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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세례 요한=예수(2)

열왕기상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983 추천 수 0 2013.03.09 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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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왕상17:8-16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2.5.13 주일설교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엘리야=세례 요한=예수(2)
열상17:8-16

엘리야는 북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BC885-873)와 아합왕조 시대(BC873-851)에 등장했던 예언자입니다. 이 시대는 정치 경제적으로 이스라엘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였습니다. 영토만 보더라도, 요르단 동편의 암몬, 그 남부의 모압, 그리고 에돔과 유다를 속국화 시켰고, 북으로는 갈릴리 북부지역 끝의 단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다마스커스 왕국과의 국경인 시리아 남부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상부 갈릴리 북단의 하솔과, 하부 갈릴리의 므깃도와 이스르엘,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에서 당시의 왕궁 및 요새 터가 발굴되었는데, 그 규모나 세련미가 당대뿐 아니라 후대에까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빼어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때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하 수로와 마굿간의 규모는 이 왕조가 얼마나 강력한 유용을 가진 나라였는지를 말해 줍니다.  

이처럼 엘리야 시대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예언자가 등장하여 국가의 시책이나 정책을 비난할 아무런 조건도 엿보이지 않는, 차라리 어용 종교인들처럼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국가가 잘살 게 되었고 세계 일류 국가가 되어간다’고 칭송할만한 시대였던 것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좀 더 아합과 오므리 왕조시대의 이스라엘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좀 더 살펴  보겠습니다. 훗날 이스라엘을 집어 삼킨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의 비문에는 앗시라아의 서방 원정군을 대항하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세력의 주축은 아합왕이고, 앗시리아를 막기 위해 파견된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마전차 2000승과 보병 1만 명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보건데 아합왕의 군대는 평지 전투에 관한한 앗시리아의 팽창을 막아 내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합 정권은 잘 짜인 관료제도와, 왕실 직속의 대규모 예언자와 사제학교를 운영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직속 신학교를 만들어서 정부정책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설득하는데 그들을 운영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엘리사라는 신학생도 있었던 거구요.

그런데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아합의 부인인 페니키아 왕녀인 이세벨입니다. 얼마 전 수요일에 페니키아는 상업도시로서, 개개인이 자기 소유를 가지고 있을 수 있었고, 사제들은 그런 자본가들이 더 많은 소유를 얻게 해달라고 기도해주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바알’신 이라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상인 ‘바알’은 이렇듯 개인의 소유를 증대시켜주는 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에는 이 여인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합니다. 그만큼 이세벨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아합의 정책에서 중요한 것입니다. ‘열왕기’는 그것을 바알과 아세라 신앙과 연결 짓고 있습니다. 그게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 열왕기를 다루는 저작자는 신명기를 쓴 사가들입니다(이들은 남쪽 유다 출신들입니다). 그들은 이 아합 왕정의 문제를 이처럼 종교 혼합주의, 이를테면 아합 왕이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간단히 우상숭배로 둘러댈 일이 아닙니다.

우선 몇 가지를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므리 왕조는 여전히 종족 연합체였습니다. 단일 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형태가 아니라 이집트를 탈출한 떠돌이 집단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국가였습니다. 남북 이스라엘 전체로 치면 12지파 또는 종족이라고 하는 것이고, 북쪽 이스라엘 오므리 왕조는 10개 정도의 종족이 모여 형성된 종족연합체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효과적으로 통제하기가 어렵습니다. 군사적인 통제야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몰라도, 각기 다른 종족들의 경험과 기억을 하나로 묶는 일은 쉽지 않은 법입니다. 그러니 지방 권력과 중앙 권력이 따로 놀았겠죠? 그래서 오므리 왕조 때에는 수도가 둘이었습니다.

