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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세계평화를 위하여

창세기 이필재 목사............... 조회 수 1753 추천 수 0 2013.01.29 23: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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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27-28 
설교자 : 이필재 목사 
참고 : 갈보리 교회 

21세기 세계평화를 위하여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 리라 하시니라 (창1:27-28)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전쟁의 세기였다고 역사가들은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전쟁과 살인을 통해서 인류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본래 전쟁은 승자가 없다고들 말합니다. 패자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일본 침략의 피해와 6․25로 인한 처참한 비극을 20세기에 모두 겪었습니다. 1800년대 후반에 스웨덴의 발명가 노벨에 의해서 발명된 이 다이너마이트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20세기 100년 동안 인간은 무수하게 죽었고 산업시설의 절대적 파괴를 가져왔습니다. 전쟁의 목적이 본래 처음에 영토 확장이었었는데 20세기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전쟁을 치르게 되었고 더 심각한 이유를 밝히면 종교적 이유가 많은 전쟁을 가져왔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지나간 2000년 역사에서 또는 20세기 이 100년의 역사에서 인류는 이제 충분한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성숙한 인류는 이제 21세기에 할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지구촌의 평화의 정착이라고 그렇게 우리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20세기보다도 21세기는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그런 어려움이 우리 주변에서 지금 행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전 세계 그렇게 많은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만이 분단국가라고 하는 것도 민족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매우 괴로운 일 중에 하나라고 봅니다.

독일 태생의 펄틸이라고 하는 신학자는 현대 신학자로서 많은 목회자들에게 존경을 받고 그의 학문과 그의 철학과 그의 신학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 그런 사람입니다. 세계적 신학에 공헌을 한 사람입니다. 그가 1960년대 중반에 죽으면서 앞으로 “이 세계는 이렇게 될 것이다” 라고 예언한 것이 있는데 그런 것 같습니다. 그는 처음에 목사가 되어서 군목으로 1차 대전을 경험하게 됐는데 그 전쟁터에서 죽어 가는 한 영혼, 한 영혼을 구원하려던 노력의 과정에서 그가 아주 마음 속 깊이 깨달은 큰 충격이 있었습니다. ‘전쟁은 마귀의 역사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 마귀의 역사를 저지하기 위해서 또 다른 전쟁을 해야되는 모순이 우리 인류 사회에 있는데 전쟁으로 인한 이 대량 학살과 무자비한 파괴 인간의 최대의 ‘적’은 전쟁이라고 그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우리 인류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이 지구상에서 이 전쟁을 없애는 것이다. 인간과 문명을 파괴하는 것을 막는 그것이 또 나의 의무이며, 내가 평생을 통해서 할 일이 있다면 이것이다’ 라고 믿으면서 평화를 위해서 노력한 그런 신학자가 됩니다.

 

그는 현대 사회의 네 가지 특징을 말했습니다. 그의 역사관인데 하나는 “현대는 불안과 공포의 시대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어떻게 뒤바뀔지 모르는 그 불안이 어디에나 팽배하여 있는 것이 오늘의 세계입니다. 20세기에 인간이 인간의 힘을 자랑할 수 있는 최대의 업적을 만들어 놨습니다. 그런데 그 자랑할 만한 힘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적 파괴력입니다. 지금도 일본에는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이 가끔 무엇을 말합니다. 원자폭탄 떨어진 그 피해가 50년이 넘도록 지워지지 아니하는 흔적이 되어 있다는데 지금은 히로시마에 떨어뜨렸던 원자폭탄의 5000배가 넘는 성능을 지닌 폭탄들이 온 세계를 다 깨뜨릴 준비를 이미 끝냈습니다. 그것들을 다 사용한다면 지구를 열 번 망가뜨리고도 남는 정도의 물리적인 큰 힘을 우리 인류들이 인류의 손으로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느 날 독재국가의 한 지도자가 부부싸움을 했던지, 기분 나쁜 일이 있든지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이 지구의 운명은 매우 위험스럽도록 그렇게 현재 되어 있어서 “이 시대는 불안과 공포의 시대다!” “내일 아침에 세상이 어떻게 뒤집혀질지 모르는 그런 시대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불확실의 시대라고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세상이 점점 좋아지는 세상이 될는지 점점 나빠지는 세상이 될는지 방향을 잡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아주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과학의 기구들을 통해서 세상이 아주 편리해 졌습니다. 그러나 편리는 오고 행복은 멀어져 가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옛날에 우리들이 ‘double a seven’ 이라고 하는 007 영화를 본지가 뭐, 몇 년 되었습니까? 그거 보면서 그렇게 신기하게 우리가 봤는데 지금은 007 그 영화 주인공의 주연 배우보다도 더 훌륭한 기구들을 우리들이 누구든지 가지고 있습니다. 또, 과학의 기구를 통해서 일 처리는 매우 쉬워졌으나 시간은 점점 더 바빠지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실 경제가 성장하고 과학이 발달하면 인간이 좀더 삶이 풍성해 지고 여유가 있어져야 되는데 뭐, 좋은 것들도 많이 남았는데 점점 더 바쁩니다. 그런거 없던 시대에도 아주 편안하게 행복하게 잘 살았지 않습니까? 미국과 일본이 세계에서 경제 성장, 과학 발전이 제일 앞서가는 나라인데 국민들은 어찌나 바쁜지 너무나 바쁘게 살아갑니다. 조금도 틈이 없는 그래서 그런 나라 사람들은 아들, 딸들이 더 걱정됩니다. ‘우리보다도 더 아이들이 훨씬 더 일을 많이 해야 이 사회에서 존재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에 우리 엄마들은 아이들 10명까지도 낳아서 훌륭하게 잘 키웠는데 과학의 도구도 힘을 입지 아니하고 이렇게 편리한 모든 문화적 시설도 없는 그런 시대에도 그래도 행복하게 살았는데 요즘은 두 명 이상은 절대로 안 되는 그런 사회가 되었고 이제는 single life를 즐기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아이 낳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지 않습니까? 잘 가고 있는 것인지, 잘 못가고 있는 것인지 불확실의 시대입니다. “이게 과연 세상이 좋아지려고 하느냐, 나빠지려고 그러느냐? 잘 모르겠다!” 그런 얘기입니다.

