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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창세기 궁극이............... 조회 수 2071 추천 수 0 2013.01.30 11: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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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2:1-3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아브라함 

121-3.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 말씀이 하나의 역사로 아브라함에게만 한 말씀으로 들립니까, 역시 우리들에게도 이렇게 들려집니까? 하나님의 택한 백성, 사랑하는 자녀가 위신과 신분 그리고 우주만물을 주관하고 통치 지배하고 관할하는 그런 권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에게 말이요. 아브라함 믿음을 가진 당신의 백성에게 그 말씀을 하시는 거다 그 말이요.

 

그래서 첫째는 우리가 신분적으로 보면, 존재적 신분적 면에서 보면 성도라고 할 때는 불신자적 입장에서 볼 때 굉장히 떨리는 함부로 할 수 없는 그런 존재란 말이요. 그런 신분인데 그런데 불신자들은 그걸 그렇게 몰라서 못 느끼지만 문제는 우리 기독자들 스스로가 점점 깨닫고 하나님 말씀을 받으면서도 그러한 면에서 자기의 위치적 신분이라든지 그런 걸 못 느껴요. 별로 못 느끼고 있단 말이요. 만물이 비교할 수밖에 없는 두려움의 존재들 아닙니까?

 

아브라함에게 말씀했을 그 당시에는 잘 모르지요. 우리들이 볼 때도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 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출발하기 전 그 때 그 당시에 아브라함의 성분과 신앙적 성분이라든지 그 면과, 자기도 아브라함 성에 살고 있는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는 그 지역 그 나라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 말이지요. 다를 바가 없는데 그러나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제 삼자적 입장에서 볼 때에 아브라함과 갈대아 우르 사람과 이렇게 비교해 볼 때에 엄청난 차이가 생겼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지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인데, 인격적 면에서도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거다. 근본적인 면에서 성장적 양적 부피적인 면에서도 엄청난 거지요. 그 차원을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거지요. 아브라함을 세워놓고 갈대아 우르 사람을 세워놓고 어느 것이 저 사람이냐? 네가 한 번 골라봐라할 때에 엄청난 차이 아니겠어요?

 

사람을 갖다가 비유로 씨에 비유해 본다면 갈대아 우르 사람은 믿지 않는 것이 벼 알맹이 없는 껍질 같고, 아브라함은 벼의 껍데기 속에 알맹이가 잔뜩 들어있는 벼와 같다. 그럴 정도의 비유도 갈대아 우르 사람에게는 안 돼요. 왜 그런가 하니 아브라함을 벼 알맹이라 하면 갈대아 우르 사람들은 가라지와 같다. 그러니까 질적으로도 근원적으로도 이거는 다른 거다. 비슷하다가 아니라 다른 거예요. 그런 차이를 우리가 비교할 수 있어요.

 

떠난 사람과 안 떠난 사람과는 완전히 다르지요? 참 쓸 거 없어요. 결과를 우리들에게 보여주니까. 역시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떠나기 전 상태의 그 사상을 가지고 예수 믿어봐야 그건 뭐 불신자 같은 거지요. 하나도 안 달라진다. 그 사상가지고 백 날 그 자리서 부르짖어봐야 사람이 안 달라져요. 달라질 리가 없어요.

 

그러면 떠나라하는 것은 물론 인생의 나이의 걸음걸이인데 그렇게 가는 동안에 사람이 완전히 바꿔지지 않아요? 인격적 도덕성적으로 인간이 가져야 할 능력성적으로. 우리가 진가를 우리는 알 수가 있지요.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초보적 신앙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처음에 아브라함이 알았던 그 하나님, 가면 갈수록 하나님이 자꾸 자꾸 알아집니다. 가면 갈수록 알아져. 초보적인 믿음에서 하나의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불신자로 있는 이방인으로 있다가 그 다음에 종교인으로 달라지고, 초보적인 믿음을 가지고 그 말씀대로 따라서 순종을 하는 거지요? 가다가 물론 잘못된 적이 있지만 가면 갈수록 깨달아져. ‘하나님은 자존하신 분이시구나, 자존만 아니시고 독존도 하고 계시는구나, 그리고 하나님은 인격자이시구나. 인격자로서 생존하시는 분이시구나.’ 살아계신 분.

 

어떻습니까? 여러분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면 그런 면에 피부로 느낄 정도로 그 느낌이 와 닿습니까? 창세 때 그 하나님, 영원 전에 계셨던 그 하나님, 오늘날도 역시 그 하나님 아니십니까?

 

그리고 죽음과 상관이 없으신 분이시다. 무한 완전하신 분이시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의존성이라든지 건설이라든지 그런 것을 자꾸 깨달아 나옵니다. 깨달아 자꾸 나가니까 아브라함이 어느 날 자기를 쳐다보고 가만히 생각을 할 때에 갈대아 우르를 참 잘 떠났다그런 마음이 나올까요, ‘아차, 이거 속았구나그런 마음이 나올까요?

