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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예언을 주의하십시오

에스겔 이한규 목사............... 조회 수 1974 추천 수 0 2013.03.05 17: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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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겔13:17-23 
설교자 : 이한규 목사 
참고 : http://www.john316.or.kr 

거짓 예언을 주의하십시오 (에스겔 13장 17-23절)

 

< 예언에서 경계해야 할 것 >

 요새 점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점 카페도 등장했습니다. 강남 곳곳에 포진한 나이 30도 안 된 처녀도사에게 정치인, 경제인, 연예인들이 찾아가고, 심지어는 첨단 기술의 벤처 사업가들도 그런 점집을 찾고 있습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도 점쟁이들이 판치고 있고, 중국인들은 80% 이상이 회사 경영을 놓고 점을 친다고 합니다. 일전에 한 경영 컨설턴트가 말했습니다. “전문가의 충고보다 점쟁이 말을 더 믿으면 기업은 망합니다.”

 점은 틀릴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한국 사회에서는 책임을 잘 묻지 않으니까 점쟁이에게는 그처럼 좋은 꽃놀이패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점과 예언은 같지 않습니까? 성경도 예언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물론 성경은 예언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거짓 예언도 있음을 무수히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예언 문제에서 다음의 3가지를 경계하십시오.

 첫째, 호기심의 충족 및 기복적인 목적의 예언을 경계하십시오. 그러므로 이런 예언을 멀리하십시오. “자녀가 경기도 소재 대학에 지원하면 합격합니다. 물과 관련된 장사를 피하십시오.” 예언은 단순히 미래를 점치는 수단이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예언은 사생활과 관련된 예언은 거의 없고 대부분 하나님의 전체 역사와 관련된 예언입니다. 예언은 본질적으로 신앙에 도움을 주고 미래에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밝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둘째, 일시를 확정하며 예언하는 것을 경계하십시오. 성경에는 일시를 확정한 예언이 없습니다. 예언은 미래에 일어날 정확한 사건 시간표를 만들어 믿음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기에 너희는 알 바가 아니라.”고 했습니다(행 1:7).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도 미래를 정확하게 알게 하는 특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셋째, 저주하는 식의 예언을 경계하십시오. 나쁜 종교인들은 영혼을 자기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하려고 무속적인 저주를 퍼붓습니다.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3대가 줄초상 날 거야.” 오늘날이 은혜 시대이기에 망정이지 구약 시대에는 그런 말을 하는 점쟁이들은 당장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성경적인 참된 예언은 본질적으로 사람을 세워주는 것이기에 언약의 성취 및 복음을 내포해야 합니다.

 사람의 영혼이 약하기에 점을 추구하려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래도 점쟁이를 찾지 말고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성경적인 예언은 미래를 점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나친 호기심과 영적인 교만과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헛된 예언에 빠지지 마십시오. 본문은 잘못된 예언을 엄중히 경고하는 본문입니다.

< 거짓 예언을 주의하십시오 >

 어느 날, 에스겔은 자기 맘대로 예언을 남발해 백성들의 영혼을 빼앗는 거짓 여선지자들에게 경고하라는 말씀을 받습니다(17절). 어떤 경고입니까?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려고 손목마다 부적을 꿰어 매고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수건을 만드는 여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은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는 영혼을 살리려 하느냐.”  

 당시 거짓 여선지자는 영혼을 사냥하려고 예언을 했습니다. 결국 헛된 예언에 넘어가는 것은 호구로 들어가고 사탄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미래를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미래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잘못된 예언에 끌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최대의 교만한 행위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거짓 예언을 남발하는 것도 큰 잘못이지만 거짓 예언을 듣기 좋아하는 것도 큰 잘못입니다.

 점쟁이가 정말 용하다면 당장 로또부터 다 맞추어 돈을 쓸어가며 순식간에 세상을 그들 세상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시간 앞도 못 맞춥니다. 그들은 항변할지 모릅니다. “한 시간 앞은 못 맞춰도 1년 후의 일은 대충 맞춥니다.” 그 대충 맞춘다는 주장과 예언이라면서 애매하게 말하는 언사가 문제입니다.

