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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렘1: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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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13년 2월3일 http://dabia.net/xe/641349 |
정용섭 목사
예레미야의 하나님 경험
예레미야 1:4-10, 주현절후 제4주, 2013년 2월3일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레미야는 구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 중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잘 알려진 선지자입니다. 이사야, 에스겔과 더불어 소위 삼대 대선지자로 불립니다. 그가 선지자로 활동한 시대는 유대의 격변기였습니다. 그의 생애에서 기원전 609년과 587년이 중요합니다. 609년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나름으로 개혁운동에 박차를 가했던 요시야 왕이 죽은 해입니다. 요시야 왕은 외교적 판단을 잘못했습니다. 바벨론과 이집트의 싸움에서 바벨론 편에 서서 이집트 군대와 맞서다가 자신의 꿈을 피워보지 못한 채 전장에서 죽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왕하 23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587년은 요시야의 뒤를 이어 이십여 년 동안 차례대로 왕위에 오른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가 모두 나라를 지키는데 실패하고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유대가 멸망당한 해입니다.
유대의 이 시대는 1910년 한일합방이 이뤄지기 직전 조선 후기 시대와 비슷합니다. 우리도 당시에 러시아, 청, 일본, 미국 등의 열강들 사이에서 마치 고래 싸움터에 낀 새우와 같은 형국이었습니다. 국내외의 아주 복잡한 사건들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지도자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또는 세계역사의 큰 흐름에 휩쓸려 결국 519년 동안 이어지던 이씨조선이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던 수많은 애국지사와 역사학자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한편으로는 절망감과 좌절감이,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겠지요.
예레미야가 처한 상황도 비슷했습니다. 그는 자기 조국 유대가 서서히, 그러나 어떻게 손쓸 여지도 없이 멸망의 길로 빠져드는 상황 앞에서 좌절과 분노에 사로잡혔습니다. 유대 왕과 왕족과 귀족, 그리고 민중들에게 호소하기도 하고, 위협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적대감만 팽배해졌습니다. 예레미야는 옥에 갇히기도 하고, 목숨을 잃을 위기도 여러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줄기차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웬만하면 포기할 만도 한데, 그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초토화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매달렸습니다. 그런 영적인 에너지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요?
말씀의 임재
예레미야의 성격이 원래 끈질겨서 그런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인내심이 유독 강하다고 말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주위에서 아무리 반대를 해도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무조건 자기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돌진하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꾸준하게 성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예언이 잘못된 거 아닌가 하고 회의적으로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는 고집불통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예민해서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그가 예언을 통해서 돈벌이를 한 것일까요? 고대 유대사회에서도 돈을 받고 예언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제사장들도 돈을 받고 제사를 드려주곤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부도덕한 일들을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렘 5:1절은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한 비판입니다.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예레미야의 영혼을 붙든 힘은 여호와의 말씀이었습니다. 본문 4절은 이렇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2b도 그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예레미야가 온갖 시련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은 소명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사명감을 느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이 어려우니까 자기가 나서서 뭔가 일을 해야겠다는 자기 결단이 아닙니다. 사실 소명과 결단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게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걸 경험한 적이 있을지 모릅니다. 해외 선교를 위해서 자기의 삶을 포기하고 지구촌 오지로 떠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누가나 크게 감동을 받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희생적으로 살았던 슈바이처나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거의 성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결단을 일종의 소명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이들의 결단과 성서의 소명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그 말씀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 말씀이 자기의 안일에 위태로운지 아닌지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 선포가 자기 민족을 살리는 길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아주 특별한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만약 그들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의 일반적인 사명감 비슷한 거였다면 그들의 예언이 역사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어떤 힘에 사로잡힌 겁니다. 그래서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도 그랬고, 이사야도 그랬고, 거의 모든 선지자들은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그와 비슷한 현상을 시인들에게서 배웁니다. 사이비가 아닌 진짜 시인들은 자신이 시를 쓴다고 하지 않고 시가 자기에게 왔다고 합니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배가 고파도 시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거겠지요. 모차르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작곡은 기술이 아니라 소리의 존재론적 경험입니다. 자기가 억지로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소리가 자기에게 말을 건네는 걸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이런 표현들이 어떤 분들에게는 별로 실감 있게 전달되지 않을 겁니다. 또는 그들의 경험이 참되다고 하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모두 예레미야처럼 여호와의 말씀이 임재 하는 걸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예레미야처럼 똑같은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에게 일어난 말씀의 임재가 무엇인지는 일단 알아야만 우리가 선지자들의 영성 안으로 좀더 깊이 들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다.