 

오늘날 여러분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이 깨달음을 알기 전에 신앙생활 종교생활 했던 그 때에 자기의 어떤 깨달았다. 못 깨달았다하는 그게 있을 수가 있잖아요? 지금 오늘날 와서 그게 보입니까? ‘내가 속아왔구나. 이용당해 왔구나그게 느껴집니까? ‘지금이 나쁘다그렇게 된다든지. 아브라함은 내가 참 잘 떠났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내가 참 잘 떠났다.’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해요. 참 내가 예수를 안 믿었으면 어떻게 될 뻔 했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세상적으로는 얼마나 좋았을는지 모르지만. 또 그것도 자기 생각이지. 그런데 예수 믿고 인간을 바로 알고 가면서 지식적인 면에서도 지혜적인 면에서도 세상박사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단 말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세상의 교훈을 비판 판단할 수 있고, ‘잘못된 길이다. 잘못된 사상이구나판단할 수 있다고 하는 그걸 주신 거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리고 또 아브라함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요. 자기 스스로가 설령 안 떠났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강제로 하지 않는다. 강제로 끌고 가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참 물론 절대 자유보장이지요? 명령이 왔는데도 안 떠나가지고 육적인 모든 조건이 쫄딱 망했다 이렇게 됐을 때에 아브라함 속에서 뭐라고 생각이 될까요? ‘아이고 하나님, 나를 억지로라도 끄집어내주지.’

 

여러분들, 간혹 가다 그런 말 들을 수 있지요? ‘나 공부 못했을 때 선생님이 그렇게도 벌을 주고 훈계를 한 거, 오늘날 이만큼 된 것이 참 감사하다. 정말 내 자식들 교육을 그렇게 시켜야 되겠다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요? 그런데 선생들이 윗사람들이 너 이놈아, 그렇게 살지 말라 하고 내가 그렇게 말 안 들을 때 제발 좀 두들겨 패서라도 좀 끌어내줬으면 내가 이 지경은 안 될 텐데. 이런 폐인이 안 될 텐데그렇게 또 말하는 사람도 간혹 본단 말이요. 어쨌든 망한 건 안 좋으니까 자기가 생각할 때에 나를 억지로라도 두들겨 패서라도 나를 끄집어내주지그게 나올 수 있단 말이요. 그렇지 않아요?

 

그래, 옆에서 누가 있다가 그래, 뭐라고 그랬어. 내가 나오라고 그럴 때 너 안 나왔지? 너 무슨 할 말이 있느냐?’ ‘그래도 그렇지. 날 억지로 두들겨 패서라도 끄집어내주지.’ 그런 말을 우리가 듣는단 말이요.

 

어쨌든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하지. 떠났던 안 떠났던, 떠나도 그 결과는 자기에게 오고 안 떠나도 그 결과는 그 열매는 자기가 따먹어.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할 거냐 그 말이요.

 

그리고 좋은 목적을 가지고 방편을 쓰다 보니 결과가 잘못됐다고 했을 때에 어떻게 해요? 그런 경우가 있고, 방편은 조금 잘못됐더라도 옳은 목적을 바라보고 나갔을 때 자타에게 다 유익이 됐다 했을 때에 그거는 또 어떻습니까? 그럴 때에 할 말이 있어요? 없지요? 그러면 아까 처음 한 말은? 결과가 좀 나쁘게 됐더라도, 말하자면 일이 좀 안 됐더라도 그것도 할 말이 없는 겁니까? 귀담아 들어야 돼요.

 

자타에게 다 유익이 되고 자타에게 모든 면에서 좋았다 하면 그거는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타를 유익되게 하기 위해서, 또 자타에게 유익이 왔을 때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 일에 누가 시비를 하겠느냐 그 말이요. 그리고 또 하나. 자타를 위해서 하다 보니 자타에게 유익이 덜 왔다 그랬을 때는 말이 됩니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들이지.

 

어쨌든 순종자는 아브라함처럼 동행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계명을 지키고 참 잘했다. 가면 갈수록 기쁘고,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치 못한 자는 가면 갈수록 외롭습니다. 그러니까 동행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과 동행자입니다.

 

솔로몬 왕궁의 궁녀들은 솔로몬을 압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딸들은 솔로몬을 모릅니다. 그래서 아가서에 있나? 노루와 들사슴은 시끄러워요.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믿고 떠나면 하나님을 신임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고요.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와 자체적으로 어떤 기쁘다. 슬프다하는 그 요건에 하등의 동화가 없잖아요. 동화성이. 그런 것처럼 현재적 자기의 외부의 어떤 환경이 나를 기쁘게 해주고 환경이 나를 슬프게 한다는 면에서 그런 여건이 조성이 안 됐다 하더라도 자기는 스스로 자체적으로 기쁨이 충만한 자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 혹 볼 수 있지요? 싸움은 딴 사람하고 싸워놓고 이웃사람이 왔을 때에 좋은 말로 하지 않고 성난 말로 하는 사람 혹 봅니까? 싸우기는 딴 사람하고 싸워놓고 아무 상관도 없는 딴 사람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처럼 성난 말로 하는 걸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참 어리석지요? 잘못됐지요. 자기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상관이 없는 사람이 묻는데 막 그냥 성을 내가지고 답을 해주고. 그거 안 되겠지요. 안 그래요? 그거 고쳐야지요? 우리 속에 그런 게 다 있지요? 안 바꾸어졌으면 고쳐야지요. 하나님은 그러지를 않지요?