 매년 초 점쟁이들이 말합니다. “금년에는 북쪽 땅에서 유명한 인사가 죽습니다.” 2010년에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해 김정일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점쟁이들은 자기가 맞췄다고 했습니다. 그런 애매한 점을 매년 초에 내놓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해석하며 맞췄다고 주장하면 누가 그런 예언을 못합니까? 딱 봐도 영혼을 사냥하기 위한 말임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아직도 그런 애매한 언사를 들으려고 돈을 싸들고 점집을 찾아 사냥감이 되려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당시 거짓 여선지자들이 어떻게 점을 쳤습니까? 손목마다 부적을 꿰어 매고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에 수건을 씌워 점을 듣게 해서 세뇌를 시켰습니다. 그렇게 신비한 척 하면서 영혼을 사냥하고 자기는 살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왜 화가 있습니까? 거짓 여선지자들은 점을 쳐주고 두어 움큼의 보리와 두어 조각의 떡을 받았는데 그런 하찮은 재물을 얻으려고 거짓 점을 쳐주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했기 때문입니다(19절).

 거짓 예언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입니다. 특히 돈과 먹을 것을 얻으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파는 것은 하나님께 큰 모욕죄가 됩니다. 어떤 이유든지 간에 은혜와 축복을 내세워 돈을 요구하면 잘못입니다. ‘돈 신’을 숭배하면 진짜 행복을 잃기에 말씀을 통해 ‘돈 신’을 극복하도록 끊임없이 나눔을 도전해야 하지만 돈과 복을 목적으로 말씀을 전하거나 말씀을 듣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거나 은혜를 약속하며 돈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짓 여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하며 사리사욕을 챙겼습니다. 그런 거짓 예언들은 아예 듣지도 않음으로 자기 영혼을 스스로 지켜야 하는데 그런 헛된 예언에 빠지는 성도도 많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선택된 영혼을 끝까지 지켜주십니다. 그래서 거짓 여선지자들은 손목에 맨 부적으로 거짓 예언을 하며 새를 사냥하듯 영혼들을 사냥했지만 하나님이 그 부적을 팔에서 떼어 새처럼 사냥한 영혼들을 놓아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20절).

 또한 머리에 씌운 수건을 찢고 선택된 백성들을 거짓 여선지자의 손에서 건지고 다시는 사냥물이 되지 않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21절). 그처럼 하나님은 선택된 백성들이 당하는 것을 그냥 지켜보시지 않고 살 길을 열어주십니다. 반면에 의인을 근심하게 하고 악인의 회개를 막는 거짓 여선지자는 무섭게 심판해서 다시는 허탄한 묵시를 보지 못하고 점복도 못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22-23절).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녀가 거짓 예언에 빠져도 그의 구원을 잃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주의로 당하는 고난과 정신적인 고통까지는 면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점은 아예 처음부터 가까이 하지 말고 늘 말씀과 약속을 붙잡고 사십시오. “그저 심심풀이로 점 한 번 쳐볼까?”라고 하면서 점집을 찾는 것과 같은 영적인 부주의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잊지 마십시오.

< 영적인 부주의를 주의하십시오 >

 어느 날, 한 교회에서 수요 예배 후에 목사님이 강대상 앞에서 귀신 들린 자매를 대상으로 축귀를 했습니다. 목사님이 소리쳤습니다. “악한 귀신아! 썩 물러가라!” 성도들도 뒤에서 같이 기도했습니다. 그 의식이 끝나고 “축귀를 했다!”고 자축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묘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축귀 후에 일부 성도들이 불안해하며 생각했습니다. “그 축출된 귀신이 내게 들어오면 어떡하나?” 그처럼 성도 중에는 마음이 심약해서 귀신 얘기에 영향을 잘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축귀 현장에 안 가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날 많은 목사님들이 축귀 전문가가 아니면서도 사람과 장소에 대한 사려도 없이 아무 때나 축귀를 합니다. 축귀를 못하면 영성이 없는 목사처럼 여기는 분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축귀는 축귀를 연구하고 다양한 경험이 있는 축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쪽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과 연구와 경험이 적다고 해서 결코 영성이 없는 목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영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싫어서 함부로 축귀를 시행하는 목사가 돌팔이 축귀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기는 부작용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느 날, 같은 교회에 다니는 4명의 집사가 한 축귀 집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3명은 문제없이 돌아왔는데 1명이 갔다 와서 완전히 미쳤습니다. 지금은 거의 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같이 갔던 교인들이 의문을 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 집사를 지켜주시지 않았을까? 성도는 사탄이 침범하지 못할 텐데 왜 성도가 집회에 가서 귀신들려 저렇게 폐인이 되었을까? 하나님은 정말 사랑의 하나님인가?”

