자 그들이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요? 엘리야요?”(21절) 당시 유대인들은 말라기 4장 5-6절의 예언에 따라 메시야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재림하여 메시야의 길을 닦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도 요한은 “아니오”라고 답합니다. 그들이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그 예언자요?” 당시 유대인들은 신명기 18장15절과 18절의 예언에 따라, 마지막 날에 모세와 같은 ‘그 예언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도 요한은 여전히 “아니오”라고 답합니다.

요한을 찾은 대표단은 답답해졌습니다. 선민 유대인의  특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엄청난 도발을 한 사람이 미친 것도 아니요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도, 엘리야도,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그러면 어떻게 이 사태를 받아 들여야 한단 말입니까? 절박해진 그들은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좀 해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시오?”(22절) 이 때 내어 놓은  요한의 대답은 기억할만 합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너희는 주의 길을 곧게 하여라’하고 말이오. (23절)

유대인들이 요한에게, 신앙적인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간절히 기대하고 있던 메시야, 엘리야, 혹은 모세와 같은 그 예언자가 아니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이 질문 앞에서 요한은 잠시라도 다음과 같은 유혹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어,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보고 있단 말이지? 혹시, 저 사람들의 생각이 맞는 것은 아닐까? 혹시, 내가 내 자신을 너무 작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요한은 못이기는 척 그들이 원하는 역할을 떠맡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랬다면 단숨에 유대땅을 뒤집어 놓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거는 높은 기대를 알면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에 따라 “너희는 주의 길을 곧게 닦아라”고 외치는 것이 그가 받은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는 길을 닦기 위해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삶의 목표는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는 것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모습대로 살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는 것, 그것 뿐이었습니다.

3.

“당신은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세례 요한의 대답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충격적입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의 태도와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단히 무엇인가가 되기를 꿈꿉니다. 현재의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은 별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뭔가를 손에 넣어서 더 큰 무엇, 더 유명한 무엇, 더 중요한 무엇이 되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그것을 이루는 것을 우리는 ‘성공’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실패’라고 부릅니다. 이같은 시도에서 번번히 실패한 사람들은 자포자기한 채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단정하고 살아갑니다. 반면, 이같은 시도에서 한 두 번 성공을 하면 마음이 부플어 오릅니다. 뭔가 된 것 같고, 뭔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노력들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자신이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에 과민반응을 보입니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으면 속에서 불이 납니다. 자신을 알아준다 싶으면 우쭐해집니다. 판단이 흐려질수록, 사실과 관계 없는 칭찬에 솔깃해지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함의 앞 뒤에 가득 자신의 이력과 직함을 적어 가지고 다닙니다. 자신의 이력을 소개하면서도 어떻게든 부풀리려고 머리를 씁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연예인들이 학력을 속였다 하여 문제된 적이 있습니다. 대학 교수들이 학위를 속이거나 부풀리는 일도 자주 일어납니다. 이 모든 잡음이 왜 생깁니까? 자신을 자신보다 크게 보이고 싶어하는 욕망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을 참아주지 못합니다.

이러한 우리네 사정을 생각해 보면, 세례 요한의 태도는 참으로 충격적입니다. 그 스스로 메시야라고, 혹은 엘리야라고, 혹은 그 예언자라고 나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요한이 살았던 시대에 스스로 메시야를 자처하며 사람들을 몰고 다닌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요한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혹시 당신이 메시야가 아니냐?’고 물어왔습니다. 그냥 모른 척하고 있으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랬다면 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올라갈 것입니다. 단 시간 안에 명성을 얻고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아무 망설임 없이, 한 순간의 지체도 없이, 나는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을 높이 칭찬합니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마 11:9)라고도 하셨고,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11절)라고도 하셨습니다. “요한, 바로 그 사람이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이다”(14절)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요한은 “당신이 엘리아요?”라는 물음에 대해 “아니오”라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엘리야의 역할을 했다고 말씀했습니다. 요한이 스스로 재림 엘리야로 자처하지 않고 ‘광야에 외치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믿고 그렇게 살았기에 나중에 예수님으로부터 이같은 높은 칭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태도를 보면서, ‘와, 진짜다!’라는 느낌을 받는 것은 저 혼자만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소개하는 요한이 어마어마하게 커 보이지 않습니까? 또한 그의 태도에서 무한한 자유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누구도 그를 유혹하여 흔들 수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한 태도를 가진다면, 세상 살이에서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오지 않습니까? 뭔가, 흔들 수 없는 무게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4.

