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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룻3: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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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룻의 희생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관심은 과연 무엇으로 드러날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 하나님이 여러분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줄로 압니다.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주고 인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전에 알아야 하는 것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과연 어떤 일로 나타나느냐는 것입니다. 이 물음에 대해 답을 모르고 있거나 엉뚱한 답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오해와 착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백성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라면 과연 자기 백성에게 어떤 일을 행하실까?'라고 물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야 물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괴로움을 없애주고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복 주시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에 대한 자기의 관심을 하나님에게 기대하는 것일 뿐입니다. 즉 자신에 대한 자기의 관심대로 이루어질 때 그것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행하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이 과연 그런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망에 처한 세상 속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그들을 사망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오직 자기 백성을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구출되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와 상관이 없는 완벽한 인간으로 변모되었다면 아마 그리스도로 인해서 구원된 후의 신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지키심이나 인도하심이 필요없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으로부터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구원된 신자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죄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자가 된 것이 아니라면 그는 마지막 때까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함 아래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독생자 아들의 피를 값주고 사신 자기 백성을 영원히 구원에 머물게 하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열심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어지는 것이며 그 열심은 신자를 날마다 진리요 길이요 생명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붙들어 놓으시기 위한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속에서 하나님의 열심을 볼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이것이 신자에게는 무한한 위로가 되며 힘이 되고 소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룻기서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의 관심을 발견한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자기의 풍족함을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언약에서 끊어진 것을 뜻합니다. 흉년속에서 자기 풍족함을 얻기 위해서라면 언약의 백성에서 끊어지는 것 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을 다시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기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풍족함을 위해서 언약의 백성됨을 포기한 이들을 어떻게 돌아오게 할 수 있습니까? 말로 설득한다고 되어지겠습니까? 풍족함을 위한 인간의 욕망은 참으로 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목사의 말 몇마디가 들어 먹히겠습니까? 이미 그 마음과 생각이 풍족함에 머물러 있는데, 그 마음과 생각이 영생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아니라 풍족함으로 가득차 있는데 말 몇마디 한다고 해서 자신의 마음과 생각에서 풍족함을 몰아내고 그리스도로 채워진 마음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비우게 하기 위해서 때때로 세상에서 실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실패하게 해서라도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자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열심이며 관심인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은 자신의 실패에서 바로 이것을 배운 것입니다. 자신을 실패하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관심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오미에게는 언약의 땅으로 돌아온 자가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적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인도하시고 결국 돌아오게 하신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다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끊어진 기업입니다. 약속의 땅은 기업을 이어가는 땅입니다. 그런데 기업에서 끊어졌다는 것은 약속의 땅의 의미를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나오미는 이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기업에서 끊어진다는 것 자체가 실패임을 알았기에 나오미의 모든 행동은 잃어버린 기업에 참여하기 위한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열심이 자기 백성을 지키고 인도하신다고 해서 그의 백성된 자들은 가만히 놀고 먹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무엇인가를 알았다면 자연히 신자의 열심 또한 하나님의 열심이 지향하는 바를 쫓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신자의 열심은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행동하는 부지런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보다는 하나님이 관심두고 계시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을 동일하게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의 열심이 나를 지키고 있고 인도하니까 나는 내 마음대로 살아도 구원에는 걱정이 없다는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열심을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도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그를 실패하게 하시고 밑바닥까지 떨어뜨려서라도 하나님의 뜻에 굴복한 자로 만드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며 사랑이며 관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에게 붙들려 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은 룻기서 3장 전체의 내용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3장은 어떤 내용입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룻이 보아스와 동침을 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동침이란 곧 결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룻이 보아스와 동침을 하게 되는 것이 남자 쪽에서, 즉 보아스쪽에서 룻에게 결혼을 해달라고 프로포즈를 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룻이 프로포즈를 한 것도 아닙니다. 모든 일은 나오미가 꾸몄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며느리 재혼시키기 작전'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나오미에게는 단순히 홀로된 며느리를 재혼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대한민국이란 국가에서 나름대로 민족적인 정서를 가지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나오미가 며느리 룻을 보아스에게 보내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러한 나오미의 방법이 과연 이해가 되십니까?