 그 의문을 공개적으로 제기하면 믿음 없는 모습이라고 할까봐 감추고 있었지만 그 의문은 계속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집회에 가서 미치게 된 것에 대해 자신의 부주의를 탓해야지 하나님의 사랑 없음을 탓하면 안 됩니다. 자신의 부주의로 사고를 당해 죽거나 미치는 것까지 하나님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묻습니다. “목사님! 예수 믿는 사람이 귀신 들릴 수 있습니까?” 어려운 질문입니다. “귀신들릴 수 있다!”고 해도 모순점이 있고 “귀신들릴 수 없다!”고 해도 모순점이 있습니다. 그런 앞뒤가 막힌 질문으로 목회자를 곤란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그런 질문으로 남을 골탕 먹이는 것도 주의해야 하지만 그런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가진 것처럼 자만해도 안 됩니다. 목회를 해보니까 그런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잘 들었다고 해서 신앙이 신실해지고 성숙해지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정확한 진리라고 내세우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제 생각을 말하면 이렇습니다. 저는 예수 믿는 사람도 귀신 들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약하면 얼마든지 귀신들릴 수 있고 미칠 수도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 말은 예수 믿는 사람도 죽을병에 걸릴 수 있고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다는 것과 논리상으로는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어떤 것도 범접할 수 없는 강철 인생이나 강철 영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태도는 아무리 귀신이 횡행해도 귀신 들리지 않고 귀신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도 없이 귀신의 영향을 유난히 많이 받는 영혼이 귀신 얘기를 자주 하는 곳에 가서 귀신 들리는 것은 본인의 부주의 때문이지 하나님의 책임은 아닙니다. 본인이 부주의하게 운전하고서 “하나님! 왜 성도에게 이런 교통사고를 주십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입니까?

 성도 중에는 귀신 얘기에 특별히 약한 성도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떤 약점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약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성이 약점입니다. 어떤 사람은 도박이 약점입니다. 그처럼 어떤 사람은 공포심이 많은 것이 약점입니다. 그런 사람은 축귀 장소에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본인의 약점도 생각하지 않고 부주의하게 그런 곳에 가서 오히려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수련회도 가려서 보내야 합니까? 영성 수련회에 공포심이 많은 영혼이 가서 미쳐서 돌아올 때도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MBC 신우회 지도목사로 있을 때 한 회원 집사님은 고등학생 딸이 수련회 갔다가 미친 상태로 돌아와서 수련회 보낸 것을 땅을 치고 후회했습니다. 그 딸이 지금은 30대 후반입니다. 20년을 정신 나간 딸을 돌보며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처럼 예언, 종말, 은사 등을 강조하는 영성 수련회에 심약한 사람이 가면 정신이 이상해질 수도 있기에 자녀들의 성향을 잘 고려해서 적합한 수련회로 보내야 합니다.

