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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831 추천 수 0 2013.03.04 18:2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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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10:8-13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3년 2월17일 http://dabia.net/xe/644648 

jys.jpg 정용섭 목사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8-13, 사순절 제1주, 2013년 2월17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구원을 받으리라.”는 오늘 설교 제목이 새롭게 느껴지는지요? 아니면 너무 흔하게 들어서 아무런 느낌도 없으신가요? 구원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구원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기독교만의 관심 사항은 아닙니다. 다른 종교들도 구원을 목표로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위는 기본적으로 구원론적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구원론적입니다. 돈이 있어야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예술도 구원을 목표로 합니다. 사람들은 예술 행위를 통해서 어떤 궁극적인 기쁨과 자유를 맛보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다 구원의 속성들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이런 것들과 어떻게 구별될까요?


오늘 설교 제목은 롬 10:13절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겁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구절은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이 직접 한 게 아니라 구약 요엘 2:32절에서 인용한 겁니다. 바울은 요엘만이 아니라 신명기와 이사야도 인용했습니다. 8절에서 13절까지 아주 짧은 구절에서 바울은 세 군데의 구약성서를 인용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 바울은 구약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과 구원을 주제로 논쟁을 벌이는 중입니다. 이 논쟁을 효과 있게 하려면 당연히 그들이 잘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 것을 근거로 제시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약을 집중적으로 인용했습니다. 지금 바울과 논쟁하고 있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명확합니다. 율법 완수가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알고 율법을 실천하는 유대인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자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크게 보면 구약성경 전체가 율법이고, 좀더 좁히면 창세기부터 시작되는 모세 오경이 율법입니다. 더 압축하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입니다. 모세는 그 십계명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이 종교생활과 일상생활 전반에서 지켜야 할 법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즉 바빌로니아에 하무라비 법전이 있었듯이 유대인들에게도 모세 법전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율법입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것을 이 율법에 따랐습니다. 성전에서 행하는 종교의식으로부터 시작해서 사회의 질서를 세우는 일도 다 율법을 따랐습니다. 심지어 음식 규정도 거기에 포함됩니다. 깨끗한 먹을거리와 더러운 먹을거리를 구별해야 합니다. 돼지고기는 먹을 수 없었습니다. 성윤리에 대한 가르침도 들어 있습니다. 성폭력에 대한 처리 방식도 나옵니다.


