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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그리스도의 ‘삐딱이들’4 - 니고데모와 성령

요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537 추천 수 0 2013.03.09 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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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3:8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2.7. 19주일설교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초기그리스도의 ‘삐딱이들’4
요3:8

요한복음은 한 마디로 반골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말로는, 남들 하는 대로, 남들 믿는 대로 따라서 믿지 않는 것이고, 세상을 쫓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우리가 본 것처럼 ‘메시야’에 대한 생각도 당시의 보통 교회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우리는 오늘 다시 한 번 요한복음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반골적인 신앙의 한 부분을 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에 대한 이해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요한복음 공동체가 이해하는 성령은 당시의 다른 교회들이 이해하는 성령과 달랐습니다. 이해가 달랐다고 해서 ‘성령’그 자체가 다른 것이라고는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같은 ‘성령’을 다르게 이해하고 믿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3:8은 복음서에 등장하는 성령론에 있어서 아주 특징적인 표현이며 주장입니다.

니고데모라는 이름의 제자와 예수님이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성서 본문은 그가 유대사회에서 큰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고 알려 줍니다. 유대 사회의 지도자, 의원이라는 말은 곧 유대사회의 질서관을 잘 보존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그가 살고 있는 사회 체제의 근간을 가장 잘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 체제의 추함을 가장 잘 알고 은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다는 사실은 예수와의 접촉이 그가 대변하는 체제의 시선에서는 불온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예수가 살고 있는 동시대와, 요한복음 공동체가 놓여 있는 시대가 섞여 있습니다. 필경 로마 제국 치하의 세상 속에서 그리고 유대 공동체 내에서, 요한공동체는 그렇게 불온한 집단이었고, 동시대에 있던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도 그렇게 취급되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예수 시대와 복음서 시대, 이 두 시대에 지배적인 유대사회는 ‘다름’에 대해서 신경질적으로 폐쇄적이라는 점에서 공통됩니다. 왜 이런 배경을 설명 드리는가 하면,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유대주의사회에서 매우 경계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회당은 내부의 이런 사정으로 인해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회체계의 질서관을 대변하는 정치 종교적인 인물, 그러나 뭔가 속에서 예수에 대해 동요를 일으킨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와 말을 건넨 것입니다. 뭐라고 물었지요? 영생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결코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3:3). 그런데 니고데모는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죠. 다 큰 사람이 어떻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처럼 대답하였습니다. ‘바람이 부는 소리만으로는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다른 복음서의 ‘성령’과 다른 것입니다. 요한복음 공동체만 이해하고 있었던 성령의 이해인 것입니다.

‘소리’는 곧 말입니다. 말이란, 인습적인 의식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질서에 대한 이치가 이렇고 저렇고 하는 식의 사유의 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사람이 쓰는 말이란 세상을 논하는 기본적인 도구라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일까요? 말은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를 가르는 인식의 기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소리, 말만으로는 바람의 방향을 알지 못합니다. 바람이 어떻다 저떻다 아무리 해봐도 말로는 바람의 방향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시계가 시간이 아닌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람의 방향은 어떻게 압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느껴야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람의 방향은 말로 떠드는 게 아니라 입 닫고 느끼는 것입니다.