 어느 날, 겁이 유난히 많은 저의 첫째 딸이 학교에서 틀어주는 공포영화를 보고 한 동안 엘리베이터도 못 탔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공포영화를 보면 안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공포영화를 보고 공포심을 가졌다가도 2-3일이면 다 잊고 정상생활을 하지만 심약한 영혼은 공포영화를 보면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그런 사람은 공포영화를 보지도 말고 공포 얘기를 듣는 곳으로 가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부모가 사려 깊게 자녀를 이끌지 않으면 자녀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귀신에 사로잡힌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 미래의 약속을 붙잡으십시오 >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과 공포를 주는 거짓 예언을 한번 잘못 들으면 자칫 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가 들어야 할 예언은 바로 이런 예언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뜻대로 이 시간에 예언합니다. “여러분! 항상 하나님을 꼭 붙잡고 살면 여러분의 미래는 찬란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나가면 우리 분당 샛별교회에 예수 믿고 인물 되는 역사의 주인공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평범하지만 얼마나 확실한 예언입니까? 참된 성경적인 예언은 바로 그런 예언입니다. 이제 헛된 무속적인 예언을 좇아서 폐인의 길을 자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앞날을 계획하실 때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만남을 통해 최적의 열린 문으로 들어가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즉 승진 문제, 성공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 등에서 “이제 됐다!”고 하실 복된 앞날을 이미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때까지 여러 아픔과 시련의 과정을 거치지만 때가 되면 “이제 됐다! 이제 내가 네 꿈을 이뤄 주리라! 네가 지금 상황을 극복하게 하리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처럼 성공으로 가는 길에는 대개 수많은 실패와 거절의 길을 거칩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이 실패와 거절로 인해 좌절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했는데 실패하고 열심히 기도했는데 꿈을 이루지 못하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정말 내 앞날에 찬란한 비전이 이뤄질 꿈같은 날이 올까?” 그처럼 실패 때문에 생각이 약해지지 말고 오히려 실패하면 성공의 문으로 한 걸음 더 전진했다고 믿으십시오.

 살면서 “예스!”의 때가 오기 전에 10번의 “노!”의 과정을 거칠 수 있습니다. 그 경우에 한번 실패했다면 성공으로 가는 길에서 9번의 실패만 남게 되고 두 번 실패했다면 성공으로 가는 길에서 8번의 실패만 남으면서 그만큼 성공이 가까워지는 셈이 됩니다. 그러므로 실패하면 낙심할 때가 아니고 그때가 오히려 용기를 내고 일어설 때입니다. 실패와 시련의 시험 앞에서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나 시험을 통과하면 더욱 복된 미래가 펼쳐질 것입니다.

 어느 날, 한 회사에서 한 실장이 퇴직했습니다. 그때 A매니저가 다른 두 명과 함께 승진 후보에 올랐습니다. 그는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오랫동안 회사를 위해 일했습니다. 그러나 실장 자리는 더 젊고 경험이 없는 사람이 차지했습니다. 그는 잠깐 마음이 상했지만 조만간 자기 때도 올 것을 믿고 계속해서 회사를 위해 충성했습니다. 그리고 2년 후 부사장이 퇴직할 때는 그가 그 부사장 자리에 발탁되었습니다.

 A매니저처럼 현재 자신이 거절당한 위치에 있을 수 있습니다. 승진에서 제외되고, 사업은 안 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때 낙심하지 말고 찬란한 꿈을 품고 다시 일어나십시오. 그때 답답하다고 점쟁이를 찾지 말고 찬란한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믿음의 고백을 하십시오. “이제 내 때가 온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나가면 조만간 거룩한 커넥션이 이뤄지고, 치유도 임하고, 하나님의 은혜도 넘치게 될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첫째 사업에서는 90%가 실패하지만 둘째 사업에서는 90%가 성공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첫째 사업에서 실패한 사람의 80%가 둘째 사업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번의 실패를 통해 성공으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갔다고 여겨야 되는데 한 번의 실패로 두 번째도 실패할 것으로 여기고 80%가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기에 결국 최종적인 사업 성공률은 전체 사업자의 대략 4분의 1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비전 성취를 위해 5번의 만남을 계획하셨을 때 한 번의 만남에서 실패하면 앞으로 3번의 실패만 남았기에 그만큼 비전 성취가 가까워진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한 번 실패했어도 새로 누군가를 만나서 3번의 실패 과정을 하루라도 빨리 겪는 것이 좋은데 새로운 만남을 주저하다가 1년 걸릴 비전성취를 20년 걸리게 할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실패했어도 포기하지 말고 미래의 약속을 붙잡고 계속 시도하십시오. 한 번 더 시도하는 것이 백번 더 점을 치는 것보다 낫습니다.

