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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4:1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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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40강) 요한일서 4:12-13
확실한 증거
<본문>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한일서 4:12-13)
<설교>
우리는 지금 요한일서를 통해서 ‘사랑’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얘기할 때 자칫 초점을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 둘 위험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하늘의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사랑을 알지 못한 채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게 되면 결국 세상 수준에서의 사랑을 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을 실천한 것으로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독생자 아들을 죄인된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자신이 아닌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로 말미암아 사망에 처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신 사랑이 아닙니까? 이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 모인 것을 교회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에 온전히 마음을 빼앗긴 자들이 모인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에서 당연히, 마땅히 나타나지는 것은 사랑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점령당한 마음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나의 죄를 용서하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가득 있지 않겠습니까? 그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형제를 만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로 모인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또한 사랑이 여러분 안에 있다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신자란 사랑을 말하고 은혜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에 거하고 사랑에 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서 사랑이 아닌 모습이 보인다면 그것은 곧 나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지 않은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용서 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만이 아니라 누구를 만나든 이 위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는 죄인이라고 하면서 사람에 대해서는 의인으로 군리하려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세상적 기준에서 나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런 현상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를 무시하고 지배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지 않는 결과임을 사도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요구로 이해하기 보다는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는 자로 살아가는가?’를 묻는 의도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는 사도가 진심으로 의도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사랑이 나타나고 증거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신자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조건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일단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하나님과 1:1의 직접적인 관계에서의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직접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가 형제 사랑을 말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대신 형제 사랑을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신자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다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신자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을 증거하는 증거물이 셈입니다.
사도는 말하기를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그 누구도 하나님을 보지를 못했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사람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8절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하나님을 알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지 하나님을 봤느냐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봤느냐?’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믿느냐고 조롱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사 이들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고 해도 구원과는 상관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9절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으로 인해 알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면 그 사랑이 나타나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 사랑은 형제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증거인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아버지와 사귐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12절의 의미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에 대해 확실한 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외부적인 어떤 사건과 경험을 통해서 확실한 것을 얻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하다못해 기도해서 감기라도 낫는 체험이 있어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실함을 조금이라도 가질 수가 있지 않느냐는 생각을 합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시면서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그러자 도마가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한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합니다. 도마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곳이 어딘지 처소가 어딘지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주님이 가신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고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빌립은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요구를 합니다. 예수님을 안 것이 아버지를 안 것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가장 확실한 것은 직접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가장 확실한 것은 너희들 앞에 있는 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확실한 분이라는 것이지요. 때문에 믿고 의지할 분은 예수님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다면, 예수님을 믿는다면 따로 목격하고 체험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장 확실한 예수님을 바라보는 신자되게 하기 위해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을 얘기하는 것도 모든 관심을 예수님께 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라는 말은 예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면서 아버지의 나타나신 사랑에 모든 마음을 두고 살아가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은혜와 사랑과 의의 행하심에 두어야지 자신의 체험이나 상식, 행함이 신앙의 근거가 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신앙의 근거로 자리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확실한 것을 붙들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증거를 형제 사랑으로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 형제 사랑은 보여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를 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5:5절을 보면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 말은 형제 사랑은 성령의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임을 뜻하기도 합니다.
성령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십자가로 확증되어진 사랑과 은혜에 온 마음이 사로잡힌 자로 살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에서 형제 사랑이 나오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 필요한 것은 오늘도 내일도 날 위해 죽으신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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