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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9:37-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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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2.9.11 주일설교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초기 기독교의 삐딱이들 10 -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
요9:37-39
지난 주일에 우리는 ‘안다는 것’의 허상에 대해서 싸르트르의 ‘진실의 무’를 열쇠 구멍으로 보는 세상 또는 사건을 비유로 이해를 얻었습니다. 자기 시야의 편견에 갇히면 확신이 일어나고, 그 확신은 자기의 사고나 행위를 내려다보는 존재 앞에서 순식간에 허물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듣거나 쓰는 언어에는 ‘신념 언어’와 ‘사실 언어’가 있습니다.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또는 “믿습니다”와 같은 언어는 기대하는 바를 확신하는 신념언어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내 친구의 아버지 이십니다”와 같은 언어는 사실언어입니다. 그런데 편견이 크고 강력할수록 사실언어보다는 신념언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도 사실 언어보다는 신념언어가 더 비중이 크고, 이단성향이 있는 집단에서 더욱 그 비중이 높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시선으로 요한복음 9장의 예수와 군중들, 예수와 당시의 종교인들의 허상을 보게 됩니다. 9장은 세계의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소경인 사람을 두고 이야기하다가 소경을 고친다는 이야기입니다(1-7). **13-34에 나오는 것처럼, 바리새와 고침 받은 사람의 대화가 두 번째 장면입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은 그가 눈을 뜨게 된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사람들로 나옵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뭐라고 말하는가하면, 그는 메시야가 아니라 죄인이라고 합니다. ***35-41절에 나오는 장면이 세 번째 인데, 예수님과 고침을 받은 사람이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거기서 ‘봄’과 ‘보지 못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 등장하는 소경 즉 보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누군가로부터 관찰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누군가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타인의 시선 안에 들어 있지만, 그는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볼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즉 앞의 예에서 그는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누군가의 눈에 걸려든 사람입니다. 누가 그를 그렇게 항상 엿보고 있는가 하면 바리새인입니다. 그러니 소경과 바리새인의 관계는 단순히 이사람 저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바리새인은 자기 시선으로 타인의 존재를 규정하는 사람이고, 소경은 자기의 의사와 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규정당하는 사람입니다. 규정만이 아니라 제압하고 제압당하는 그런 관계입니다. 이것이 바리새 주의의 폐단이었던 것입니다. 요한 공동체가 보기에 당시의 유대 사회는 바리새인의 규정자의 시각과 법, 소경의 규정당하고 그것에 제압당하는 존재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상의 진리는 없었습니다. 오직 그게 당시의 진리현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등장하고, 그 예수 때문에 항상 규정만 당하고 살던 소경(여기서는 일반 대중)이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세상이 달라진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그걸 ‘소경이 눈을 뜨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단지 한 개인의 신체적인 처지에 대한 변화를 말하는 게 아니라, 가치의 전환과 거짓 진리의 전복을 요한복음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 그래서 늘 무시만 당하고, 누군가에게 끌려서만 살았던 것이 붕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당황스러운 것은 바리새인입니다. 그래서 윽박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메시야가 아니라 죄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소경이 뭐라고 합니까? “나는 그건 모른다. 다만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바리새인의 시선에 규정되어 있던 사람입니다. 한데 그는 보게 되면서부터 그 바리새인과 논쟁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리새가 본 걸 자기가 본 것처럼(신념언어)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사실언어). 그에게 더 이상 바리새인은 지엄한 눈을 가진 위압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소경에게 바리새인은 더 이상 진실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스스로 바리새인들을 보게 되었을 때 바리새인은 실상은 죽은 뱀 같이 엷은 입과 뼈만 앙상하게 남고, 장님의 눈을 가진 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바리새인을 이렇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37-39
즉 그들은 못 보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고침 받은 이는 ‘보게 된 자’입니다. 그러자 바리새이가 그 말에 항변을 합니다. ‘우리가 눈이 멀었던 말이냐?’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9장 전체의 결론적인 말입니다. 41절인데요,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차라리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본다고 하니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시각, 그들만이 믿는 편견의 진리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엿봄에 대해, 그 엿봄이 예수에 의해 들켰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며, 그 수치스러운 행위, 열쇠 구멍으로 누군가를 엿보면서 그 대상을 규정짓는 나쁜 습관에 대해서 성찰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왜 스스로를 성찰하지 않는 것일까요? ‘확실성’ 또는 ‘신념의 언어’ 때문입니다. 기대를 반영하는 언어인 신념의 말이 너무 많이 사용되어서, 이제는 신념을 진리인 것처럼 믿는 착각이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그게 확실성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이 세상을 확실하게 보고 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예수는 그들과 지금 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과의 대화를 가능케 하는 일이 바로 한 소경,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던 한 거렁뱅이에게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 사건으로 시작됩니다. 바리세인들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들도 세상을 보고 눈뜬 소경도 세상을 보지만, 참 세상을 보는 것은 자신들 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소경이었던 자가 보는 세상은 진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오랫동안 세상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보는 이 세상도 여전히 보는 게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그가 자신들처럼 보지 않는 한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모두 거짓이라는 겁니다. 말이 됩니까? 그런데요, 종교가 항상 이런 식입니다. 자기가 체험한 시선의 인식이 아니면 모두 가짜라고 여기는 편견이 우리 속에, 더욱 ‘이단’이라고 여기는 집단속에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신념이 확실성으로 바뀌는 기억의 정치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논박하고 있는 바리새는 유대교 회당 체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들만이 볼 수 있다는 황당한 정치의 기억술이, 요한공동체가 바라보는 바리새적인 유대교 재건의 정신이었고, 점차 제도화 되어가는 초기 기독교의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너희들이 소경이었더면 좋았을 것을....하지만 너희들이 확실히 본다고 하니 그게 너희들의 죄로구나.”
그러면 오늘 우리 기독교 신앙은 어때야 하는 건가요? 가급적 신념의 자기 최면 언어를 피하고 ‘사실언어’를 즐겨 써야 합니다. 사랑, 구제, 희생, 봉사, 나눔은 사실언어를 기초로 동반되는 체험입니다. 이것은 각각의 눈을 뜨게 하는 사건으로서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자손 3-4 대까지 복을 받을 줄 믿는다’든가, ‘천국에 가면 상을 받을 줄 믿는다’든가, ‘후히 주시고 흔들어 넘치도록 주실 줄 믿는다’든가 하는 언어는 정치적 확신에서 오는 신념언어인 것입니다.
이런 자기 최면적인 확신은 ‘나만 진리를 볼 수 있고 네가 보는 것은 틀렸다’는 바리새적인 인식 세계를 구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를 통해 진리를 알고, 그 진리 안에서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자기 확신과 신념의 울타리에 갇히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공동체는 극구 이런 사태를 거부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9장의 소경의 이야기는 육체적으로 볼 수 없었던 이가 눈을 떠서 보게 되었다는 단순한 신체생물학적인 이야기가 아닌 것이죠. 종교나 사회가(정치)사람을 눈멀게 하고, 그렇게 눈멀게 한 사람을 항상 제압하려드는 부조리를 거부하여 자유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누가 여러분의 영혼과 삶을 도둑질하고 침탈하려드는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눈을 떴다고 하는 자들도 자성해야 하는 것이고, 눈뜬 자들에게 제압당하며 소경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이참에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신앙공동체란 이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눈을 떴다고 하는 자들(제도권의 종교 권력자들)에 의해 눈먼 소경을 양산해 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전제를 갖고 ‘예수님은 세상의 빛’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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