 

그 다음에는 매우 고독해 지는 시대라 그랬습니다. 사람은 점점 더 많아지는데 점점 멀어집니다. 우리는 벌써 오래 전에 이웃이라고 하는 그런 문화가 우리 주변에서 다 사라졌습니다. 두 발자국만 가면 되는 이웃 사람과 옆집 사람과도 10년이 지나도 말을 하지 않는 그런 시대인데, 더 무서워지는 것은 이제는 사람과 사람이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과 기계와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답변을 기계가 다 해주니까 거기에서 우리는 만족을 얻고 사람과 멀어지는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인터넷 box 하나라 가지면 온 세상의 정보를 다 얻을 수가 있고 거기서 나오는 재미를 얼마든지 볼 수가 있고 세상이 이제 사람이 필요가 없어요. 기계가 나한테 즐거움을 준다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 시대가 문화의 해체 시대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세계는 몇 가지 문화가 이미 통일되어 버렸습니다. 그 하나가 의상 문화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입고 계신 그런 옷은 세계 어디를 가도 똑같이 의상 문화가 서구화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음식 문화도 거의 비슷한 문화가 되어져 가고 있고 성문화는 후진국이 없습니다. 이런 문화들이 다 통일되어져 가는 “문화의 해체! 고유 문화의 해체 시대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이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총체적 변해 간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어느 한쪽에서 불행한 사건이 터지면 그 지역 사람만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한 지역에서 고통이 터지면 온 세계가 거기에 영향을 다 받도록 되었습니다. 그거 뭐 뉴욕에 건물 두 개가 부서진 게 뭐, 온 세계에 무슨 큰 영향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 건물 두 개가 부서진 다음에 온 세계가 경제적 마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미국에서 제가 살고있는 롱비치 항구에 데모몬하나라고 하엽 작업을 하지 아니하니까 대한민국에서도 수출해야 될 물건이 하나도 가지 못하고 어느 한 지역의 부분적인 고통은 세계로 확산되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시대가 바로 이 시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이제는 뭐든지 총체적으로 생각하지 아니하면 나도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해야 될 때입니다. 옛날에는 농경 사회의 불행이라고 하는 것이 태풍이 한번 불고 지나가면 곡식은 망가졌지만 땅 덩어리는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일년 후에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또, 산업 사회는 불경기가 지나면 또 회복경기로 바뀌어 집니다. 불경기 때문에 인간이 멸망하거나 인구가 줄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총체적 사건이라서 잘못하면 이제는 상상을 초월할 수 있는 불행의 블랙홀이 준비되어진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불확실하게 내일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이런 불확실하고 공포스러운 시대엔 누가 이 일을 위해 가는 길을 안내할 것이며 어느 민족이 인류 행복의 나라로 인류를 초대할 것인가? 우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용어 가운데 유토피아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토마스 모어가 이 말을 처음 쓸 때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그런 뜻으로 그 말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끝없이 유토피아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현대인간은 그 유토피아를 과학에서 찾으려는 것입니다. 이제는 인간이 인간을 만들어 냅니다. 복제인간은 벌써 여러 곳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인류는 과연 어떤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입니까? 이제 인류는 정신 없이 달려가다가 잠깐동안 가는 길을 멈추고 인간 자신을 돌아볼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인간의 문제만 정확하게 볼 수 있다면 21세기가 아니라 201세기가 와도 인간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과학이 어떻게 되었든, 세상이 어떻게 뒤집히든 상관없이 인간이 가야되는 길은 인간 자신을 상실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자리를 지키고 인간 때문에 가치를 지켜 나갈 때는 모든 것이 인간을 도와줄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인간을 행복의 세계로 인도할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그랬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볼 수 있을 때만 인간의 문제는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의 생명이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하다고 선포하신 주님의 인간 정의론을 인간들이 겸손하게 받아들인다면 21세기는 참으로 행복한 인류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 보시기에 그토록 심히 좋았던 세상이 지금도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을 수 있도록 바로 그 목표를 향해서 인류가 길을 닦는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 될 수가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 영혼의 준비가 없는 사람들이 새로운 지식만을 끝없이 추구할 때면 그 무서운 물리적 힘은 이 세상을 아주 순식간에 킬링필드(killing field)로 만들어서 망하게 되어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라든가 과학의 기구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기능을 발휘하고 신속한 일 처리를 해주는 것은 편리 면에서 매우 훌륭한 기계라고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나 이 컴퓨터가 성령의 일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컴퓨터가 인간을 위해서 기도해 주지도 아니합니다. 다만 그것은 인간이 명령하는 것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 있을 뿐이므로 컴퓨터를 움직이는 명령자의 인간 됨이 먼저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신 뜻은 인간으로 하여금 행복하게 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위대한 창조를 해냈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에게 행복을 주지 아니하고 불행을 준다고 한다면 그 길은 인간이 가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인간들은 종족이나 종교나 국경을 초월해서 총체적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 그런 세계가 바로 우리 인간이 살아야 할 21세기가 되는 것입니다.