사실 우리들의 정서로서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재혼시키는 것은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본문의 방법까지 동원해서 보아스에게 보낸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몸을 단장하고 보아스 몰래 숨어 있다가 보아스가 자리에 누울 때 들어가서 발치 이불을 들고 누우라는 것은 여자로서는 참으로 수치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창녀와 같은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나오미의 이런 행위나 또 그런 행위에 순순히 응하는 룻이나 이들 모두가 우리들의 정서는 물론이고 윤리나 도적적인 면에서도 인정할 만한 행동은 분명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하는 것은 성경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나 윤리 도덕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윤리나 도덕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윤리 도덕 역시 그 민족의 정서를 기준으로 해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서가 변하면 윤리 도덕도 변하게 됩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가령 옛날 조선시대에는 남편을 잃은 과부는 수절을 하는 것이 윤리요 도덕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수절을 한다고 해서 위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리석은 것으로 평가되기 쉬운 시대입니다. 또 아프리카의 어느 종족은 귀한 손님이 오면 자신의 아내와 그 손님을 동침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귀한 손님에 대한 대접이라는 것입니다. 그 종족은 그러한 것이 그들의 윤리며 도덕입니다.
이처럼 민족과 정서에 따라 다르고 변하는 윤리와 도덕을 기준으로 해서 본문을 본다면 본문에 대한 해석은 시대가 변하고 정서가 변하고 윤리와 도덕이 다른 나라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옳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시형제 결혼법은 우리나라의 정서와 우리의 도덕과 윤리로 본다면 정당한 것입니까? 절대로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형제 결혼법은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중요한 제도였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정서나 윤리를 가지고 어떻게 해석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들의 정서를 가지고 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윤리를 가지고 해석해서도 안됩니다. 만약 우리 윤리를 가지고 해석한다면 윤리와 도덕에 합당한 행위에 대해서는 '본받자'라고 할 것이고, 합당하지 않는 행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거나 '이렇게 하지 말자'라는 교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하나님의 마음에서 보지 않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마치 창세기에 나오는 다말의 이야기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다말이 누구입니까? 약속의 가문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창녀로 변장하고 시아버지와 동침한 여자가 아닙니까? 만약 이것이 시아버지를 사모한 인간의 사랑에서 나온 행위라면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말의 행위는 약속의 가문을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다말은 유다가 아들을 다말에게 주지 않으려는 것 때문에 스스로 창녀로 변장해서 유다와 동침하여 가문을 이어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약속의 가문이 이어져야 한다는 다말의 관심이 다말로 하여금 창녀로 전락하게 하는 열심을 갖게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다의 가문은 다말의 희생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끊어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룻의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다말의 이야기를 꺼냈지만, 사실 다말이 추구했던 것이나 본문에서 나오미와 룻이 추구한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말의 희생이 유다 가문을 살린 것처럼, 본문에서 룻이 창녀의 수준으로 전락하는 희생이 있음으로 해서 엘리멜렉의 기업이 이어짐으로서 사망한자에게까지 은혜가 베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말과 룻은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이야기를 우리의 윤리 도덕에 맞추어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은 극히 자명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정서나 윤리 도덕을 초월해서 과연 무엇을 말해주고 있겠습니까? 먼저 본문을 보면 룻이 보아스와 동침을 하게 된 것은 룻의 스스로 자원한 것이 아니라 나오미의 의도에 룻이 순종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5-6절을 보면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모의 명대로 다 하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일을 나오미가 계획한 것이고 룻은 나오미의 계획을 따른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룻기서를 볼 때 믿음의 주체자로 등장하는 사람이 룻입니까 아니면 나오미입니까? 룻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나오미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룻의 믿음은 1:16절에서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다만 볼 수 있는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순종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 왔을 때도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는 말로서 보아스를 기업 무를 자로 보면서 생존한 자만이 아니라 사망한 자에게도 베풀어지는 은혜까지 바라보는 믿음을 보여준 사람은 룻이 아니라 나오미입니다.
또 분문에서 룻을 보아스에게 보내는 것도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였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음을 본다면 이 역시 기업을 바라보고 있는 나오미의 믿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룻기서에서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주체는 나오미라고 말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나오미서라고 말하지 않고 룻기서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전에 말씀드린 대로 4장에서 보아스가 룻에게서 아들을 낳았을 때 여인들은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라고 하고,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족보에는 룻에게서 낳은 것으로 말합니까? 나오미가 낳았다는 말의 의미와 룻에게서 낳았다는 말의 의미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룻기서는 이런 여러 가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합니다.