 어느 날, 작은 사업에서 성공한 한 사람이 사업을 크게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시설과 시스템을 갖추려면 대출이 필요해서 거래은행을 찾아갔습니다. 그 은행은 그가 성실한 거래자이고 작은 사업에서 성공한 것도 알았지만 말했습니다. “고객님! 아이디어는 좋지만 저희 대출 분야와는 다른 것 같습니다.” 첫째 시도가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은행을 찾아갔는데 거기서도 말했습니다. “훌륭한 아이디어지만 우리는 그쪽 대출 상품이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31개 은행으로부터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 자기 계획을 포기하지만 그는 그 꿈이 하나님이 주신 꿈이기에 반드시 이뤄진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거절을 성취를 위해 한 발자국 더 전진한 것으로 여기고 계속 만남을 시도해서 마침내 32번째 은행이 그의 사업제안을 받아들이고 대출을 해주었습니다. 그의 꿈과 비전이 32번째에 꽃필 때까지 31번의 거절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이제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때 헛된 예언과 점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성공하려면 몇 번의 거절과정도 있다고 믿고 하나님이 마음속에 두신 찬란한 약속을 붙잡으십시오. 이번에 새로 시도하면 그 시도가 성취를 가져다줄 수 있고 이번에 새로 누군가를 만나면 그가 비전성취를 위한 거룩한 커넥션이 되어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헛된 예언을 추구하지 말고 자신 안에 두신 하나님의 찬란한 꿈을 품고 약속을 붙잡고 나가십시오.

 어떤 사람은 제게 말합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네트영어의 비전을 가지는 것이 과연 격이 맞을까요? 평생 학원계를 전전한 사람도 못하는 일을 목회자가 하겠다면 누가 그 비전을 믿어줄까요?” 어떤 때는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애정을 가지고 염려해줍니다. 그 염려해주는 마음이 고맙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억제가 되지 않고 포기가 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비전의 불꽃이 꺼지지 않는 것을 어떡합니까?

 반면에 어떤 분은 말해줍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이 가진 네트영어의 비전이 하나님이 주신 비전임을 믿습니다. 목사님의 말이나 화려한 비전제시를 통해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의 지나온 삶과 열매를 보면 믿어집니다. <성경 전권파일의 비전>을 따라 정말로 차곡차곡 그 비전을 이뤄가는 목사님을 보면 결코 허튼 비전을 내세울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얼마나 힘이 나는지 모릅니다.

 이제 현실에 갇히지도 말고 비현실적인 꿈과 예언에 집착하지도 마십시오. 왜 사업을 위해 강남의 유명한 점집을 찾습니까? 차라리 그 시간에 최선의 땀을 흘리십시오. 한 번 더 시도하고 한 번 더 만나십시오. 그 한 번의 시도가 찬란한 비전 성취의 계기가 되고 그 한 번의 만남이 최상의 거룩한 커넥션이 될지 누가 압니까? 지금 자신이 가진 물질을 의미 있게 쓰고 싶은 사람이 어딘가에 예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들과 만나 거룩한 불꽃이 점화되면 지금부터라도 얼마든지 놀라운 일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한 표 차이로 역사적인 중요한 의결이 이뤄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더 시도하는 것은 한 표 더 얻는 것보다 더욱 복된 삶의 계기가 될 때가 많습니다. 이제 자꾸만 헛된 점과 예언의 의지해서 영혼이 약해지지 말고 하나님이 마음속에 두신 꿈과 비전을 가지고 새롭게 도전하십시오. 한 번 더 도전하지 못해서 성공을 눈앞에 두고 주저앉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제 과거의 실패에 너무 매몰되지 말고 계속 믿고 계속 꿈꾸고 계속 도전함으로 찬란한 꿈과 비전을 이뤄내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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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59 데살로전 행복이 들어오는 문 살전5:16-18  이한규 목사  2013-03-05 2294
8458 데살로전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살전5:16-18  이한규 목사  2013-03-05 2218
8457 데살로전 항상 기뻐하십시오 살전5:16-18  이한규 목사  2013-03-05 2390
» 에스겔 거짓 예언을 주의하십시오 겔13:17-23  이한규 목사  2013-03-05 1974
8455 데살로전 복된 관계를 위한 7대 비결 살전5:12-15  이한규 목사  2013-03-05 1940
8454 요엘 심판을 피하는 2대 요소 욜3:1-13  이한규 목사  2013-03-05 1890
8453 데살로후 믿음의 능력이 나타날 때 살후1:11-12  이한규 목사  2013-03-05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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