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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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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본문>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한일서 5:1)
<설교>
여러분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믿는다면 그 근거와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교회를 다니는 자신을 두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내 마음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사도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난 자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좀 막연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믿음을 신자라는 근거로 말한다면 누구든 ‘나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막연하게 여겨지는 믿음을 실제적이고 사실적이고 확실한 것으로 제시하기 위해 믿음에 행위를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막연하고 보이지 않는 믿음만 말하지 말고 믿음을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으로 증거 해봐라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자연히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믿음을 차별하게 된 것입니다. 소위 잘 믿는 것과 못 믿는 것으로 믿음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믿음에 이런 차별을 두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음을 고백하는 것인데 이런 믿음에 차별에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동일한 믿음이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교단마다, 교회마다, 사람마다 생각하고 추구하는 믿음이 다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무엇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이 낳은 자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것은 새로운 창조물, 즉 새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거듭난 자, 중생된 자로 말할 수 있습니다. 종합하면 하나님에게서 난 새로운 존재, 중생된 그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용납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열심히 교회를 다니니까 신자다’ ‘나는 기도, 성경읽기, 십일조, 봉사를 잘하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이런 말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들 자체가 자신 스스로 믿음이 거짓된 것임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믿음은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압니다.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께로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고, 아예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로 끝날 운명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이 참된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처럼 놀라운 은총을 베푸시기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알았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시 걸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막연하다는 것입니다. 역시 보이지 않는 분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존재에 대한 사랑은 표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분을 상대로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결국 막연하게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감사한다는 말 한마디면 다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사도는 또 다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나를 낳으시고 새롭게 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새롭게 하신 또 다른 자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까? 같이 하나님에 의해 난 형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의 특징은 서로 닮은 것에 있습니다. 한분 하나님에게서 난 관계이기 때문에, 그리고 같이 하나님의 것을 받아 나온 존재이기 때문에 닮은 것이 당연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닮았다는 것은 외모나 성격 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서로에게 있기에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서로 닮은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고,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입니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아무 관계도 아니고 닮은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에게서 난 자라는 이 관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이 닮을 수밖에 없고 이 닮은 마음으로 교통하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나를 닮아라’는 말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나 또한 누군가를 닮아가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17절에 보면 사도가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어떻게 해서 자신을 본받으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사도가 자신의 행위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좇는 믿음에 형제들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도들을 통해서 그 실제적 모습이 증거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도와 같은 모습이 아니면 그 믿음은 의심을 해봐야 합니다. 사도와 같은 믿음이라면 분명 사도와 닮은 모습으로 보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닮은 모습은 교회 안에서도 여기저기 보이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형제관계이며, 그들 역시 하나님에게서 난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기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은석교회가 그리스도를 향한 동일한 믿음, 동일한 마음으로 교통하는 관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을 위해 여러분이 힘써야 할 것은 교회를 보지 않는 것이고 자신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날 위해 피 흘리신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며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는 것입니다.
복음의 위력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무너뜨리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복음을 맛본 자는 ‘인간으로서는 될 수 없는 일이 하나님으로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철저히 무너진 자신을 보게 되고, 그런 자신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곧 하나님께로서 난 새로운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 사람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자라는 기적을 입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과 다르다는 것으로 감사하십니까? 신자에게는 감사가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큰 것을 받았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서 난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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