요한처럼 살면 좋겠습니다. 나 아닌 다른 뭔가가 되려고 발버둥 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 두리번 거리며 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매기는 값에 놀아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뭔가가 되어 보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고, 그 나로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것에 대해 만족하고, 그렇게 사는 것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 나의 노력이 나를 뭔가 되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것도 아니라, 나이기 때문에 저절로 하게 되는 것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지어 놓으셨습니다. 현재 지구 상에 살고 있는 60억 인구 중에 오직 한 사람, 지난 세대에 살다 간 수 없는 사람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인류 가운데서도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오직 한 사람, 그 나를 지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지으신대로의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 나로서 인생을 살도록 디자인하셨습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하고 자유롭고 복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 때,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십니다.
안토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의 우화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한 여자가 중병에 걸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방황하고 있을 때, 한 음성이 들립니다.

“너는 누구냐?”
“예, 저는 쿠퍼 부인입니다. 제가 사는 도시 시장의 아내지요.”
“네 남편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제니와 피터의 엄마입니다.”
목소리는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묻습니다.
“네가 누구의 엄마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교사입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너의 직업이 무어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매일 교회에 다녔고, 남편을 잘 내조했고,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목소리가 다시 말합니다.
“나는 네가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를 물었다.”
결국 여자는 다시 이 세상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병이 나은 다음 그녀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참되게 아는 것은 나의 삶을 매우 달라지게 만듭니다. 진실로 만족스럽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으로 변화됩니다. 물질적으로는 덜 누리게 될 지 모릅니다. 세상적으로 성취하는 것이 적을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목받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위해 살면서 늘 불만족스럽게, 부자유하게 그리고 불행한 삶을 사는 것보다 나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사실, 그것은 세례 요한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무엇인가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한 그런 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나 답게 사는 일에 충실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짧게 보면, 뭔가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잘 나가는 것 같아 보였지만, 나중에 보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나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다른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나 아닌 뭔가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혹은 뭔가를 남기기 위해 분투한 사람들은 자신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불행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5.

내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아는 것이 이토록 중요하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나 자신을 제대로 알고 나답게 살 수 있을까요?

첫째, 그동안 나라고 알고 있던 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동시에 나를 규정해 주었던 모든 조건들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는 자라면서 우리의 환경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규정합니다. 누구나 무의식 중에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게 되어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우리는 주변  환경을 기준으로 대답하면서 나를 만들어갑니다. 혹은, 부모나 친구 혹은 교사가 한 말에 의해서 우리는 나를 규정합니다. 혹은, 외모나 두뇌의 명석함 혹은 재능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규정합니다. 그런 조건들이 잘 갖추어져 있으면 긍정적인 자아상이 만들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부정적인 자아상이 만들어집니다.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려면, 먼저 이렇게 만들어진 자아상을 부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아상을 만드는 데 기준이 되었던 것들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가정 형편이든, 외모든, 두뇌든, 혹은 능력이든, 그것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게 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보다 더 큰 거울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보다 작은 거울, 작아도 너무 작은 거울로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나 자신을 규정해 왔습니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실은 내가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 안에 머물러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나를 새롭게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더 큰 거울 앞에 서야만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더 큰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마주해야 합니다. 한 번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리고 매일같이 그분 앞에 나를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동안 나라고 생각했던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물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그동안 나를 규정하는 데 사용했던 모든 기준을 내려 놓고 하나님 앞에 벌고벗은 채 서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추측컨대, 세례 요한은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의고 광야에서 수도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맡겨져 자랐을 것입니다. 누가는 세례 요한에 대해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아기는 자라서, 심령이 굳세어졌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는 날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눅 1:80).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이미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어릴 적부터 경건하게 자라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헛된 꿈도 꾸지 않았고, 헛된 일로 인생을 허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어 그의 마음을 흔들 때,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님이 지으신 그대로 살아가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 그것만이 관심사였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우리는 더욱 자주, 더욱 깊이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적어도 30분 이상, 하나님 앞에 앉아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 시간을 나의 간구로만 채우지 말고, 하나님이라는 그 맑은 거울로 나를 비추어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 시간의 성소를 훼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점점 더 분명하게 볼 것이며, 다른 누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혹은 내가 꾼 헛된 꿈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진짜 나로서 살아가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을 키우는 분들은 명심하기 바랍니다. 자녀들에게 헛된 꿈을 심으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지 못한 인생을 자녀들을 통해서 살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루지 못한 꿈을 자녀를 통해 이루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이 헛된 것에 마음이 팔려 헛된 꿈을 꾸지나 않는지, 살펴 보십시다. 우리의 관심과 노력은 오직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도록 돕는 데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다 됩니다. 그것이 가장 행복한 선택입니다. 부모의 책임은 자녀들이 참 부모인 하나님을 만나도록 돕는 것에 있습니다.

