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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살전5:1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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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http://www.john316.or.kr |
데살로니가전서(23) 하지 말아야 할 것 3가지 (살전 5:19-22)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니까 성령은 오셨다가 죄를 지으면 떠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성령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소멸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성령님은 수시로 말씀하십니다. “얘야! 그 나쁜 습관을 더 이상 지속하지 마라! 그와 화해해라! 어려운 그를 도우며 살아라!” 그런 말씀을 계속 거절하면 더 이상 그런 말씀이 들려오지 않고 불신자처럼 살아도 별로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소멸시키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의 음성에 힘써 순종하려고 하십시오.
어느 날, 한 여인이 헌신의 감동을 못 참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때 그녀에게도 주저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1년 치의 수입을 드리면서 왜 주저함과 망설임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성령의 감동을 따라 순종하기로 하고 마침내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감동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거룩한 일을 위한 부담과 열망을 소멸시키면 축복과 행복과 만족과 보람도 놓칩니다. 헌신의 때가 언제나 있지 않기에 성경은 늘 ‘오늘’이나 ‘지금’을 강조합니다.
2. 예언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언을 점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점치는 복술행위를 가증이 여기셔서 구약 시대에는 현장에서 돌로 쳐 죽이는 3대 죄목 중의 하나가 복술행위를 하는 죄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심심풀이로 점치러 가는데 뭐가 잘못이냐고 하지만 본인은 심심풀이로 생각해도 하나님은 큰 죄로 여기십니다. 그래서 거짓된 예언을 하면 예언하는 자도 망하고 예언 받는 자도 망하고 그들의 자손도 심판 받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예언 받아도 안 믿으면 되지.”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거짓 예언에 이끌리는 것 자체를 싫어하십니다.
어느 날, 한 29세 처녀가 기도원에 갔는데 기도원 원장이 예언을 해주었습니다. “내년 봄에는 꽃이 피겠어!” 비유적인 얘기지만 부모는 내년 봄에 시집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4년이 지나도 시집을 못 가자 그 후 그녀의 부모는 그 기도원 원장을 가는 곳마다 욕하고 다녔습니다. 그런 예언은 성경적인 예언이 아닙니다. 브루스(Bruce)란 유명한 신학자는 성경적인 예언을 ‘하나님의 마음을 타인에게 선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과 말씀을 깨닫고 그 깨달은 말씀을 타인에게 전해주는 것이 바로 성경적인 예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 중에 선포되는 말씀도 일종의 예언입니다.
3. 악을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말씀을 멸시하지 말라고 해서 아무 말씀이나 맹목적으로 받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범사에 잘 헤아려야 합니다(21절). 누가 성경을 인용해 설교해도 무조건 “아멘!” 하지는 마십시오. 이단들도 많고 잘못된 동기로 말씀을 전하는 자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멸시하지도 말아야 하지만 말씀을 잘 헤아려서 악한 것을 가려내고 버려야 합니다(22절). 악행은 영혼의 기쁨을 빼앗습니다. 악을 행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결국 악행은 타인을 괴롭히면서 동시에 자신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악행의 화살은 결국 부메랑처럼 자신을 쏘게 만들어 자신을 정신적인 장애인으로 만듭니다.
사람이 완벽하게 살 수는 없지만 악은 최대한 멀리하십시오. 어떻게 악을 최대한 멀리합니까? 악한 것의 목록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서 그 목록에 나오는 악한 행동을 최대한 멀리해야 합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최대한 순종하며 살려는 자세입니다. 말씀을 잘 헤아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힘써 순종하십시오. 성도에게 가장 복된 성품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주어진 말씀의 감동대로 현재의 시간에서 최대한 실천하며 살 때 말씀은 능력이 되고 축복의 원천이 됩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목사님, 하긴 하겠지만 차차 할게요.” 그렇게 “차차 하겠다.”고 하다가 나중에 “아차차!”하고 후회할 때가 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향유를 가지고 나타났지만 옥합을 깨뜨린 여인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얼마나 그 의미가 다릅니까? 나이가 들어서 주를 잘 섬기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조금이라도 젊을 때 주를 잘 섬기면 얼마나 더 아름답습니까? 성령님이 마음에 선한 감동을 주실 때 즉시 결단하며 성령의 감동을 따라 사는 것이 결국은 모든 모양의 악을 버리는 삶입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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