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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암8: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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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심판의 이유
본문>
주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보이셨느니라 보라 여름 과일 한 광주리이니라 그가 말씀하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이르되 여름 과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그 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곳곳에 시체가 많아서 사람이 잠잠히 그 시체들을 내어버리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두고 맹세하시되 내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절대로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이로 말미암아 땅이 떨지 않겠으며 그 가운데 모든 주민이 애통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강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 같이 뛰놀다가 낮아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게 하며 모든 사람에게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가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애통하듯 하게 하며 결국은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암 8:1-10)
<설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워서 심판을 선포하시는 것은 심판을 대비하라는 취지가 아니라 심판이 주어질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의 참된 실상을 보고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심판은 인간이 대비하여 막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심판을 대비할 수 없는 것은 아무도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스스로 흠 없는 깨끗한 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행위에 대한 것이라면 착한 행위를 함으로써 심판을 대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착한 일을 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은 인간의 본질을 가지고 평가하십니다. 그것이 곧 거룩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피조물로써 창조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고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악하고 더러운 것입니다. 이 더러움을 우리의 어떤 행위로도 덮을 수가 없습니다. 가장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수준 높은 행위를 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의 악함과 더러움을 덮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심판에 이를 존재일 뿐입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4번째 환상을 봅니다. 이 환상도 7장에 등장한 세 가지 환상과 동일하게 이스라엘의 심판을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모스에게 여름과일 한 광주리를 보여주십니다. 여름과일은 여름에 맺어서 가을에 수확하는 과일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모스가 본 과일은 거의 익어서 곧 추수를 해야 하는 상태였습니다.
이처럼 과일을 보여주시고 “그가 말씀하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이르되 여름 과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그 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곳곳에 시체가 많아서 사람이 잠잠히 그 시체들을 내어버리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3절)고 말씀합니다.
여름과일을 보여주신 이유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마치 거의 익어서 추수를 기다리는 여름과일 같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아주 긴장되고 긴박한 처지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지자의 경고를 무시한 채 여전히 자기 멋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끝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당장 눈에 비친 현재가 전부인 것처럼 살아갈 뿐입니다. 이들에게 죄와 심판에 대한 경고는 현실과 거리가 먼 듣기 싫은 말에 자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예언하는 선지를 몰아내려고 하고 예언하지 말라며 그 말을 막으려는 반응만 보인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현재도 사람들은 눈에 보인 것만 현실로 인정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가봐야 한다고 하면서 믿지를 않습니다. 비록 천국을 믿는다고 해도 사실은 천국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의 세계까지 보장 받기 위한 탐욕일 뿐입니다. 그 증거는 천국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천국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세상에 대해 재평가를 하게 합니다. 예전에는 인생의 전부였던 세상이 천국을 믿게 된 후로는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된 것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것을 힘으로 의지했던 어리석음을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천국을 믿는 신자라면 더 이상 세상의 것을 소유해서 힘 있는 자로 존재하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때로 그런 유혹이 있다면,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감지하면서 회개하게 됩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는 천국을 믿는 것도 소망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4절을 보면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이 구절에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가난한 자를 삼키고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는 강포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어디를 가도 부자가 있으면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도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이방 나라와는 다른 특별한 제도가 있습니다. 그것이 희년입니다. 희년은 5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절기인데 희년이 되면 부자들은 종들을 모두 해방시켜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샀던 땅도 원 주인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한마디로 희년은 누구는 소유가 많아지고 누구는 적어졌던 것을 원래의 상태, 즉 공평한 상태로 되돌려 버립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뺏어서 자기 소유로 삼은 것도 희년이 되면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희년의 제도 안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없습니다. 설령 부자가 있고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해도 자신의 소유가 아닙니다. 50년이 되면 내어 놓아야 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희년의 때까지 잠시 자신의 수중에 두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희년의 제도를 잘 지켰다면 이스라엘 안에 가난한 자, 부자는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희년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천국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십니다. 천국은 내 것이 없는 나라고 소유로 인한 차별과 무시가 없는 나라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희년을 잊지 않는다면 지금 자신의 수중에 있는 것의 주인이 자신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른 사람에게 이동해야 하는 것임을 안다면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말씀에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희년 안에서는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희년이 되면 다시 공평한 자리로 되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희년의 정신으로 살았다면 설자 부자라고 해도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희년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수중에 있는 것을 자기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희년을 지킬 수가 없었고, 그 증거는 가난한 자를 삼키고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 되어 자기 멋대로 살았다는 것을 증거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제사를 행하고 제물을 바치면서 신앙으로 제대로 산다고 착각을 한 것입니다.
현대 교회도 이러한 착각에 빠져 삽니다. 그런데도 선교를 행하고 구제 사업을 하고 열심히 예배드린다는 명목으로 신앙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나를 책임져주시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의 명목으로 세상의 복을 구하면서도 그것을 악으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참된 신앙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5,6절을 보면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월삭은 매달 첫날인데 월삭이 되면 안식일처럼 모든 일을 쉬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안식일 규례로 인해서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 곡식을 팔아서 돈을 버는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쉬면서도 그 날이 빨리 지나기를 원한 것입니다. 빨리 월삭이 지나면 장사해서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음은 돈을 버는 일에 향하여 있으면서 제사하고 제물을 바친다고 해서 그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단지 율법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한 것일 뿐입니다.
이처럼 돈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저울도 속이는 것이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적은 돈으로 종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지 않고 세상에 마음을 두고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심판의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끝에 대해서 전혀 예상치를 못합니다. 선지자가 경고를 해도 자신들의 끝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자신들이야 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써 구원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두었다면 말씀에서 떠나있는 거룩하지 못한 자신들을 보게 되었을 것이고 심판은 당연한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이야 말로 구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원수였음을 알게 되고 회개하는 자로 하나님을 찾고 불렀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이스라엘을 원하지 않습니다. 완벽하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완벽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신자는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악함을 용서하신 예수님을 믿는 기쁨으로 삽니다. 이 믿음이 신자를 평생 복된 자로 살아가게 할 것이고, 세상의 것이 아닌 예수님으로 감사하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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