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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의 ‘삐딱이들’ 3 -요한 공동체

요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807 추천 수 0 2013.03.09 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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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13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2.7.10 주일설교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초기 기독교의 ‘삐딱이들’ 3
요1:13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무슨 ‘모임’ 또는 이런저런 ‘회’같은 걸 만들어 어울려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춘천고 동창회, 전라도 향우회 같은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모임을 만들어서 거기 속하는 이유를 사회학에서는 ‘존재론적 안전감’이라고 합니다. 인간 개개인이 홀로 살기에는 뭔가 불안하니까, 여기저기 자신을 얽어서 안정을 취하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제도적인 안전감’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개개인이 이렇게 얽혀서도 불안한 게 있으니까 좀 더 큰 울타리를 의미합니다. 그 예로는 ‘국적’혹은 ‘국가’같은 걸 들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속해 있느냐, 한국이냐, 일본이냐, 필리핀이냐, 미국이냐 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안전감도 얻고 우월성도 갖습니다. 그런 걸 말하는 것입니다.

국가는 발전과 그 성과물을 국민들, 인간 개개인에게 제공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안전감을 완벽하게 제공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학연, 지연, 혈연, 종교 등의 사적인 네트워크를 가동하여 불안을 해소하는 장치들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 일상사의 온갖 모임들은 ‘안전감’을 획득하려는 데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일종의 생존 전략으로 필요한 셈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생존의 안전을 위해 온갖 방책을 장만해도 여전히 생존의 불안을 느끼게 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때 나타나는 인간 심리의 사회적 현상이 바로 메시아 대망 사상입니다. 사회적이거나 개인적인 불안이 극도 화 되면 ‘메시아 주의’가 발흥이 됩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시절, 서기 1세기의 팔레스타인과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 나타난 것이 바로 ‘메시아 주의’입니다. 그것은 마태,마가, 누가 공동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편지들에는 ‘예수님이 언제, 어떻게 오시는지’에 대한 질문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당시대의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이 바라던 예수님의 재림은 모두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마태공동체, 누가 공동체가 바라던 메시야하고, 요한공동체가 바라는 메시야에 대한 기대는 같은 걸까요?

아닙니다.
요한복음에는 우리가 금 새 알아채기 어렵지만 두 개의 메시아 주의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걸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거나 들을 때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읽어내는 성경 구절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13절을 잘 보세요. ‘메시아란 과연 어디에 귀속된 존재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 어떤 공동체에서는 혈연을 따라 나타난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혈통에 귀속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허씨 문중에서 메시아가 태어난다고 한다면, 메시아가 등장하게 될 때 누가 가장 이득을 보게 되는 걸까요? 뭐 그런 이해입니다. 그런데 요한공동체는 말하길 그런 혈통주의에 귀속된 메시아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귀속된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혈통이라는 말은 누가 즐겨 쓰는 말인가요?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혈통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예수를 어떻게든 다윗의 혈통에 끼워 넣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 공동체뿐만 아니라 요한공동체를 제외한 다른 모든 공동체는 모두가 혈통주의적인 메시아를 종교 이념으로 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국주의와 다르지 않아서, 영웅은, 구원자는, 위대한 인물은 항상 위대한 가문이나 혈통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엘리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대를 나와 의사, 변호사, 검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으면 누구든 껌벅 죽거나 마음속으로 흠모하는 것처럼, 당시대의 모든 사람들도(그리스도교건, 유대교건, 이방종교를 갖고 있던 간에)이러한 혈통주의, 엘리트주의를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메시아는 ‘유대 혈통의 그분’ 또는 ‘어떤 가문의 유대인’이라 거나, 혹은 ‘황제 가문의 아무개’여야 한다는 믿음 체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메시아라야 앞에서 말씀드린 ‘제도적인 안전감’이 크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더 높고 강한 장벽이 필요한 것이고, 그런 세상살이의 욕망 속에 메시아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육정입니다. 그런 일련의 세속적인 기대의 메시아주의를 ‘남자’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대의 그리스도교인들, 마태나 누가의 공동체가 메시야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아시겠죠? 요한공동체의 눈으로 볼 때 당시의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는 혈연, 육정, 남자의 뜻에서 비롯되는 종교였습니다. 요한 공동체로서는 이게 못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그런 것(혈연, 육정, 남자의 뜻)에 속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난다는 것입니다. 이게 요한공동체가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요한공동체가 말하는 ‘하나님’은 무엇인가요? 요한복음의 반대편에 있던, 즉 혈통으로나 육정이라고 비난 받는 편에서도 자신들의 메시아 주의가 하나님께 귀속 된 것이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하고 요한공동체가 말하는 ‘하나님’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그 내용이 무엇이냐를 지시해 주는 게 아니라, 이것을 주장하는 자신들이 옳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요한공동체는 유대주의적인 메시아주의, 혈연과 혈통중심의 엘리트 메시아주의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요한복음에서 보게 되겠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세상’이라는 단어가 ‘유대인’이라는 단어와 동의어로 사용됩니다(8:44). ‘세상’이란 불신자들의 영역이고,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지만 요한복음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나 ‘유대인’이나 예수님을 거절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요한공동체의 신앙의식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주후 1세기는 로마에 망한 유대를 재건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시대입니다. 이들에게 ‘유대’는 제도적인 안전의 울타리였고, 그 울타리가 든든하려면 힘 있는 가문, 유명한 혈통에서 누군가가 나타나야 되던 시대입니다. 그래야 로마를 이기고, 유대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여기던 때였습니다. 당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이런 패권주의에 점차 빠져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기 70년에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은 모두 불타 사라졌습니다. 위기에 직면한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이질적인 종교집단인 예수 추종자들, 세례요한의 추종자들을 추방했습니다. 이에 나사렛 예수를 추종하던 이들은 독자적인 제도와 정체성을 구축해야 했습니다. 이 때 가장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제도적인 대안은 자신들이 속해서 살았던 유대교회당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하여,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대립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은 하나의 제도적인 프로그램을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공동체는 그걸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가 베드로에 대한 요한공동체의 기술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베드로는 가장 모범적이고, 가장 사랑받는 제자로 등장합니다. 이들은 모두 사도계 공동체 즉, 예수님의 제자나 형제들로 이루어진 엘리트들의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베드로는 그런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라 그저 ‘주님이 사랑한 제자’입니다. 만찬 때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았고, 배신자에 대한 정보를 오직 그에게만 귀뜸해줍니다(13:23-26). 십자가에서 죽음이 끊어질 때 어머니를 부탁한 것도 베드로가 아니라 ‘주님이 사랑하는 제자’(19:26-27)입니다.

요한공동체는 유대교를 모방하여 독자적인 발전을 기획하는 주류 교회들의 예전화, 제도화, 추세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당시 주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지향하는 것은 로마제국적인 영웅주의나 유대의 메시아 주의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성공주의입니다. 성장주의입니다. 그렇게 모두가 혈통적, 육적, 남성적인 메시아주의에 몰두해 있을 때, 대중적인 구원 담론이 패권주의와 겹쳐지고 있을 때, 이 공동체는 거기서 한 발짝 물러서서 ‘자발적 소수자’ 즉, 세상을 거스려 사는 사람들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세상의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해체하겠다는 의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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