6.

새 해 벽두에 서 있는 우리 모두는 올 한 해 동안 우리의 삶에서 성공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소망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성공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그 나로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성공입니다.

이 성공이 우선 저와 여러분에게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올 한 해,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그분과 깊이 사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 안에서 자신을 더욱 새롭게 발견하여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나 답게 되고 나 답게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나 답게 살아감으로써만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기쁨을 마음 가득 누리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 안에서 진정으로 성공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공부 잘 해서 성공이 아니라, 혹은 좋은 직장에 가서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성공을 이루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참된 하나님을 만나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새롭게 찾아 살아가도록 이웃에게 전도하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이 세상의 아귀 다툼이 줄어들 것이고, 하늘의 평화가 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동안 저희 답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동안 헛된 것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성공하겠다고 몸부림쳤지만
실패가 뻔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저희를 붙드소서.
더 자주, 더 깊이
주님 앞에 머물러 앉게 하소서. 
세례 요한처럼,
주님 안에서 저희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나답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2011년 1월 9일 설교
‘강림절과 주현절을 위한 연속설교: 내 곁에 온 하늘(7)
“나 답게 되기”(To Be Myself)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518장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요한복음 1:19-28을 다시 읽습니다. 유대인들과 세례 요한의 대화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한 가지씩만 나누어 보십시오.
2) 당신의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꿈을 생각할 때, 지금의 감정이 어떻습니까?
3)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당신 자신에 대해 달리 생각하게 된 것이 있습니까? 당신의 꿈이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4) 나답게 되고 나답게 살기 위해 새 해에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5. 중보기도

1) 매일 주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2) 자녀들이 진정한 부모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관계 안에서 자신의 참 모습을 찾도록 기도하십시오.
6.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507장
7. 광고 후 주기도문을 드림으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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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3 요한복음 텐트 속에 계신 하나님(God Who Abides In A Tent) 요1:14  김영봉 목사  2013-01-24 1898
8192 요한복음 하나님의 세상에 눈 뜨다(Opened to See God’s World) 요1:1-5  김영봉 목사  2013-01-24 2578
8191 요한복음 영원에서 온 메시지(A Message from Eternity) 요1:1-5  김영봉 목사  2013-01-24 4780
8190 마가복음 지금은 주의 인도를 받아야 할 때입니다 막2:1-11  이동원 목사  2013-01-24 2493
8189 예레미야 마중물이 되자 렘15:1-14  최장환 목사  2013-01-23 5912
8188 이사야 소망을 갖는 자 사26:1-15  최장환 목사  2013-01-23 5284
8187 고린도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 고후9:1-15  최장환 목사  2013-01-23 4111
8186 히브리서 함께하시는 주님 히9:1-14  최장환 목사  2013-01-23 3961
8185 출애굽기 기적과 술법 출7:20-25  이성희 목사  2013-01-22 3798
8184 출애굽기 물이 피가 되리라 출7:14-19  이성희 목사  2013-01-22 4110
8183 출애굽기 지팡이를 삼킨 지팡이 출7:8-13  이성희 목사  2013-01-22 3563
8182 출애굽기 손을 펴신 하나님 출7:5-7  이성희 목사  2013-01-22 4650
8181 출애굽기 순종을 가로막는 것들 출7:1~7  박봉수 목사  2013-01-22 3603
8180 출애굽기 대언자 아론 출7:1-4  이성희 목사  2013-01-22 1753
8179 출애굽기 인생의 자기 운영 출7:5~7  이정익 목사  2013-01-22 1843
8178 출애굽기 아론에게 배운다 출7:1-7  박흥규 목사  2013-01-22 1474
8177 출애굽기 강퍅한 마음을 향한 경고 출7:1-6  피영민 목사  2013-01-22 1891
8176 출애굽기 그대로 행하였더라 출7:1-7  윤대영 목사  2013-01-22 1492
8175 출애굽기 주일을 거룩히 지키자. [1] 출6:13-31  임덕순 목사  2013-01-21 2025
8174 출애굽기 바람직한 교회 출6:1-8  서정호 목사  2013-01-21 1848
8173 출애굽기 언약의 하나님 출6:2-27  성홍모 목사  2013-01-21 3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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