 

아브라함은 이제 그런 분을 처음 만나본 겁니다. 사람은 기쁨이 환경이 달라지는 대로의 기쁨과 슬픔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외부의 것이 어떤 조건으로 변했어도 거기에 동화되지 않는다. 내적 내발적으로 기쁨이 충만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불에 집어넣으면 하나님이 원망하고 고통스럽다고 그럴까요? 하나님과 동행한 자가 또 그런 속에 들어가면 원망 불평이 나올까요? 나오지 않지요.

 

우리가 다니엘의 세 친구를 압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불에 넣어도 그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았지요. 세 친구가 풀무불 앞에서 간이 콩알만큼 됐을까요? ‘불속에 넣으면 들어가겠습니다하면서 담대한 그것이 어디서 나왔겠느냐 그 말이요. 신앙이 없는 배짱으로 나왔을까요? 상대가 미웠기 때문에 억지로 오기로 그런 말이 나왔습니까?

 

참 우리가 이런 것도 있지요? 오기가 난다고 자기에게 고통스러운 짓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간단히 말하면 부모에게 얻어맞았다. 부모가 밉다. 그래서 밥 먹어라해도 밉기 때문에 오기가 나가지고 밥을 안 먹어. 누구만 배고프지?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많아요. 누가 배고프냔 말이요.

 

어쨌든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그 담대한 그것은 진리가 없으면 담대가 안 나와요. 나올 리가 없습니다. 기도로 믿사오니.’ 말이 믿사오니그게 될 말이요? 그건 안 돼요. 어쨌든 진리대로 살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그런 경험을 가지게 됩니다.

 

이 세 친구가 내가 못하는 그런 경험을 했지요. 하나님만 하는 그런 경험을 한 겁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참 그 하나님을 따라다니다 보니 아브라함 그 속에 생각이 나는데 무슨 생각이 나는가 하니 나도 하나님처럼 되어 보았으면, 하나님을 경험을 해 봤으면.’ 여러분들도 왜 그 시골 시장마당에 마술가인가 차력사인가? 돌 깨고 나무 부러뜨리고 하는 그런 사람을 구경하면서 , 나도 한 번 저렇게 해 봤으면아 그거 없습니까? 다 있지. 그런 것처럼 말이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느냐? 될 수 있는 거지요. 존재적으로는 될 수 없지만 성품적으로 될 수가 있다. 하나님은 어떤 곳에 갖다놓아도 물들지 않는 것처럼 우리를 그런 자로 만들어 주려고 그러는 거고, 그래서 나를 따르라그러는 거지요. 불신자들은 돈 백억 천억 억하는 이 돈을 얻는 것이 좋다고 그럴까요,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좋다고 그럴까요? 돈이 좋다고 그러지요.

 

하나님을 닮는다고 하는 것은 유한자가 무한자로 되는 것이고, 성품적으로 그렇습니다. 존재적으로 그런 게 아니고. 물론 존재적으로야 부활 후에는 그런 면에서 보면 또 무한자가 되는 거지요. 또 무능자가 유능자로 되는 것. 이것이 큰 것이고 이것이 믿음입니다. 무한자로 되어나가고 유능자로 되어나가는 것. 이게 믿음이란 말이요. 자라지 못하는 믿음 어디다 써먹겠습니까?

 

그러니까 떠나라할 때에 떠나면 나도 하나님처럼 된다. 안 떠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박사 되는 것보다도 사탕 먹고 싶은 그런 마음하고 비슷하다고 할까? 어쨌든 자기가 교회 다니면서 진리를 붙잡지 못했다면 이거는 초보적인 신앙도 못 된다. 초보적인 신앙도 못 된다.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저녁에도 아브라함을 동원시켜서 아브라함이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을 발견해서 욕심이 나서 하나님처럼 성품이 닮아가는 그 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겠습니다.

 

창세기 121절로 저희들이 볼 때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말씀이 오늘날 저희들에게도 그 음성이 역력히 들리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는 복된 자가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행여나 우리 성도의 위치와 성분과 존재 성분이 일반사람처럼 여기고 일반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그런 감각성 정도로 또 그렇게 자기를 느끼고 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그 말씀대로 그 결과성을 붙잡고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신 말씀일진대 아버지 하나님이여, 그런 자로 만들어지고 될 수 있도록 저희들에게 계속 역사하시지만 저희들 소원 목적도 하나님의 그 목적과 그 말씀에 합당한 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을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다음 가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아는 이거, 인격적으로나 능력적으로나 모든 성분적인 면에서 얼마나 고상하고 최고라 하는 것을 아버지 하나님이여, 그런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발견하고 또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신다고 하는 그 약속이 있는 고로 그 말씀을 믿고 말씀을 따라서 갈 수 있도록 주님이여, 저희들을 강력하게 붙잡아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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