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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7:1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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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연재선 목사 |
참고 : | 2009년11월29일 새생명교회 http://nlc1.cafe4.com/ |
출7:14-25
여호와인 줄 알리라
출애굽기를 읽다 보면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나님이 애굽이라는 나라와 전쟁을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당시 세계에서 최고로 강했던 애굽이란 나라도 꼼짝하지 못하게 하셔서 이기셨다고 간단히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애굽과 오랜 시간 동안 싸우실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당장 하늘에서 불을 내려 애굽 군사들을 태워서 죽일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차피 변하지도 않을 ‘완악한’(3, 13) 바로와 오래 싸움을 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능하심’이란 말이 단지 당장 눈앞에 있는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분명히 애굽과 싸움을 하셨다. 그런데 그 싸움의 목표는 애굽을 이기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하나님의 목표가 애굽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결국에는 망하게 될 애굽과 굳이 힘들여서 여러 번 싸우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야말로 전능하신 분이신데 한 번에 끝장을 내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시면서 싸움을 하신다. 그런 싸움으로 인해 이스라엘에게는 더 심한 고통이 주어지게 되었다. 좀 이스라엘이 편하도록 일찍 한 번에 싸움을 끝내시면 되었을 텐데 말이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목표는 단지 애굽과 싸워서 이기는데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자꾸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애굽과 싸워서 승리하거나, 오늘날 우리가 잘 살게 해주시는 쪽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한 번 마음만 가지신다면 까짓것 당장이라도 돈방석에 앉게 해주시던지, 돈벼락을 맞게 해 주실 수도 있으실 것이다. 예배당 짓다가 금궤가 나와서 벼락부자가 되게도 하실 수 있으실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장자인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올 때 쉽게 나온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애굽과의 오랜 싸움 때문에 이스라엘은 오히려 더 어려움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지만 궁색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나님은 한갓 미물과도 같은 애굽과 오랜 싸움을 하셔서 이스라엘의 탈출이 늦어질 뿐만 아니라 더 힘들게 하셨는가? 전능의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애굽과 길고도 긴 싸움을 하셨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애굽은 분명 미물(微物)과 같은 힘없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애굽과 이스라엘을 사이에 두고 길고 긴 싸움을 하신 것이었다.
가령 아버지가 방에 바퀴벌레가 기어가는데 잡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고 하자. 한방에 쳐서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면 아버지가 정신적으로 모자라든지, 아니면 분명히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로 하여금 바퀴벌레를 보도록 그냥 나뒀다. 아들은 피한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잡지 않는 것은 평소 벌레를 무서워하는 아이를 훈련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면 아버지의 행동은 바퀴벌레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아이를 위해서인가? 당연히 아이를 위해서이다. 당장 잡아도 될 것을 그냥 놔두는 이유는 아이로 하여금 더 이상 바퀴벌레를 무서워하지 않도록 훈련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애굽을 손바닥으로 탁 쳐서 잡지 않으시고 오래 두신 것은 애굽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아들이요 장자인 이스라엘을 위함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아버지는 아이를 위해 바퀴벌레를 당장 잡지 않는다. 부모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부모이기 때문이다. 아들의 현재만이 아니라 장래까지 생각하여 강하게 키우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 역시 애굽이 설치도록 놔두신 것은 당신의 아들인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다.
부모의 생각은 아이와 생각과 다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생각은 안목이 좁은 이스라엘과는 전혀 달랐다. 하나님은 애굽과 긴 싸움을 하시면서 희생하셨다. 사실 애굽과 싸움을 하시는 그 자체가 희생이었다. 간단한 문제를 갖고 많은 시간을 끌어야 하셨기 때문이었다. 바퀴별레를 잡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 게 아버지에게는 시간 낭비일 뿐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안목이 짧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눈앞에 보이는 바퀴벌레를 당장 잡아주시기를 원한다. 짧은 시간에 결판을 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긴 안목을 가지신 아버지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자녀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바른 시각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과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기계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런 관계라면 당장 먹을 것을 많이 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子女)의 관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아버지의 모든 행동은 당신의 자녀를 위한 것이다.
가령 4살짜리 아들과 40살짜리 아버지가 방에서 씨름을 한다고 하자. 그러면 누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답은 뻔하다. 4살짜리가 이긴다. 만약 40살짜리 아버지가 4살짜리 아들을 이겼다고 자랑하며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다면 모자란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기계적 관계’가 아니라 ‘부자(父子)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에선 ‘힘’보다 더 중요한 ‘사랑’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17절에서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애굽과의 싸움을 하심으로써 이스라엘로 하여금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당장 눈앞이 아니라 멀리를 바라보게 하시는 분이심을 알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앞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종교화된 기독교인 것이다. 하나님은 멀리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게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러 상황을 통하여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본다면 그보다 더 큰 은혜는 없는 것이다.
교회에는 권징이라는 것이 있다. 혹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을 때 공적으로 징계를 하는 것이다. 이 권징의 목표는 단순히 처벌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세워가기 위함인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으로 만나야 한다. 눈앞에 이루어진 것을 가지고 모든 복이 다 임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도와야 하고,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실패한 사람을 위해서는 낙심하지 않도록 성경말씀으로 권면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아버지를 둔 형제요, 자매요, 가족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당장 눈앞에 펼쳐지는 성과가 아니라 아버지의 약속을 따라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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