예레미야의 두려움
예레미야가 전해들은 여호와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5) 여호와의 이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는 좀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반응을 보입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6절) 여기서 말할 줄 모른다는 것은 단순히 입담이 좋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즉 예언을 하기에 영적 수준이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너무 어리다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이런 고백은 단순한 겸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일단 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 경험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안다는 뜻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까지 말하곤 합니다. 성서의 사람들은 다 그런 두려움을 경험했습니다. 모세도 자기가 말을 잘 하지 못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 4:10) 사도 바울도 자신이 말을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고후 11:6) 이사야는 자기가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사 6:5).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메시아적 징표를 보고 사람들이 놀라워했다고 보도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든지 아니면 예수를 부정해야만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정하는 쪽을 택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하나님 경험이 두려운 이유는 그것이 완전히 낯선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낯선 분입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을 ‘전적 타자’(ganz Anderer)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그 어떤 존재 유비가 가능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나 어머니와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여기서 경험하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부활을 보십시오. 부활은 이 세상의 생명과 전혀 다른 생명 사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대하는 모든 경험들을 뛰어넘는 종말론적 사건입니다. 부활을 환생이나 재생 비슷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크게 오해하는 겁니다. 부활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결혼하고 자식 낳고 배부르게 먹고 칭찬 듣는 식으로 삶이 유지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부활을 모르는 겁니다. 부활 경험은 전혀 낯선 겁니다. 밤하늘의 은하수를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심정입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그걸 감당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어립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낯선 하나님을 당시 국내외 정치적 현안에서 경험했습니다. 그가 전해야 할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이 듣고 싶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더 나가서 당시 근동 지방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이집트, 아시리아, 바벨론 제국이 듣고 싶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모든 나라는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역사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나갑니다. 예레미야는 그 역사의 그 신비한 차원을 들여다 본 것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선포하면 미쳤다는 말을 듣기 좋습니다. 당시 유대민족으로부터는 반역자라는 소리까지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향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계속해서 예언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할 정도였습니다. 예레미야는 가능한 예언활동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피곤하기도 했겠지요. 자기는 할 만큼 했고, 모든 책임은 유대 민족이 져야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처형이 임박할 때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두려워하지 말라
예레미야는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듣습니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8절)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는 그 약속이 그에게는 사실 족쇄였습니다. 그는 그 말씀으로 인해서 선지자 활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본문은 더 실감 있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시고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진술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바로 여호와의 말씀 자체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아주 구체적인 말씀을 주십니다. 예레미야를 세워서 여러 나라와 왕국을 세우기도 하고 넘어뜨리게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멋지게 들리지만 예레미야가 감당하기 힘든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백척간두에 올라선 것과 비슷합니다. 뒤로 물러설 수도 없고 앞으로 나가기도 겁이 납니다.
이런 상황이 어떤지 실감하실 수 있나요? 살인 사건이 다루어지고 있는 법정을 생각해보십시오. 검사는 피의자를 실제 살인범이라고 논고를 폅니다. 피의자는 억울하다고 호소합니다. 양쪽 주장이 엇비슷하게 일리가 있습니다. 양심적인 판사라고 한다면 이런 상황이 두려울 겁니다. 자신의 선고에 따라서 한 사람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자신의 판단에 실수가 없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니까요.
예레미야가 처한 상황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를 비판하는 소리가 주변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왕과 관료들도 자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냐 선지자는 자기와 완전히 다른 예언을 합니다. 하나냐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치시고 유대 민족을 곧 해방시킬 것이라고 유대민족을 위로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대 민족이 완전히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사람들이 누구의 말에 더 솔깃해했을지 분명합니다. 자기 민족들이 듣기 싫어하는 내용을 예언해야 할 예레미야의 심정이 어땠을지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그래도 그는 자기의 생각을 꾸준히 밀고 나갔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을 입에 붙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여호와의 말씀이 곧 예레미야의 하나님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거기에만 영혼을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오늘 정작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다음의 사실입니다. 예레미야의 영혼을 사로잡은 여호와의 말씀은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레미야의 입에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보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헛된 소문으로 불안해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영혼을 담대하게 할 것입니다. 죽음까지도 극복하게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희망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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