1절에 보면 "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나오미가 룻에게 말합니다. 안식할 것을 구하여 룻을 복되게 한다는 것은 남편 없는 룻에게 남편을 구해줘서 남편을 의지하고 평안히 살게 해주겠다는 인간적 복지차원에서 말하는 안식이 아닙니다.
나오미가 보고 있는 것은 기업이 끊어진 자신의 형편입니다. 기업이 끊어진 형편에서는 자신은 물론이고 룻 역시 안식을 얻을 수 없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룻을 기업 무를 자에게 보냄으로서 룻은 물론이고 자신의 안식을 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룻은 나오미의 말대로 행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주체가 나오미로 등장하는 내용인 룻기서가 룻기서로 불려지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애당초 남편을 잃어버린 룻이 나오미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면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편안한 삶을 택하기보다는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릅니다. 여기에서부터 룻은 희생하는 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룻이 나오미를 따르지 않았다면 나오미에게 있어서 기업을 이어갈 소망 역시 끊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오미에게 룻이라는 이방여인을 희생하는 자로 개입시킵니다. 그리고 룻의 희생으로 나오미가 살고 사망한 자에게까지 은혜가 베풀어지는 것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마치 창녀와 같은 수준으로 행동하라고 하는 수치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룻의 희생입니다. 그러므로 룻기서에서 룻이 중심적인 주체가 되는 것은 룻의 희생으로 인해서 나오미가 살고 그 가문이 살기 때문입니다. 즉 이미 하나님의 언약에서 끊어져 있는 엘리멜렉의 가문이 룻이라는 이방여인의 희생으로 인해서 다시 하나님의 언약에 흡수되는 놀라운 은혜가 베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여인의 희생으로 인해서 한 가문이 하나님의 은혜에 흡수되는 이 놀라운 기적을 룻기서가 말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은 오늘날 모든 수치와 멸시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언약에서 끊어져 있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흡수되어 안식을 누리게 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족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그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우리야의 아내를 제외하고는 4명의 여인이 등장을 합니다. 남자로서 이어가야 할 족보에 여자가 등장한다는 것은 그 여인들이 빠지면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질 위기가 닥칠 정도로 신앙이 엉망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여인들을 개입시킴으로서 생명을 이어가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여인들이 보여주는 것은 희생이었던 것입니다. 수치를 감당한 희생, 이 희생을 정신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이어짐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서 끊어져 있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포함된 자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룻기서에서는 룻이란 여인의 희생을 볼 수 있고, 그 희생으로 한 가문의 기업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게 된 것처럼, 오늘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자가 생명에서 다시 산자로 살아가게 된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보아스가 룻에게서 나은 아들은 여인들은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룻의 희생으로 인한 그 열매의 영광을 나오미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10-11절에 보면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내 딸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고 말합니다.
보아스가 자리에 눕자 룻은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에 눕습니다. 보아스가 놀라 일어나서 '너는 누구냐?'라고 묻자 룻은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고 대답합니다. 이러한 룻에게 보아스는 현숙한 여인이라는 말로 칭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들의 기준으로 보면 룻은 절대로 현숙한 여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현숙한 여인이란 얌전하고 정절을 지키며 살림을 잘하는 그런 여자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외간 남자가 자고 있는 이불을 들추고 몰래 눕는다는 것은 현숙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면 보아스는 룻의 무엇을 보고 현숙하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룻이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않았다는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라면 젊은 남자를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룻이 늙은 보아스를 좇았다는 것은 룻이 오직 하나님의 기업을 되찾는 것에만 마음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이 마음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에 포함된 자로 존재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바로 현숙한 마음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바로 자신이 수치스러워진다고 할지라도 시어머니의 가문을 하나님의 기업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의도로 보아스에게 다가가는 룻의 희생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룻의 희생으로 인해서 엘리멜렉의 가문이 하나님의 기업에서 끊어지지 않고 다시 살게 된 것처럼 오늘 우리 역시 수치스러움을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부터 끊어지지 않고 생명에 거하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서 보여져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새롭게 태어난 존재라면 그리스도의 그 희생의 흔적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자의 열심은 이것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자이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소중히 여기며 희생하는 삶을 소원하며 모이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현숙한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관심을 두며 나의 생명이 어떻게 주어졌는가를 묵상하며 그리스도의 희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현숙한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의 열심은 분명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위한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뜻대로 살려고 궁리하는 자기백성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현숙한 신자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간섭하시고 일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이 있다는 것, 참으로 감사할 일이며 우리에게는 위로와 힘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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