 

21세기에 이 지구상에 세워진 교회들이 할 일이 있다고 나는 봅니다. 과연 그 길을 어떻게 현명하게 가느냐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기도의 제목이 됩니다. 다른 종교들은 2차적 문제로 하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함께 손을 잡고 평화의 길을 만들어 갈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21세기의 문화인데 지금 이 세계는 60억이라고 하는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 약 30억 되는 절반 정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구약에 있는 대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신학을 종교화했습니다. 그것을 유대교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라고 하는 이 유대인들에 세계 모든 인류에게 빨리 나눠주라고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국수주의(國粹主義)와 배타주의(排他主義)로 발전 시켜서 우리만이 구원의 백성이라는 질이 나쁜 종교로 만들었다는데 문제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그와 같은 율법주의가 악해지고 또 악해져서 도저히 이 지구상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인류에게 전달되지 아니할 때 하나님은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네가 가서 이 일을 이루라”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오신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구원의 진리는 유대 사회를 뛰어 넘어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인류를 총체적 공동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학이 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초로 해서 세워진 것이 이 기독교 아니겠습니까?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물려받은 구약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물려받은 복음을 가지고 이 땅에 교회를 세워서 인간 구원과 평화를 위해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에서 매우 불행한 사건들이 생겼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형제들끼리 서로 교리적 이유로 수없이, 끝없이 전쟁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십자군이라고 하는 말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역사에서 다 배웠습니다. 11세기말에서 13세기말까지 250년 이상을 끝없는 전쟁을 해온 그런 역사인데 이건 누가 했는가? 이슬람교도들과 기독교간의 문화 충돌이 아니겠습니까? 왜 이슬람과 기독교가 싸워야 되는가요? 지금 21세기의 가장 큰 문제는 지금 그겁니다.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문화 충돌을 어떻게 막아야 될 것인가? 지금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종교적 분쟁은 이슬람과 기독교의 충돌이고, 뉴욕에서 있었던 테러 사건의 분쟁도 바로 이것입니다. 앞으로는 십자군 전쟁의 10배도 더 되는 처참한 문화 충돌이 올 것이라는 것이 21세기를 보는 신학자들의 눈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슬람교도들과 이 기독교는 같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이 다릅니다. 우리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구원의 진리를 아주 분명히 그렇게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교리는 각자 가지고 있는 거기에다 맡기고 이 지상에 있는, 특별히 하나님을 함께 믿고 있는 사람들끼리는 문화 충돌을 하지 말아야 그것이 21세기의 평화의 기초가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슬람교도들을 믿어서 지옥을 가건, 아니면 그들이 말하는 낙원을 가건 그건 우리가 상관하지 말고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인류를 총체적 공동체로 보면서 어떻게 하면 평화를 이루어 갈 것인가 하는 것을 기독교인들이 먼저 생각하고 기도의 제목으로 삼을 때 거기에서 이 지상의 평화가 쌓이지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이슬람이 약 11억이 되고 유대교가 한 500만이 되고 기독교는 동방종교, 카톨릭, 개신교를 합해서 약 18억으로 보는데 30억 인구가 사실은 아브라함의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고백이 다른데 우리 기독교는 가장 큰 축복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그런 축복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이 축복권 안에 들어있는 우리 기독교도들은 다른 종교인이라든가 다른 사람들은 다 저주해 버리고 말아야 되는가? 