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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5: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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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본문>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요한일서 5:21)
<설교>
사도는 요한일서의 결론으로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21절)는 말을 합니다. 어찌 보면 지금껏 사랑에 대해 얘기했던 사도이기에 결론으로 갑자기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말을 하는 것이 뭔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우상이 무엇이고 우상을 섬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사도의 결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상에 대해 생각할 때 많은 사람들은 어떤 형상을 떠올릴 것입니다. 즉 부처라든가 무당의 신전, 또는 장승 등등 사람들이 신격화하여 섬기는 형상들을 우상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형상들을 없애기 위해 싸우는 기독교인도 있지만 사실 이 지구상에서 사람들이 신으로 섬기는 형상을 모두 없애버린다 할지라도 우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상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고 힘으로 삼는 모든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 주변에 가득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관심을 두는 대상들, 하나님보다 더 의미하고 힘으로 삼는 것이 무궁무진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형상을 철폐한다고 우상을 무너뜨리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도는 사랑에 대해 말하다가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말로 서신을 끝내는 것입니까? 사랑과 우상에서 멀리하는 것이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20절을 보면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7:3절에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생이기에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에 관심을 둔 신자라면 자연 영생이신 예수님께 모든 마음이 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영생에 소망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아는데 관심이 가고 힘을 쏟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에 관심이 있다고 하면서 정작 그의 관심은 예수님에게서 멀어진 상태라면 그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입술로는 영생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영생이 없기 때문일 수 있고, 아니면 영생의 길로서 예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힘으로 삼고 관심의 대상으로 되어 있다면 그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우상으로 말미암아 방해받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인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처럼 사도가 서신을 쓰고 있는 것은 신자를 사도들과 사귐에 있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사도와의 사귐은 사도가 알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고 사도가 감사하는 것을 감사하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도는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와의 사귐이 곧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에 함께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신자를 자기와 같은 사귐에 있게 하기 위해 사도가 보고 들은 자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귐을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의 실수나 잘못된 행동이 하나님과의 사귐을 방해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18절의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라는 말씀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범죄치 않는다는 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행위를 가지고 범죄한다 범죄하지 않는다라고 판단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범죄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됨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 잘못한다면 그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알고 어떻게 섬기느냐로 범죄인가 아닌가로 판단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행동을 했다 할지라도 그 잘못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악함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된다면 그는 범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행동이 하나님과의 사귐을 방해한다고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과의 사귐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사도는 우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우상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고 힘으로 삼는 모든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있을 때, 그것은 우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힘으로 삼고 세상을 살고자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을 찾아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나 자신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사실은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이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위치에서 행하는 종교적 의무일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 역시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사귐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돕기 위해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는 교회의 교인으로 의무와 책임을 요구하는 말을 하는 것이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여러분의 우상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역시 내가 의지하고 힘으로 삼고 사랑하는 것이라면 교회가 우상일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무엇보다 피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우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한 내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살피며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앞세워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면 결국 자신이 우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항상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피조물이며 다만 하나님께 복종해야 할 존재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고 잊지 않는 자로 사는 것이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나는 악한 자이며 이런 내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영생을 얻었다’는 것을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내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귐을 위해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상에서 멀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깊이 아는 것입니다. 나의 악함을 알고 구원에 있어서 철저히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이 알아질 때 자연히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살피고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 그것이 우리를 예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상에서 자신을 지켜 멀리하는 것입니다.
돈, 권력, 이것들 자체가 우상인 것은 아닙니다. 돈이 없으면 안된다는 마음으로 돈을 의지하고 돈에 대한 욕심이 마음에 가득할 때 돈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모두가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것도 신자에게는 섬김이나 의지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아가기를 힘쓰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기쁨을 원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마음이 깊이 빠져들수록 내가 의지하고 섬길 분은 하나님 한분뿐이라는 답만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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