열상16:24에 보면 사마리아를 돈으로 사들여 수도로 만듭니다. 그리고 다른 곳 이스르엘인데, 이곳은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에서 보듯이 토착민의 땅을 빼앗아서 수도로 삼은 곳입니다(열상21:23). 이렇게 오므리가 두 곳에 수도를 정했다는 뜻은, 한곳은 종교적인(사마리아) 수도로, 다른 한 곳은 정치적인(이스르엘) 수도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오므리는 얍삽하게도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야훼 신앙의’정치와, 이스르엘을 중심으로 하는 전제군주정치를 양면으로 시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왕국을 세운 남쪽 유다는 몰라도 북쪽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의 지지에 의해 왕의 통치가 용이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오므리 왕을 지지하는 예언자는 성서에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정황이라면 마땅히 오므리는 야훼전통을 지닌 어떤 장소에 종교적인 의미의 성소를 세워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필요에 의해 세운 게 사마리아 수도였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오므리는 이스라엘 출신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이방인 용병출신으로 쿠테타를 통해서 정권을 잡은 인물입니다. 오므리는 이스라엘의 정당성이 없는 인물이죠. 그게 늘 약점으로 작용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정통성을 위해서라도 사마리아에 야훼정신을 담은 수도를 만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강력한 전제국가를 만들어야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야훼 신앙전통을 갖추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아들을 페니카의 왕녀인 이세벨에게 장가들게 하고, 그들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들여와 국가적인 제의를 만들어서 정치에 이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므리나 아합왕 이전에는 이런 혼합주의가 없었느냐? 아닙니다. 이미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나라를 세운 직후 이미 일상화된 신앙 양식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이 오므리와 아합왕의 이방신을 섬겼던 것을 문제 삼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들여온 바알과 아세라 신이 팔레스타인 안에 있던 전통적인 신앙들이 아니라 페니키아에서 들어온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들이 유입되기 이전에도 토착적인 민간 신앙들이 야훼 신앙과 결탁을 했지만, 페니키아의 바알과 아세라 신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신들은 개인의 소유의 후원자 신학이었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의 부귀영달을 위해 복을 빌어주는 신이 바로 바알과 아세라 신이었단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야훼신은 공동체의 아픔을 해결하고,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먹이고 살리는 신이었지 이런 개인의 소유물을 쥐락펴락하는 신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의미의 바알과 아세라 신의 유입으로 오므리 왕조와 아합 왕조는 팽창주의,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전제국가적인 욕망을 정당화 하게 되었고, 이것이 국가의 발전과 성장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오므리 왕조는 이런 신학을 바탕으로 건물을 대대적으로 짓고, 대규모 제의를 벌이고, 화려한 전례행사를 개최해서 성공주의를 국민들에게 선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 엘리야가 등장을 하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성공 중심 세상의 흐름을 바른 눈으로 꿰뚫어 보는 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엘리야입니다. 왕조의 성공주의가 전 이스라엘을 휩쓸던 그 무렵, 어느 나라를 또 점령했다는 전령의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연일 들리고, 침략한 나라에서 보내온 공물의 행렬이 줄을 이어 산더미처럼 쌓이던 그 성공의 시절에, 그런 장면을 불편하게 여기던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왜 엘리야가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고, 그런 엘리야를 왜 백성들은 환호하며 열렬히 지지하고, 마음속에 새겼는지를 알려면, 엘리야를 잘 알기 위해서는 사람들 속에 전해 내려오던 전설 같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너무나 자라는 사렙다 과부의 기름병 이야기입니다. 열상17:8-16절,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이 엘리야를 바로 보는 처음 이야기입니다.