바로 그러한 생각 때문에 지금 세계 도처에서 불필요하게 예배드리고 있는 현장에 폭탄이 터지면서 피 흘리고 피바다가 되는 그런 사건이 지금 끝없이 끝없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들이 어떻게 평화에 대여를 하느냐 하는 것이 숙제입니다.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절대 대화해서는 안된다는 견해가 있고 얼마든지 대화의 길이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저는 후자를 선택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 그 자체가 하나님을 버린 인간을 찾아 구원시키려 오셨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십자가의 희생을 아낌없이 지불하겠다고 나와 원수가 된 자들을 하나님을 버리고 이미 떠나서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있는 자들을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구원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어떤 마음의 품을 열어서 이슬람이라든가, 세상의 다른 종교인들을 찾아서 혹은 종교가 없는 사람들을 찾아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가장 큰 축복권 안에 들어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축복을 바로 대화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대로 나눠줘야 될 그런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대화가 되지 아니하는 부분은 22세기에 맡겨버리고 우리가 살아야 할 21세기에 대화가 되는 부분만 대화하면 최소한 종교전쟁은 세상에서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인도네시아 선교 때문에 인도네시아를 좀 많이 다녔습니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충돌은 살인 전쟁입니다. ‘어떻게 하면 저 놈들을 많이 죽여버릴까?’ 서로 그렇게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면 평화가 이루어지겠습니까? 이제 성숙한 하나님의 축복권 안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보되, 좀 넓게 보면서 이것이 다 우리가 구원해야 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생각을 하고 마음의 폭을 열어서 다른 종교인들과도 대화를 해야 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모든 종교가 똑같이 가고 있는 길이 하나가 있는데 선에 대한 추구입니다. 구원의 교리는 우리가 따지지 말고 그건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하나님이 특별히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서 그럼, 우리가 저주의 마음을 가져야 됩니까? 사회악의 추방 문제에 접해서는 어떤 종교도 같은 길을 가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쟁점이 되는 영혼 구원의 문제 같은 것은 말하지 말고 공동적 과제를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되는 것이 우리 21세기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야할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대화요 평화입니다. 이제 인류는 싸울 만큼 싸웠고 배울 만큼도 배웠습니다. 우리 인간 자체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고 성숙한 인간으로서 보여져야할 그런 때가 21세기라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저는 클린턴 대통령의 초대를 한번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약 200명의 초대받은 자들이 백악관에 모였는데 왜 오라고 그랬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온 세계에서 가장 큰 힘을 지니고 있는 미국의 대통령을 이렇게 오래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미국이 가지고 있는 물리적 힘을 크게 사용한다면 세계를 다 깨뜨리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이 힘을 가지고 평화가 안 이루어집니다. 이 힘이 세계 평화에 공헌할 수 없습니다. 전쟁을 해서 부분적 승리를 했다고 평화가 이루어지느냐? 아닙니다. 원수만 더 깊어졌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자신의 생각, 백악관 참모들의 생각으로는 전쟁의 깊은 뿌리는 종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종교인들간의 대화가 미국에서부터 시작이 되도록 해야합니다.” 그래서 가보니까 저 같은 목사가 와있고 카톨릭 신부님이 와 계시고 뭐, 주교들이 다 와 계시고 힌두교, 불교 할 것 없이 미국에 살고있는 각 종교의 지도자들이 거기 초대된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도와드릴테니까 이 미국 안에서 이 다양한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서 제도적 모임을 가지면서 우리가 가는 길은 사회악의 추방이다! 불교도 기독교도 카톨릭도 동방종교도 이 세상에 다 평화를 원하지 않느냐? 영혼 구원의 문제는 각 종교에게 맡기고 선에 대한 추구 하나만은 우리 함께 갑시다!” 거기에 제가 초대를 받은 적이 있어요.

