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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2: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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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본문>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한일서 2:3-6)
<설교>
예수님을 믿되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보배로운 분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예수님을 가장 귀한 보배로운 분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자신에게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것 이전에 그분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세상에 오셔야 했으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그분으로 인해서 이루어진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분의 오심과 세상에서의 행적 하나하나가 나에게 의미있는 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 예수를 믿는 것은 다만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는 흉내 내기에 불과할 뿐이고 맹목적인 신앙으로 전락할 뿐입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은 우리의 대언자이심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대언자라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나올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버림받고 팽개침을 받아도 마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 앞에 예수님이 대언자로 서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불의함과 죄악을 대신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시고 우리를 용납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인생의 비참함을 아는 사람만이 대언자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예수 없는 사람은 단지 멸망할 비참한 자로 여겨질 뿐입니다. 소망이 없는 존재로 여겨질 뿐입니다. 돈이 있다 할지라도 돈에 눈이 가려져서 생명으로 오신 분을 보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예수 안에 있는 자의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4절을 보면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여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1장에서도 이러한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요한이 사용하는 언어의 독특성은 ‘무엇무엇 한다고 말하면서 무엇무엇 하면 거짓말하는 것이다’라는 말에 있습니다. 즉 스스로 내 뱉는 믿음의 진위 여부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계명에 대한 이해입니다. 만약 계명을 현대 교회가 주로 말하는 것처럼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 하고 기도하는 문제로 이해하게 되면 엄청난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전혀 기독교가 아닌 다른 길로 빠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고 십일조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안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성경에 없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구약의 계명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계명은 예수님에 의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압축 되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의미하는 계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에게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모습이 나올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는 신자라면 살인을 범할 수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키는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5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지킴으로써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온전함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 신자의 증거는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고, 예수님을 아는 신자의 증거 역시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한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신자와 신자 아닌 자,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모르는 자로 살아가는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신자로 하여금 앎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확실히 깨닫게 해서 예수님을 아는 풍성한 믿음의 삶에 머물게 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을 아는 줄로 알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의 관심은 계명이 무엇인가로 향할 수 있습니다. 즉 계명이 무엇인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지켜 내겠다는 생각입니다. 계명을 지켜내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겠다는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명은 지켜내야 할 것으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계명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죄를 해결할 분으로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게 하려는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계명을 지켜내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인 줄로 착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처음부터 인간이 지켜낼 수 없는 계명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 역시 인간이 지킬 수 없는 어려운 것만 골라서 계명으로 정했다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자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말씀에도 순종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항복을 실천해 낸다는 의미의 말이 아니라 계명이 목적하고 의도한 대로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 인간의 불의함을 깨닫고 우리의 불의함을 용서하고 해결해 주실 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말씀 역시 실천부터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이고, 나 말고 다른 존재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 앞에서 내가 곧 사랑 없는 자임을 깊이 깨닫고 자신에게 주어진 심판과 멸망에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바라볼 때 비로소 사랑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즉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나로 하여금 사랑하는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이 예수님이 무엇을 행하셨는가를 보고 그대로 본받아 행하라는 의미일까요? 우리가 과연 예수님이 행하신 대로 행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 안에 거한 자는 예수님의 능력에 붙들린 자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행한대로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함은 사랑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십자가에 죽기까기 순종케 하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 안에 거한 자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에수님 안에 거하는 줄로 알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죄를 알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강권하여 말씀을 지키는 자로 살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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