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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5:1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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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본문>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한일서 5:14-15)
<설교>
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기도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행위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마다 기도를 강조하고 있고, 특별 새벽기도회니, 철야기도회니 하면서 기도하는 교회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많은 목사들의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소위 신앙이 살아있는 증표로 기도가 부각되기도 하고 기도하는 자는 망하지 않는다는 등의 말을 하면서 기도가 나를 지키는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은 열심과 응답입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자의 기도를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에 기대를 가지고 기도에 심취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물론 신자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원하는 응답은 기도의 내용이 현실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본문의 내용에 귀가 솔깃해질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14,15절)입니다. 이 내용에서 대개 무엇에 관심을 두게 될까요? ‘무엇을 구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이 구절에 관심이 가지 않겠습니까?
사실 신자가 무엇을 구하든 하나님이 모두 들으신다는 것은 굉장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말에 대해 ‘아멘’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무엇이든’이라는 말과 사도가 생각한 ‘무엇이든’이라는 말이 같은 의미인가를 먼저 헤아려봐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이라는 말을 ‘내가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든’이라는 뜻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무엇이든’이라는 말 앞에 ‘그의 뜻대로’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음을 놓치면 안됩니다. 결국 사도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든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하고 정성이 기특해서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것을 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서 바로 이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기도의 열심에 대해 많이들 강조하지만 따지고 보면 기도에 열심을 낸다는 것도 애매모호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열심의 기준이 명확하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과연 무엇이 열심 있는 기도입니까? 매일 많은 시간 기도해야 열심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두 손을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결국 목이 쉴 정도가 되어야 열심히 한 기도입니까? 이것 때문에 기도원에 기도하러 갔다고 하면서 목이 쉬어서 오지 않은 사람은 기도를 게을리 한 것으로 치부되지 않습니까? 교회에서도 ‘우리 목사님이 이번에 기도원에 갔다 오셨는데 목이 쉬었더라’는 말을 하면서 기도하는 목사님으로 우러러 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래 기도해야 열심히 한 것이라면 그 ‘오래’는 얼마의 시간을 의미합니까? 한 시간입니까? 아니면 두 시간입니까? 누가 그 시간을 정할 수 있습니다.
평가는 항상 상대적입니다. 1시간 기도한 사람이 있을 때 30분 기도한 사람은 기도를 적게 한 사람으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1시간 기도한 사람도 2시간 기도한 사람 앞에 서면 기도를 게을리 한 사람으로 평가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기도의 열심에 대해 강조들을 하고는 있지만 명확한 기준도 없이 맹목적으로 많이 할 것을 강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기준도 없는 열심이 아니라 그의 뜻대로 구하는 것입니다. 그의 뜻대로 구한다는 것은 내 뜻은 없음을 의미합니다. 내 뜻이 실리지 않는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기도에서 나의 정성과 노력은 하나님께서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뜻과 일치된 기도인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주절대고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도했다가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기도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굳이 기도의 열심을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깊은 마음이 열심인 것이지 나의 노력을 열심으로 평가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왜 갑자기 기도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것일까요? 지금까지 사도는 사랑에 대해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기도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도가 지금까지 얘기한 내용을 볼 째 사도가 기도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은 기도를 강조하거나 기도가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함은 아닐 것입니다. 사도는 성도와 하나님, 성도와 성도의 관계에 대해 말하기 위해 기도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뜻대로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관계 속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에게서만 그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가 보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신자는 ‘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실까?’라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거나 초조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시고 이미 얻은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이미 얻은 줄로 알라는 이 말에 대해서도 이상한 해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다 들으시니까 들어주실까 의심도 염려도 하지 말고 이미 얻은 줄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막무가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미 얻은 것으로 여길 것이니까 안주면 안됩니다’는 식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관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는가를 기도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실린 기도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인가로 알 수 있습니다.
사도의 말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로서 그의 뜻대로 구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들으신다면 이미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내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마땅히 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무작정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힘든 일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이런 일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은혜를 바라보며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내 뜻이 없는 기도이며, 하나님은 이 기도를 분명히 들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려움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도록 일하시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는 이미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이 있는 신자가 하나님을 아는 관계에서 보이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기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며 살아가지만 하나님을 알고 영생이 있는 신자의 기도는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기도를 통해서 형제 관계를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아서라도 나를 거룩한 성도로 살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에 함께 ‘아멘’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향한 그 마음이 같고 원하는 것이 같은 형제가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형제를 마음껏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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