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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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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2013.2.10 주일설교 http://charmsarang.onmam.com/ |
진정한 행복을 얻는 길 마5:1-12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하며,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시인 Carl Busse는 행복을 찾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산 너머 고개 너머 먼 하늘에
행복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아, 나는 남 따라 찾아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돌아왔다네
산 너머 고개 너머 더욱 더 멀리
행복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
사람들은 누구나 이렇게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행복을 찾았다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단지 더 먼 곳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행복을 찾으려고 더 노력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떨까요?
최근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이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우리나라 국민행복점수가 61.4로 나왔다고 합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조사한 결과는 68.1점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국민들은 스스로 별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맹렬히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행복을 찾은 사람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열심히 행복을 찾으면서도 행복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행복을 찾는 방법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헛된 것에서, 그리고 죄악된 방법으로 행복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을 얻기 못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행복을 찾기 원한다면 지금까지의 잘못된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이 말씀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천국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천국의 기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예수님께서는 마5:3-12에서 우리가 찾는 진정한 행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3절은 팔복의 열쇠가 되는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3절)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영적인 가난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니 내 안에는 심판 받을 죄밖에 없고, 내놓을 만한 의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내놓을만한 것도 없고 하나님께 드릴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기도와 전도, 헌금, 봉사 등이 나의 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되고 겸손해집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주인이 아니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가난한 상태, 즉 심령의 가난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자신의 죄와 무능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날마다 바라보며 사죄의 은총을 감사하며 사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마음은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열망이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한순간도 살 수 없겠다는 절박감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절실히 깨닫고, 내 안에 온갖 추악한 죄가 가득한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애통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 죄를 내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확인할 때 우리는 애통하게 됩니다. 내가 도저히 죄를 이길 수 없고, 그 죄 때문에 소망이 없게 된 것을 자각할 때 우리는 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애통하는 자라야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온유한 자가 되어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자기의 행위와 의는 걸레조각과 같고, 자신의 마음은 죄로 심히 부패해 있는 것을 알게 되어 애통해 합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불의와 불법, 죄와 허물을 솔직히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되면 더 이상 교만하거나 다른 사람을 공격할 수 없게 됩니다. 진실로 마음이 겸허해지고 낮아져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나에게는 소망이 없음을 절감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유명한 강해 설교가인 데니스 레인은 “온유란 거인의 손 안에 있는 갓난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온유한 자말로 진정으로 강한 자라는 뜻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어떻게 강한 사람일 수 있을까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절실히 깨달은 사람은 이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이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깨어져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온유한 자야말로 가장 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자신에게서 의로운 것이나 선한 것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소망이 없다고 잘감하게 된 사람은 하나님께로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기를 갈망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모든 죄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욕구를 의미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죄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보좌 앞에서 밀려난 것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며, 죄를 지으려는 욕망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죄의 오염으로부터 구출되기를 갈망하는데, 이렇게 됨으로써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더 나아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곧 성화에 대한 강한 갈망이기도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이 의를 발견하고 찾는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예배와 말씀묵상, 기도, 경건의 생활을 사모하고 힘씁니다.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즉시 만족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더욱 더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게 되며, 더 풍성하게 채우심을 받습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107:9).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것, 동정, 자격 없는 자들이나 죄가 있는 자들에 대한 연민입니다. 그것은 죄의 비참한 결과를 보고서 불쌍히 여기며 그 고통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값없고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바로 그 사람이 긍휼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보았을 때 제사장이나 레위인도 동정심이나 측은한 마음을 가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불쌍히 여겨 상처를 싸매주고 여관에 데리고 가서 보살펴 주었으며, 비용을 내어서 치료를 부탁하고 갔습니다. 이 사람이 보여준 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긍휼이란 단순히 동정이나 측은한 감정이 아니라, 그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일과 이익을 잊어버리고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을 긍휼히 여기면 자신이 행복해집니다. 어느 부인이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저는 올해 예순 다섯입니다. 아이들은 모두 출가했고 남편도 죽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입니다.” 목사님은 이 부인에게 자신의 신앙과 소유를 주위 사람들과 나누는 법을 찾아보라고 권했습니다. 몇 주 후 그 부인에게서 이런 편지가 왔습니다. “저는 동네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웃과 나누는 데서 새로운 기쁨과 행복을 찾았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한 번 이 맛을 경험한 사람들은 긍휼 베푸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긍휼이 얼마나 크고 풍성한가를 더욱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은 심판 날에 긍휼히 여기심을 받게 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3)
마음이 청결해야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위선이 없고 온전하다’, ‘아무것도 숨김없이 열려 있다’, ‘신실하다,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청결은 일편단심으로 곁눈 팔지 않는 전심이며, 일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고, 정화되고 흠이 없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아무런 거짓도 찾아 볼 수 없으며, 완전하고 흠 없이 순결하고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 최고의 목표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 되는 마음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가까이 갈 수 없는 죄인들이므로 영광중에 계시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타락한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은 굉장히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볼 수 없으며, 죄인의 신분으로 영광중에 계시는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뜻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마음이 전달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화평케 하는 사람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 화평한 자이며,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는 것을 가장 우선적인 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화평을 이룹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다음과 같이 근본적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첫째, 화평케 하는 사람은 자아에 대하여 전혀 새로운 견해를 가지게 된 사람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하며, 자아와 이기심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일에 대하여 생각할 때 그것이 나에게 어떤 결과를 미칠까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만사를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에게 공평한가? 나는 나의 권리와 몫을 받고 있는가? 다른 사람을 섬기려 하지 않고 만사를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봅니다. 그 결과 다툼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사람은 자기를 버린 사람, 즉 온유한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둘째, 화평케 하는 사람은 자기에 대해서 전혀 새로운 견해를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전혀 새로운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고 섬기며, 다른 사람들이 공격해오거나 비난할 때 함께 싸우지 말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종이 되어야 하며 낮아져서 섬길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화평케 하는 자가 됩니다.
셋째, 화평케 하는 사람은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관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나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는 이 일을 위해서 고난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화평케 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평강의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복종하는 여기에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되어야
주님께서는 세상이 주님을 미워했기 때문에 우리도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핍박을 받을 때 우리는 왜 기뻐해야 할까요? 어떻게 핍박 중에 기뻐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님께서 우리가 당하는 핍박까지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핍박을 당할 때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위해 핍박 받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제자요, 천국 시민임을 증명하기 때문에 기뻐해야 합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고난을 통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연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당한 성도는 믿음이 성숙되고 신앙이 깊어지며 견고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 핍박과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분명하게 나타낼 기회이기 때문에 기뻐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핍박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과 의를 지키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핍박 받는 것은 천국에서 넘치도록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고난을 장차 천국에서 받을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지키기 위해 당하는 고난과 핍박을 기뻐하며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핍박을 당하는 것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하나님 백성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줍니다. 당신은 얼마나 자주 천국을 생각하며 사십니까? 천국을 생각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당신의 삶을 좌우하고 있습니까? “기뻐하라. 천국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천국 때문에 관대하며, 핍박을 참으며, 기쁨으로 이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맹렬하게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진정 행복을 찾았다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데서, 잘못된 방법으로 행복을 찾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팔복의 말씀을 기억하고 살아감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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