말은, 인습은 단지 그 느낌을 표현하는 하나의 도구이지 ‘느낌’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때로 사람들은 말 또는 인습이 진리를 충분히 담고 있다는 집착을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우리가 요한복음 1:1에서 본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인식 틀이 그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살덩이가 되었다는 선언이 없었다면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인습에 찌든 말 즉, 로고스라는 표현의 도구에 집착하지 않고 과감하게 ‘그 말씀은 곧 살덩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말이란 느끼는 게 아니라 그저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덩이는 직접 느껴서 아는 것입니다. ‘살덩이’라는 말로 ‘살덩이’를 알 수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성령을 이해하는 방식이 이와 같은 겁니다. 성령이 바람과 같다는 말은, 요한공동체가 이해하는 성령은 인습에 얽매이지 않고, 인습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닮은 것과 닮지 않은 것을 가려내는 사고의 틀로부터 자유로운 것, 바로 그것이 성령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틀렸는지 맞았는지, 나와 다른지 같은지를 구별 하려면 뭔 척도가 있어야 합니다. 척도란 크기를 재는 기준이죠. 모든 것을 그 척도에 따라 견주어야 하고, 무엇이 더 큰지, 무엇이 다른지, 무엇이 유익한지, 무엇이 더 우월한지를 가려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욕망을 낳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모든 경험을 척도로 측량하려는 욕구로 가득한 세상, 그 욕구로 인해 모든 경험을 계량 가능한 것으로 환산하는 기술들로 가득한 세상, 그리하여 그 환산된 평가에 따라 포용과 배제를 제도화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세상, 결국 닮은꼴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자유를 앗아 갑니다. 모두를 척도의 노예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 이해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성령’도 당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척도에 재어서 버리고 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거 누가 그렇게 할까요? 힘 있는 종교 지도자와 제도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래야 대중을 간편하게 통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공동에 외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미 이런 시스템 속에 들어가 있었고, 성령도 그런 잣대에 의해 규격이 만들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신앙 현상에 대해서 요한공동체는 말합니다. 아니다. 자고로 하나님의 영이란 인간이 이렇게 저렇게 재단할 수 없다. 성령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이다’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미리 세워진 규칙만으로는 알 수 없는, 힘  께나 쓰는 한 두 사람의 말에 갇히는 그런 게 아니라 각각의 존재가 스스로 느껴 아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람같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령’=‘바람’이라는 말이 아니라, 마치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자유로운 것이고, 형상화할 수 없는 것이고, 규격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람의 움직임, 형상을 추적하고 예측하고 예단하지 못하듯이 성령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단순히 세례를 받을 때 사람이 거듭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규정하는 여러 가지 꼴들이 있지 않습니까? 기도는 어떻고, 헌금은 어떻고, 주일 예배는 어떻고, 집사는 어떻고 하는 그런 규정 말입니다. 그런 신앙적 삶의 꼴을 규정하는 일체의 인습적인 규범화에 대한 해체를 의미합니다. 그런 종교적인 습속으로는 거듭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규범들, 틀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각자 성령의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건과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습속을 예수가 거부했듯이, 다시 유대인들의 틀을 따라가는 기독교 공동체를 향해 요한공동체는 말합니다. 그런 것들을 거부하고 자유롭게(성령으로)태어나야만 하늘나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요한공동체는 기존의 신앙에 도발을 하는 셈이고, 규격화되어가는 인습의 종교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향하려는 인간의 욕망에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공동체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당신들의 그런 인습과 같은 게 아니다. 당신들의 마음에 맞는 것을 이리 저리 선별하여 구별하는 게 성령이 아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이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니 이런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고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공동체가 주장하고 믿는 하나님의 ‘성령’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어 ‘46년간이나 건축되고 있는 성전’을 무너뜨리고 대신 ‘3일 만에 지어질 새 성전’을 이야기합니다(2:20-21). 이 이야기에서 옛 성전이란 바로 유대인의 중심에 있는 진리 체계를 말하는 것 아닙니까? 요한공동체는 예수를 말할 때 바로 그런 것을 해체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여하튼 인간적이고 인위적인 종교성들을 해체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3일 만에 지어질 새 성전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자신, 신이 육화가 되는, 살덩이가 되는 부활이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46년과 3일이 대조되어 있죠? 46년이란 뭡니까? 그것은 그동안의 일체의 지식, 과학, 계산법들, 종교적인 규범들을 의미합니다. 그걸 허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더 이상 발붙이지 말아야한다는 것이고, 그런 것들로 더 이상 진리를 판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3일 만에 지어지는 예수의 몸, 부활의 사건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를 믿는 각자가 경험해야 할 자기 초월의 사건인 것입니다. 그게 거듭남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의 몸을 보았다느니, 그가 입은 입 조각을 갖고 있다느니, 그의 상처 난 자국을 만졌다느니.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느니, 그가 잡은 생선으로 요리를 해서 같이 먹었다느니 하는 말로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너에게 일어나는 자기 초월의 사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은 [성령의 신앙]입니다. 성령의 신앙이란, 유대교 회당 체제 내에서 주변화 된 존재들, 가난하고 병들고 천한, 소외된 변두리 존재들이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배제된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존재라는 주체의식을 찾아내는 정체성의 신앙이었습니다. 그것은 다시, 유대 공동체의 욕구 속에 가려진 자신의 욕망을 찾아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급속하게 제도화되어가는 유대교의 회당 체제와 그리스도교 교회 체제에 대한 비판의 소리입니다. 당시 교회는 유대교 회당의 모범을 따라, 교권화, 교리화, 직제화라는 제도화의 틀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지 적어도 3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뒤에, 아직 그리스도인은 성전-회당 체계가 함축하는 기존의 진리관을 대체할 대안적인 진리체계, 즉 그리스도의 몸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 때 바울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롬12:5과 고전12:12-27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다름 아니라 교회라고 말합니다. 즉 교회는 육화된 하나님의 자기 초월의 사건을 구현하는 제도적인 장인 것입니다. 현존하지 않는 예수의 사건을 역사화하기 위하여 바울은 그것을 위한 제도적인 현장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종족도 다르고, 계층도 다르고, 성별도 다릅니다. 바울은 이들 간의 평등한 연결망을 구축하는 호혜적인 교회상을 제시합니다. 제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권위가 필요한데, 바울은 그것을 ‘사랑의 가부장제’라는 관습을 생각해 냅니다. 여러 권위가 있지만 서로 사랑과, 나눔과 섬김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의 몸인 교회는 서로 연대하는 ‘하나의 몸’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신학은 몸을 비유로 하는 제도적인 신학이었습니다. 몸과 몸이 갖는 차이는 사랑으로 극복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유대교 신앙체계의 대안으로 ‘몸의 신앙 체계’를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요한공동체는 바울의 공동체처럼 제도나, 권위로 만들어지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바울의 공동체(교회) 인식은 차등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공동체는 차등 없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말합니다. 그게 예수 사후 이후 에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의 성격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직화되는 교회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요한공동체에게 있어서 교회는 어떤 제도나 차등의 틀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사건이 개개인에게 일어나는 현장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제도적인 교회는 요한공동체의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으로서의 교회’를 억압 또는 통제했습니다. ‘영의 활동’을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배제하였고, 순화된 영만을 주변부로 포용하였습니다.

오늘의 기독교도 바로 이것, 모든 믿는 개개인의 삶의 현장에 나타나야하는 그리스도의 사건들 즉, 영의 일들을 제도화, 규격화, 상품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가 그저 몸과 몸이 부딪히고 관계하는, 시장 통처럼 되어 있는 것입니다. 너무 바울의 ‘몸 교회론’에 쏠려 있는 까닭입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철저하게 ‘몸의 교회론’을 거부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몸의 교회’와 ‘성령의 자유로운 교회’의 변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교회론과, 요한의 교회론 즉, 틀을 구성하는 성령과, 틀을 벗어나 ‘자유로운 그리스도의 사건을 체험’하게 하는 성령의 이해와 역사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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