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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이1: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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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4강) 요한이서 1:9-11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지지 않은자
<본문>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요한이서 1:9-11)
<설교>
요한일서에서 사도가 말한 대로 신자라면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가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사귐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른 채 사귐을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9절을 보면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모실 수가 있습니까? 그것을 사도는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신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귐이란 함께 함을 뜻하는 것이고, 함께 함은 곧 하나님을 모시는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사귐이나 하나님을 모시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와의 사귐도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할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하는 신자와의 사귐은 신자가 서로 만나서 친분을 쌓고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사귐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신자와의 사귐 역시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교훈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함으로써 신자와의 사귐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만나지 못해서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신자와의 사귐입니다.
앞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을 모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번듯한 예배당이나 장엄한 의식 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번듯한 예배당을 지어야 하나님을 모시는 일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생각한다거나, 예배라는 의식이 경건하고 장엄해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예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인간의 착각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는 다만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 있음을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사도의 말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그 속에 두고 교훈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는 신자의 심령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두고 사는 신자의 심령에 오시는 것이지 어떤 장소에 의식에 오시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의식에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심령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그리스도의 교훈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을 뜻하기에 결국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몇 가지를 실천한다고 해서 그것을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하는 것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7절을 보면 미혹하는 자가 등장합니다. 미혹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께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그리스도의 교훈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 즉 십자가 사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그 말씀들의 의도는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하나하나가 메시아가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것들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왜 오셔야 하는가? 그리고 왜 죽어야 하는가를 암시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외침 역시 단순히 죄를 뉘우치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훈은 십자가의 사건이며 우리는 십자가의 사건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은 세상이 알고 있는 것처럼 ‘사랑하라’ ‘겸손하라’ ‘온유하라’ 등등의 훈계의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교훈은 사랑, 겸손, 온유 등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훈계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 겸손, 온유 등을 십자가 사건을 통해 증거하심으로써 우리의 사랑과 겸손과 온유가 모두 가짜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온유와 겸손에 순종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과 겸손과 온유 등의 문제는 실천 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하고 그리스도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증거물이란 차원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은 십자가 사건에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 하나로 모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교훈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날 위해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다. 그것으로 우리는 구원 받았다 감사해라’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는 아들을 보내시고 죽게 하신 하나님의 고통과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과 은혜가 함께 있습니다. 아들의 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긍휼과 자비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 제대로 선 신자라면 자신의 죄를 돌아보며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결국 십자가가 우리에게 외치고 있는 그리스도의 교훈은 우리는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멸망의 자식으로 남았어야 할 악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이 겸손으로 형제를 대하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이 은혜를 알고 마음에 둔 자로서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 어떤 고통의 일이라 할지라도 아들을 죽게 하신 사랑에서 생각하게 되면 고통의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게 되기에 감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사건은 이해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없이 사랑과 겸손과 온유를 말하게 되면 결국 세상이 말하는 도덕과 윤리의 수준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9절의 ‘지내쳐’라는 말은 지나치게 나아갔다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교훈에서 지나치게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훈에 거한다면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십자가에서 벗어난 교훈을 경계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십자가에서 벗어난 교훈은 간단히 말하면 인간의 행위와 의를 높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로우신 행위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와 의에 초점을 둘 때 그것은 분명 십자가에서 벗어난 잘못된 교훈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10절에서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지지 않고 오는 자들은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고 합니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자면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지지 않고 오는 사람들은, 집안에 들여 놓지도 말고 그들과는 서로 인사도 하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아주 냉정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기는 무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10절에서 언급하는 ‘집’이라는 말이 우리가 생각하는 가정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집은 개인집을 지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전 16:19절에 보면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언급하는 집이라는 것도 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집에 들이지 말라는 것이 여러분의 개인 집에 들이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교회라는 관계에서 생각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라는 문자적 의미라기보다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지고 오지 않은 자들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즉 교회가 거절해야 하고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바라보고 원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훈 즉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원하게 될 때 교회는 이미 교회됨을 상실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에도 관심을 두고 다른 것에도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에만 모든 마음과 관심을 두기로 작정해야 합니다. 교회의 부흥이든 무엇이든 우리가 관심 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관심은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즉 그 심령에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였기에 엉뚱한 자기중심적 관심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교회를 보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관심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오직 그리스도만 굳게 세울 따름입니다. 착하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악함을 알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결코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거나 앞세우지 않습니다. 결국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도 그리스도의 교훈이 빠진 십자가도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지지 않은 자의 말은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그 중심에 십자가가 없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필히 그리스도만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앞세우고 인간의 믿음을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내쳐 나아간 것입니다. 이 말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11절의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는 결과가 됨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교훈을 원하시고 어떤 말을 듣고자 하십니까? 진리에 관심이 있고 진리로 기뻐하는 신자라면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밀쳐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이 있는 그 마음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리로 사는 신자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의 교훈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는지, 여러분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교훈인지, 아니면 교회의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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