율법을 실천함으로써 구원받는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상식적으로 옳습니다. 요즘 식으로 바꿔 말하면 ‘법대로 합시다.’와 똑같습니다. 법을 지켜야 사회가 건강하게 돌아갑니다. 보십시오. 자동차 통행이 잦은 사거리에 신호등이 없거나 운전자들이 신호등을 무시한다면 사거리는 아수라장이 될 겁니다. 학교생활도 그렇습니다. 학생들은 정한 날과 시간에 학교에 나와서 공부해야 하고, 선생들은 자기가 맡은 수업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그게 학교 규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그걸 바르게 실천하면 의로워지고 구원받는다고 믿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그걸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이런 전통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보통 수준의 유대인이 아니라 율법 근본주의자로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주의의 근본적인 한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두 가지 한계가 있습니다. 로마서 앞부분에 나오는 설명입니다. 첫째,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완전하게 지킬 수 없는 법은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볼까요? 수능이나 임용고사를 생각해보십시오. 법에 따라서 합격하는 학생이 있고, 떨어지는 학생이 있습니다. 모두를 살리지 못합니다. 시험제도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는 겁니다. 한계가 있는 것으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둘째, 율법은 사람을 위선적으로 만듭니다. 자기에게 불가능한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이 위선입니다. 눅 18:9절 이하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기도 중에 자기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그 모든 내용이 율법을 기준으로 한 겁니다. 세리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는 말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 결국 율법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법과 제도로도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절망하거나 위선적으로 됩니다. 그걸 여러분도 실제 삶에서 경험하실 겁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뒤에 전혀 새로운 차원의 구원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구원의 길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온갖 종류의 규범과 규칙을 죽을 때까지 지키는 율법의 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의 길입니다. 이 두 가지는 완전히 반대 되는 길입니다. 전자는 업적의(義)이고, 후자는 칭의(稱義)입니다. 전자는 행함을 통한 구원이고, 후자는 믿음을 통한 구원입니다. 전자는 혼신의 노력이 필요한 길이고, 후자는 그런 노력을 포기하는 길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의 길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좀 놀랍지요? 이상하지요? 사람들은 오히려 힘든 율법의 길을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길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 새벽부터 밤늦도록 직장에 충실하면서 높은 연봉을 받는 젊은이가 있고, 또 별로 열심히 일하지도 않고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젊은이가 있다고 합시다. 누구에게 더 신뢰가 갑니까? 많은 수고를 하고 높은 연봉을 받는 젊은이입니다. 유대인들의 입장도 바로 그와 같습니다. 율법도 지키지 않고 단순히 예수를 믿는 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바울의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일리가 있는 반론입니다. 제가 당시의 유대인이었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자칫하면 믿음을 통한 구원이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소위 값싼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전혀 없으면서 말로만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값싼 은혜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본회퍼는 독일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비판했습니다. 히틀러 나치의 광기 앞에서 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구원받았다고 자기만족에 빠지면 되냐는 비판입니다. 군사독재와 자본주의의 광기 앞에서 철저하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기복신앙과 내세신앙에 떨어졌던 지난 70년대와 80년대 한국기독교도, 사실은 지금도 비슷하지만,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칭의론은 값싼 은혜가 아니라 값비싼 은혜입니다. 칭의가 값비싼 이유는 사람의 업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보다 더 비싼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율법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이 우리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이런 주장을 믿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이 사실을 실질적으로 깨달으며, 일상에서 깊이 느끼고 사는 사람은 드뭅니다. 왜냐하면 이런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고유한 영적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장사꾼이 한 알만 먹으면 일주일 동안 목마르지 않는 약을 팔고 있었습니다. 어린왕자는 왜 이런 약을 먹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장사꾼은 시간을 아낄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합니다. 전문가의 연구에 의하면 일주일에 53분을 절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절약한 53분 동안 사람들은 무얼 하느냐는 왕자의 질문에 장사꾼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한다고 대답합니다. 어린왕자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기 같으면 남는 53분으로 맑은 물이 나오는 샘으로 천천히 걸어가겠다고 말입니다. 재미있지요? 약을 먹고 남은 53분으로 어른들은 돈을 벌거나 티브이를 보겠지만 어린왕자는 샘물로 걸어갑니다. 아예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무엇을 위해서 시간을 절약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시각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문제에서 전혀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율법적인 수고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왕자가 샘물로 걸어가듯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적인 샘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됐습니다. 그게 믿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생각이 이미 구약 선지자들에 의해서 선포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요엘을 비롯해서 신명기와 이사야를 인용했습니다. 바울이 구약을 인용했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당장 수긍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생각을 바꾸기는 정말 힘들기 때문입니다. 힘든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은 율법의 실천이라는 유대인들의 주장과 복음을 믿는다는 바울의 주장 중에서 어느 쪽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물론 바울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주장은 완전히 틀린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실정법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유대인들의 율법실천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울의 주장이, 그의 가르침이, 즉 믿음의 길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만 본다면 율법 실천이 더 옳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바울과 더불어서 믿음의 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다음의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기본적으로 종말의 차원에 속합니다. 종말은 보통 마지막의 때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일 뿐만 아니라 시작이기도 합니다. 낡은 세계로는 마지막이지만 새로운 세계로는 시작입니다. 종말은 궁극적인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때를 가리킵니다. 절대적인 사건입니다.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생명은 이 세상의 삶을 확대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즉 율법으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평균 수명이 100살 늘어난다고 해도 궁극적인 생명을 얻는 게 아닙니다. 율법이 완전하게 실현되는 수도원 공동체 안에 들어간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오늘 본문 9절과 10절과 13절에서 반복된 구원은 지금 실현되는 게 아니라 종말에 완성됩니다.


종말에 완성될 궁극적인 생명은 부활입니다. 그 부활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 안에 선취되었습니다. 부활은 역사 이후, 역사 너머의 생명인데, 그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 생명의 토대입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종말에 일어날 궁극적인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학적인 고행이나 자기만족적인 실천이 아니라 순전한 믿음입니다. 믿음에는 그 어떤 것도 부가적으로 필요한 게 없습니다.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구원을 대신할 수 있는 게 우리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종말론적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로만 주어질 뿐입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던 바울은 유대교 및 이와 근사한 유대 기독교와 치열하게 투쟁했습니다. 이런 투쟁의 흔적이 바로 오늘 본문인 로마서에 널려 있습니다. 이런 신앙 선배들의 투쟁 덕분으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복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것을 바울은 신명기를 인용하면서 전형적인 어투로 표현했습니다. 입으로 주를 시인하며, 마음으로 믿는다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9-10절에 반복되어 있습니다. 9절은 이렇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서 예수를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세례의식을 가리킵니다. 또 예배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합니다. 구원 문제에서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입니다. 종말생명을 희망하는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에 참여해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종말의 구원을 약속으로 받은 사람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예배를 드린다고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기독교 영성이 무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형식적인 예배에 머물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믿는 단계로 나갑니다. 입으로 하는 시인과 마음으로 하는 믿음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런 믿음으로 공동체를 이룹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에 근거한 유대의 회당공동체가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기독교의 교회공동체를 통해서 구원을 약속으로 받게 되었다고 과감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선포가 옳다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와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종말론적 구원에 신비한 방식으로 참여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요엘 선지자의 말씀은 복음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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