 

B. C 330년에 20세에 왕이 된 알렉산더 대왕은 소아시아 일대 마게도냐, 이집트, 인도에 이르는 넓은 땅을 점령했습니다. 예루살렘도 그가 점령했습니다. 그가 가는 곳에는 오직 승리만이 기다리고 있었고 세계 역사를 바꿔가는 군대 행진만이 우렁차게 나타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승리를 더 이상 참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승리감이 최고의 절정 지점에 있을 때인 그의 나이 33세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의 나라 마게도냐는 지금 존재하지도 않고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후 300년이 지난 후에 갈릴리 시골 예수 청년께서 알렉산더가 승리의 깃발을 흔들고 지나가던 그 길을 똑같이 오늘 성경 말씀에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는 알렉산더가 탔던 군마가 아닌 그 사회 종들이 타고 다니는 나귀를 탔습니다. 팔과 창을 흔들던 알렉산더의 군대와 정 반대로 그를 환영하던 사람들은 평화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지금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외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즉, 주가 이렇게 여기 오신 것은 원수된 자들과 화목을 해서 평화를 선사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의 소시민적 행진은 마침내 지금 온 세상을 사랑으로 점령하고 있지 않습니까? 20세기에는 알렉산더의 후예들이 온 세상을 횡포와 장갑차로 점령하고자 피에 젖은 지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일본과 독일에 가서 종교 지도자들을 만났을 때 자기들의 가장 큰 고민은 ‘우리의 선배들이 어떻게 그렇게 이웃 나라들을 괴롭히고 사람을 많이 죽였나? 이 죄 값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될 21세기는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평화 행진하신 것처럼 인류 평화를 위해서 우리는 조용히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리면서 우리의 할 일을 소박하게 해 나갈 때 그리고 마음의 폭을 넓혀서 이 지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리로 우리가 구원해야 될 사람이라고, 그래서 사랑의 대화에 채널을 우리가 만들 때 그때 비로소 이 세계 평화는 작은 곳에서부터 이루어진다고 그렇게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한 21세기의 큰 사명을 우리가 바라보면서 이 해를 시작하고 또 이것이 개인의 평화와 삶이 될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필재 목사(갈보리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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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62 유다서 천사장의 변론 유1:9-10  신윤식 목사  2013-01-30 1745
8261 유다서 멸망의 모습 유1:5-8  신윤식 목사  2013-01-30 1542
8260 유다서 힘써 싸우라 유1:3-4  신윤식 목사  2013-01-30 1760
8259 유다서 부르심을 입은 자 유1:1-2  신윤식 목사  2013-01-30 1962
8258 요한삼서 진리의 증거 요삼1:11-15  신윤식 목사  2013-01-30 1669
8257 요한이서 디오드레베 요삼1:9-10  신윤식 목사  2013-01-30 1770
8256 요한삼서 가이오의 사랑 요삼1:3-8  신윤식 목사  2013-01-30 2199
8255 요한삼서 영혼이 잘됨같이 요삼1:1-2  신윤식 목사  2013-01-30 3336
8254 요한이서 성도의 교통 요이1:12-13  신윤식 목사  2013-01-30 1709
8253 요한이서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지지 않은자 요이1:9-11  신윤식 목사  2013-01-30 1679
8252 요한이서 미혹하는 자 요이1:7-8  신윤식 목사  2013-01-30 1711
8251 요한이서 장로의 기쁨 요이1:4-6  신윤식 목사  2013-01-30 1571
8250 요한이서 장로의 관심 요이1:1-3  신윤식 목사  2013-01-30 1942
8249 에스겔 자기 자리를 지키자 겔12:1-20  최장환 목사  2013-01-30 4372
8248 이사야 마음을 얻는 사람 사15:1-9  최장환 목사  2013-01-30 4265
8247 창세기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창12:1-3  김경형 목사  2013-01-30 2071
8246 요나 성내는 요나 욘4:1-11  신윤식 목사  2013-01-30 1916
8245 요한복음 예수님과 함께 요2:1-11  김삼환 목사  2013-01-29 2799
» 창세기 21세기 세계평화를 위하여 창1:27-28  이필재 목사  2013-01-29 1753
8243 요나 니느웨로 간 요나 욘3:1-10  신윤식 목사  2013-01-28 2362
8242 요나 요나의 기도 욘2:1-10  신윤식 목사  2013-01-28 2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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