백성들은 엘리야가 과부의 기름병을 채우는 ‘기적’ 때문에 환호 하는 게 압니다. 그들이 지니고 있던 사회적인 분노가 엘리야를 통해 메시아적으로 기억되기 때문에 그를 환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엘리야를 개인적인 삶을 유익하게 해 줄 능력자로 본 게 아니라 세상을 뒤집어엎을 메시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만큼 당시의 약자들, 가난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컸다는 뜻입니다. 나라는 부귀 강성해졌지만 실상 백성들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본문에는 그래서 엘리야의 기적의 수혜자가 과부와 어린아이로 나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오늘 본문의 여인이 살고 있던 곳은 페니키아입니다. 이스라엘 밖이라는 것은, 엘리야가 이스라엘 영토 밖에서 예언자적 사역을 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국가의 통치 이념인 ‘성공지상주의’ 발전주의‘ ’부흥주의‘라는 이데올로기와 대항하겠다는 뜻입니다.

엘리야의 관심은 나라가 잘살고 못사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발전의 틈바구니에서 고생하고 고통당하는 약자들의 아픔에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오므리와 아합왕의 그런 정치에 희생당하면서 불편해하고 있었습니다. 전제국가란 백성들의 희생을 동반하는 정책인데, 그걸 불편해하는 백성들의 기억 속에 엘리야는 그와 같은 자신들을 해방 시켜줄 메시야로 기억된 것입니다. 그러니 사렙다 과부의 기름병 사건이 ’축복‘이라면, 그것은 물질적인 증대의 축복이 아니라 해방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이게 기름병 하나에 얽힌 역사의 무게입니다.

21장에 나오는 나봇의 포도원 강탈 사건도 기름병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제권력 하에서 왕이나 귀족들은 멋대로 소농들의 토지를 몰수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나 부역에 동원 되어야 했던 백성들에게 땅을 지키는 일은 참으로 버거웠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과부와 고아는 무수히 양산되었고, 당연히 그들의 생존권은 물위 떠 있는 낙엽 같았습니다. 이런 일들은 국가의 발전주의 정책과 연결되어 있었고, 바알과 아세라신앙의 미화속에서 감춰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엘리야 들춰 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갈멜산(950명의 거짓 예언자들과 싸운)은 바로 페니키아와 이스라엘의 접경지입니다. 또한 이곳은 수도 이스르엘에서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이곳에 신전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사제들 1000여명을 학살합니다. 그리고 신전을 불태우는 일을 저지릅니다. 이 학살사건과 기름병 사건은 같은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대중의 아픔과 분노를 대변하는 엘리야의 행동이라는 측면에서 말입니다. 결국 엘리야는 그 일로 인해 이세벨의 공권력에 추격을 받아 유다 남부 네겝 지역인 브엘세바까지 도망을 해야 했습니다. 만약, 엘리야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기적을 일으키고 능력을 행하는 이로 해석을 한다면 이 장면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사건인 것입니다. 어떤 때는 없던 기름을 만들어내는 능력의 엘리야가 또 어떤 일에서는 수천 명을 죽이고 불을 지르고도 한 여자의 추격에 비참하게 도망을 가서 목숨을 구걸하는 이해 불가의 행동을 설명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엘리야는 초능력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칼을 든 예언자입니다. 그는 혁명가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공한 혁명가가 아니라 실패한 혁명가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그를 괄호 속에 넣어두고(홍길동 이야기처럼) 역사가 질곡에 빠질 때마다, 정치와 사회 속에서 고통을 당할 때마다, 그 괄호 속에 넣어 두었던 엘리야를 꺼내 희망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엘리야의 실패로 인해 더욱 강렬하게 그것을 완성해줄 제2, 제3의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세례요한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과 제가 믿고 따르는 예수는 이렇게, 이스라엘 민중들의 부패한 역사와 고통스러운 삶을 뒤집어엎다가 실패한 엘리야에서부터 시작하여, 세례요한으로 이어져 예수에게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의 예수는 결코 성공과 출세를 돕고 개개인의 소유를 증대시켜주는 수호신이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예수를 믿는 믿음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요? 바알과 아세라처럼 사유재산이나 지켜주는 물신이 되어 버린 예수, 그렇게 해서 사회나 교회가 번창하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는 ‘번영신학’으로부터 교회와 신앙 즉 공동체의 가치를 지켜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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