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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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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본문>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한일서 1:3)
<설교>
교회는 인간에 의해 세워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세워진 것이 교회이고,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로 구원받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일컫기 때문에 교회는 조직도 건물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교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이 곧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간적 친분이나 혈연, 지연 등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라 하면서 개인적 친분 관계 또는 학연이나 지연 등으로 뭉쳐진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를 벗어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만약 교회에서 그리스도가 배제 된다면 그것은 분명 교회가 아니라 인간 단체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지키고 사수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그리스도다움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 드러내는 역할로 세워졌기 때문에 이 역할을 다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에 충실하다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도는 사귐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 단어만을 두고 생각한다면 사귐이라는 말이 어려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사귐의 내면에는 간단치 않은 다른 면에 내포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사귐이라는 말은 사람과 사람이 함께 어울리며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가오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그러한 수준의 사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인간의 친목 또는 교분과는 다른 차원의 사귐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오직 교회에서만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사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친목과 교회에서의 신자의 사귐은 분명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의 친목 또는 사귐은 교분이 그 목적입니다. 사람을 알아두는 것, 그렇게 해서 혹 무슨 일이 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 점찍고 사귀는 것입니다. 또는 삶의 무료함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어울려 노는 대상으로 사귀기도 합니다. 사람이 혼자 논다는 것은 매우 힙들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세상의 사귐에는 사귈 대상은 자기 스스로 결정합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 성격이 맞거나 취미가 같은 사람, 사귀면 나중에 득이 될 수 있는 사람, 여러 가지로 살피고 다지면서 사귈 자와 멀리 할 자를 결정하지 않습니까? 결국 사귐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 되는 셈입니다. 자신을 위해 사귐을 갖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사귐은 이런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사귐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이 같고 뜻이 같고 생각이 같을 때 그것을 참된 사귐, 즉 성도의 교제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사귐, 교제는 인간적 친분으로 이루어지거나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어서 말하기를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즉 사도와의 사귐에 있게 하기 위해 사도가 보고 들은 바를 전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도가 보고 들은 것을 우리에게 전하지 아니하면 사도와의 사귐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즉 사도와의 사귐은 사도가 전한 것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의 사귐의 조건에는 세상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사귐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 마음에 들고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신자의 사귐에는 그러한 것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도가 전한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전하는 보고 들은 것은 무엇일까요? 사도가 보고 들은 것이라면 뻔한 것 아닙니까? 그들은 오직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사귐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누구든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다 해서 사귐이 가능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보고 들은 그분을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같은 예수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예수를 말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과는 예수님에 대해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때문에 사귐은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사도가 보고 듣고 우리에게 전한 바로 그분이어야 합니다. 그분만이 참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사도가 전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결국 사귐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비록 사도가 2천년 전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도와의 만남과 사귐이 가능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육체적인 만남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육신적으로 함께 하고 만났다고 해서 사귐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가령 예수님의 제자들이 3년간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과연 그들이 예수님과 사귐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사귐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귐은 같은 생각 같은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해 사도들과 같은 생각이고 같은 마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사도와 사귐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사귐, 즉 신자의 교제는 육신으로 함께 하고 함께 하지 않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사도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같은 생각과 마음으로 모이느냐로 구분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인간적 친분으로 결속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단합에 불과할 뿐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랑이 있고 연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할지라도 과연 사도와의 사귐에 있는가를 따져봐야 합니다. 예수 없이 인간들끼리의 연합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안에서의 만남과 교제인지를 심사숙고하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 잘 어울린다고 해서 사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스도가 선포되고 복음이 나누어질 때 사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내 상식에 의해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앞서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난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것이 참이기에 우리는 그분들이 전해주는 예수님을 참된 분으로 알고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고 말씀을 듣기를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배워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사귐은 필수적입니다.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는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형제를 만난다는 것을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과연 우리가 이러한 기쁨을 기대하고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주님 때문에 형제의 만남이 기쁜 것이 아니라 친분 관계에서 어울리는 것이 전부일 수도 있음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는 예수님만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득을 보고자 하는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때문이라면 죽는 길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 사도들입니다. 신자가 이러한 사도의 마음으로 만난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사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사귐은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는 서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보고 들은 바를 전한 것처럼, 우리 역시 내가 보고 들은 예수님을 서로에게 전하는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귐입니다. 내가 보고 듣고 소유한 하늘의 놀라운 복을 다른 형제와 함께 누리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에서 서로 전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저와 여러분을 사귐에 있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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