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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7: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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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황두용 목사 |
참고 : | 2011년 1월 30일 어울림교회 http://cafe.daum.net/eoulimchurch |
출7장 1-13; 요11장 45-53
예수님의 표적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할지니라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로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이적을 보이라 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말하기를 너의 지팡이를 들어서 바로 앞에 던지라 하라 그것이 뱀이 되리라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된지라 바로도 현인들과 마술사들을 부르매 그 애굽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되 각 사람이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키니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출애굽기 7:1-13)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요한복음 11:45-53)
<요약>
복음서는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도 온전한 믿음을 지니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표적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충분한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을 표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을 예수님의 일로만 보지 하나님의 일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보려면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을 보아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순종의 예수님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표적의 뜻>
복음서에서 보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상당한 부분 예수님이 베푸신 표적을 담고 있습니다. 병자를 고치신 것,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 물 위를 걸으신 것, 그리고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표적은 우선 사람들로 예수님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표적을 목격한 사람들로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표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많은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드물다는 것을 또한 들려줍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표적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점을 면밀히 정리하여 보여줍니다. 우선 니고데모라는 유대인의 고위층 사람은 예수님의 표적은 잘 알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심도 있게 다룹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표적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은 사람을 살린 것은, 그로 인하여 믿게 된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하려는 사람들의 결정적인 빌미가 된 것으로 증언합니다. 유대인 지도층들은 그런 예수님을 세상에 그냥 둘 수 없다고 결정한 것입니다(요한복음 11:47-53).
예수님이 하신 경이로운 일을 “표적(sign)”이라고 한 것이 이런 점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기적(miracle)”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사건 자체보다는 예수님을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일반 사람 가운데 특정한 개인이 아닌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표적은 함께로 보게 하는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기적”은 개관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대감을 깨뜨리는 것이라 하여 붙여진 말입니다. 사람들의 기대감은 자연의 균일성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에 따라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기대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경우 기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은 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표적”은 일어난 ‘사건’에 대한 시각이 “기적”과 다릅니다. 일어난 사건에 “뜻”이 담겼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일어난 사건이 무얼 보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일어난 것 자체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보이려고 하는 것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출애굽의 사건으로부터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sign and wonder)를 이야기합니다. 단순히 믿기 어려운 천재 이변이 일어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집트에 일어난 여러 재앙은 하나님께서 표적과 기사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시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의 이야기를 읽을 때 이미 기적이 아닌 표적의 시각으로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로 뜻을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일어난 일로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일을 표적으로 보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기적으로만 보고서 그것으로 사람들을 모으기에 해가 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일어난 사건을 자신들 나름대로 해석하여 판단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보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일을 하나님의 일로 보아야만 예수님의 일로 하나님의 뜻을 보게 됩니다. 그런 점으로 표적이라고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일하심으로 하나님과 함께하심을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순종의 표적>
예수님은 이런 점을 강조하지만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믿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 표적을 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젖어 자신들이 하는 것만 생각하였지 순종을 의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율법의 의식은 순종의 의식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이행하는 것이지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익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도 예수님이 하신 것이지 예수님이 순종하신 것으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순종의 의식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신 일이기에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게 됩니다. 그러나 순종이 없이 예수님이 한 일이라고만 보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지 못합니다. 그런 경우 예수님이 믿기 어려운 이상한 일을 한 것이라고 하면서 넘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표적이라고 하는 것은 순종으로 보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표적은 순종의 표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순종을 보지 못하면 예수님의 표적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순종으로 하나님과 함께하신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이시지만 스스로 죽음으로 가야 하는 것이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의 표적이 순종의 표적이라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고는 사람들은 순종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의 표적을 순종의 표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단지 예수님의 일만 보아서는 순종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우선 순종의 예수님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표적을 순종의 표적으로 보면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은 순종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예수님의 이야기의 구심점이 되는 것은 십자가 죽음으로 예수님의 순종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순종 때문에 예수님의 표적을 순종의 표적으로 되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표적 자체만으로는 믿음의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이야기를 복음으로 전하는 것은 순종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격(person)"을 말하더라도 순종으로 이야기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개체성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향하는 표적>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표적을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의 표적이라고 좀 더 구체화합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이라는 표현에는 순종이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께 순종하시는 아들의 일이기에 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순종의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믿는 믿음은 십자가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믿음이라야 순종의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됩니다. 그렇지 않은 표적의 믿음은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지만 그들의 믿음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은 복음서의 전반에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순종이 아니고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함께로 말할 수 없습니다. 즉 예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십자가가 아니고는 예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것을 세상에 일어난 것으로만 보고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표적은 세상에 일어난 일이고, 그런 일은 세상에 일어나는 다른 것과 연계시키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표적을 하나님과 연계시키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내용을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에 일어난 일이지만 세상의 다른 일과 연계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일과는 단절이기에 그 뜻을 세상일과 연계됨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일과의 단절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세상의 인과과계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을 세상의 어떤 힘으로든 죽음으로 몰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으로만 이야기됩니다.
순종의 시각으로 보게 되면 예수님의 일도 하나님께 순종으로 보게 됩니다. 즉 표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표적은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을 통하여 온전히 보게 됩니다. 순종의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표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표적은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향하지 않은 표적은 세상에 자리 잡으려는 것이 됩니다. 유대인들이 잘못 이해한 점이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세상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십자가로 제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예수님의 일이 세상에 자리 잡으려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이 오히려 확실히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순종을 보이는 일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을 표적으로 보지 못하면 믿음으로 가지 않고 세상에 자리 잡는 인과관계로 엮어지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지도층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간 논리가 그런 엮임을 보입니다. 표적으로 믿음이 되지 못하면 세상에서의 영향력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표적으로 믿음으로 가든 아니면 세상의 영향력으로만 인과관계로 엮이든 하나님의 이루심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의 일하심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하심은 믿음으로 혹은 믿지 않음으로 파급되어 갑니다. 어느 쪽으로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원과 심판의 갈림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표적은 하나님의 보내신 뜻이 예수님으로 세상에 드러나고, 그것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뜻이 삶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세상에 이루어지는 삶에 대하여 인과관계로 파급적인 반응을 생각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보인 바와 같습니다. 믿음으로 삶이 이루어지는데 대하여 인과관계로 반응하는 것은 믿음의 삶에 대한 저항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항은 믿음의 삶이 순종의 삶이라는 것을 또한 분명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이 그리스도들에 대한 박해는 오히려 그들이 지닌 것이 순종의 믿음임을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분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박해는 믿음에 대한 박해이니 언제나 임시적입니다. 박해하는 힘은 근원적인 것이 아닙니다. 근원적인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임시적인 거역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거역조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기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 믿음이 십자가 믿음인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저희 삶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피어난 생명의 삶인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세상의 큰일이 저희 삶의 목표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세상의 유익에 저희가 안주하지 말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향하며 세상의 일과 유익을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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