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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1: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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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본문>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5-7)
<설교>
5절을 보면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4절을 보면 사도들이 소식을 전하는 이유는 사도의 기쁨이 충만케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가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소식을 쓰고 있는 것은 이 소식을 듣는 자들에게 사도의 기쁨이 충만케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소식 자체가 사도들에게는 기쁨이었고, 또한 이 소식을 듣는 우리에게도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뜻인데 과연 그렇습니까? 5절을 말씀을 들었을 때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어집니까? 아마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소개의 말 정도로 여겨지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사도들에게는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소식이 기쁨이었는가 봅니다. 그래서 그 기쁨을 우리에게 나누기 위해 이같은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 자체만을 가지고는 쉽게 기쁨의 의미를 알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구절이 담고 있는 내용을 아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무한한 기쁨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 때 왜 이 말이 기쁨이 되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빛이시며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다면 하나님은 어두움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악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오늘 우리의 실수는 바로 이것을 잊고 사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신 분임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말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서는 몽땅 용서하신 분으로만 여깁니다.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단지 자신의 구원만을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날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만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할 정도로 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심판하시는 분임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대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만을 말합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아들을 죽이신 사랑만을 말하기에 어떤 상황에서는 ‘사랑의 하나님이 왜 이러 일이 있게 하시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악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할 때 세상의 어떤 일에 대해서도 ‘왜’라는 물음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앞에서 비춰볼 때 세상에 존재해야 할 가치를 가진 피조물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나에게 어떤 고통이 있다 해도 거룩 앞에서는 할말이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고통을 당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죽어야 할 이유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지 않게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나는 것은 당연히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고 대신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분이 죽는 것을 통해서 죽어야 할 자가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무조건 우리를 잘해주는 것이 아니라 죽어야 할 자를 살리기 위해서 죽을 이유가 없는 분을 죽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신자는 이미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마음껏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하찮게 여기고 세상의 것을 크게 봄으로서 날마다 사랑을 원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도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에서 이해하면 좋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실 때 그분과 동행하고 그분과 사귄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현상이 있겠습니까? 빛이 올 때 빛을 아는 자는 자연히 자신의 어두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교제인 것입니다. 거룩하신 분과 사귄다고 하면서 자신의 잘못됨에 대해 전혀 인식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사귐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둠의 존재로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오직 멸망의 자식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습니다. 새로운 생명이고 크나큰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에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는 기쁨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시각에서 자신을 보면 다만 멸망을 받아야 할 어둠의 존재일 뿐입니다. 죽어야 할 존재에게는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함이고 기쁨입니다. 왜 이런 일이 있게 합니까?라는 불평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시각에서만 생각하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해야 마땅하고 그렇기 때문에 조그만 일에서도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이 있게 하는가?’라는 의심만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기쁨은 사랑받을 자격도 없는 내가 사랑을 받았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만약 이 기쁨을 누리지를 못하고 상실된 채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기쁨보다 더 크게 여기지고 중하게 여겨지는 무엇인가가 내 속에 자리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현재적인 세상이 것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우리의 눈과 관심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입술은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도 마음에서 하나님은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있는 쓸데없는 것들을 제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앞에서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 과연 가치있는 것인가를 묵상하고 바울의 고백처럼 그러한 것은 배설물에 불과할 뿐임을 자각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며 큰 선물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가치는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더욱 크게 빛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 앞에 결코 나올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길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수고와 희생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또 욕심낼 수 있겠습니까? 이미 가장 큰 것을 주셨는데 무엇을 달라고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주신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신자다움일 것입니다.
나의 가치 없음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가치없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시고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 마음 그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십시오. 이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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