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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8:37-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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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주일설교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삐딱이들’11
요8:37-39
요한복음 7장의 시작 대목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은 주의 형제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죠.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줄거리를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형제들이 초막 절기를 앞두고 예수에게 예루살렘으로 같이 올라가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형제들의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형제들과 ‘함께 올라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즉 주의 형제들과 반목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들도 형제사이에 의견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의견의 차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 가치관과 방향성의 불화입니다. 정확하게 그게 무엇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애시 당초 시대와 불화하신 분입니다. 그런 것으로 보아서 필경 가족과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유대는 철저한 가족주의입니다. ‘고엘’법 같은 경우는 그 가족의 독특성을 잘 나타내 주는 법입니다. 그런 사회에서 형제들과 갈등한다는 것은 이만저만 위험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신서, 바울의 편지들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바울은 50년대 기독교 운동에 있어서 자신과 예수와의 관계를 누누이 설명하고 설득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혈연으로는 먼 거리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주된 논리였습니다. 특히 갈라디아 2장에서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인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와 갈등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친 형제들 입장에서 보면 바울의 말들은 궤변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는 바울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대표로 있는 예루살렘 종교집단은 이렇듯 유대주의적인 혈통을 중요시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단지 해외에서 활동하는 급진적인 이방인에 불과했습니다.
마가복음은 70년 어간에 시리아 남부나 팔레스타인 북부 시골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신앙공동체가 사용하는 텍스트였습니다. 거기에도 강렬하게 ‘역사적 주의 형제’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마가복음도 예수님의 형제들을 달갑게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수님의 형제들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다니는 예수를 미쳤다고 생각하며 붙잡아 가두려고 했습니다.
이쯤에서 신약성서를 바로 아는 역사 공부를 좀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장 잘 기록한 사람을 ‘요세푸스’라고 합니다. 그가 ‘유대교대사’라는 책에 의하면, 악명 높은 알비누스(주후62-66 팔레스티나 주둔 로마 총독)가 부임하기 직전에 권력공백기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헤롯 가문의 후손 아그립바2세가 총독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재빨리 대제사장인 요셉의 지위를 박탈하고 아나누스를 임명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안나스 가문에 의해 예수님이 체포되어 처형당했습니다. 그런 가문입니다. 사람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처형하는 일은 이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회 현상 중 하나였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는 무장단체, 유대교 종교지단 할 것 없이 말입니다. 마치 일제 때 윤봉길 의사가 백주 대낮에 히로부미에게 폭탄을 던지듯 말입니다. 그러면 로마 당국은 가만있겠습니까? 유대인들, 종교인들을 탄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떠돌이 종교그룹이었던 바울교단에서는 예루살렘으로 헌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모두 요주의 인물인 것이고, 사회는 온통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인 것입니다.
그런 때였으므로 신임 대제사장 아나누스는 알비누스 총독이 부임하기 이전에 예수님의 형제들로 이루어진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기소하여 야고보를 비롯한 지도자들을 처형하게 됩니다. 그 당시 바울은 로마군 기지인 안토니아 요새 감옥에 갇혀 있었고요. 이렇듯 당시 예루살렘은 종교와 정치가 모두 폭력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260-310)에 의하면 예루살렘 공동체는 이런 오욕의 땅 예루살렘을 버리고 지금의 데가볼리 지방으로 이주를 했다고 전합니다. 이것은 마치 에세네파의 창설자인 ‘의의교사’가 오욕의 땅이라고 할 만한 예루살렘을 버리고 ‘쿰란’으로 들어간 이유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만큼 예루살렘은 종교나 정치의 방면에서 폭력으로 얼룩져 있었던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도시였던 것입니다. 더 이상 성지가 아니었던 거예요. 이런 정황은 마가복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처형된 이후 예수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부활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은 다시 오시는 예수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폭력성과 부패를 한 눈에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거기 그 예루살렘에 예수님의 형제들이 종교적인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일정 부분 예수님의 형제들도 망해가는 예루살렘의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부분에 일조를 하고 있었으므로, 세상을 변혁시키려는 예수의 입장에서 그들과 함께 할 수 없었지 않았겠어요? 마가복음은 이런 정황, 예루살렘에 희망을 포기하고 데가볼리로 떠날 때 예루살렘 집단을 이탈한 기독교인과 시리아 북부의 시골마을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이들에 의해 [마가복음]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혈통주의나 그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좌우되지 않고 대중의 고통을 대변한 메시아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마가복음을 읽으면 군더더기가 없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기존의 다른 복음서에서 기억하는 예수와는 다른 기억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마가복음의 신앙주체가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시각으로만 예수를 보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로마제국 전역으로 예수운동이 확장되어 갔다는 관점을 가진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저자는 마가복음에서 많은 자구를 그대로 쓰면서도 몇몇 곳을 자신의 관점에 맞추어 수정을 합니다. 막3:21절에 나오는 주의 형제를 비판하는 노골적인 구절을 누가복음은 생략을 합니다. 왜 이런 성서기록의 관점이 생겼느냐 하면, 이 당시는 공동체를 통합하려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비난하고 하는 대목은 빼는 게 좋았던 것입니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그때까지도 살아남은 주의 형제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남아 있었고, 예수의 친척들이 팔레스티나 교회의 유명한 지도자로 살아 있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공동체가 이렇게 꼴 보기는 싫지만 그래도 통합을 하자는 입장에서 껄끄러운 것들을 생략하거나 제거하고 있을 때 요한복음 공동체는 이에 저항을 하고 있었습니다. 적당히 무마하고 통합하는 것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물론 요한공동체도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과는 행동을 같이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유대주의와의 관계를 주장하는 한, 그들과는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유대인과의 논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여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8:37-39
여기서 논점이 무엇입니까? 혈통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행위의 주된 결정은 혈통으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혈통과 행위 사이의 연관성에는 유대주의적 율법, 즉 유대적 혈통주의를 재생산하는 논리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논리에 의해서 배재와 폭력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에 의한 희생자가 요한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44절처럼 비난하는 것입니다. 혈통주의, 요즘으로 치면 세습하는 것을 당위로 여기고 다른 사람을 배재하고 짓누르는 일을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으며, 또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44절의 후반부를 이어서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주체성은 자기와 동종집단에게는 자명하고 그래서 편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된 이들에게는 고통이 된다는 것입니다. 춘천고등학교를 나온 동문회에서 춘천공업고등학교를 나온 존재는 이질적이고, 열등한 존재이며, 배재의 대상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사회 질서 속에서는 차이가 차등으로 작동합니다. 그게 바로 유대주의적인 혈통주의 율법속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야훼신앙의 위기를 그렇게 돌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위기신학이, 연약한 사람들에게는 폭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오클로스 공동체가 그랬고, 빌립의 사마리아 공동체도 그랬습니다. 요한공동체도 거기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 주류세력들은 다른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을 ‘신성모독’이라고 하며 배재했습니다(10:32). 그 말 한마디면 충분했습니다. 다른 논거도 없이, 그것 하나로 모든 배재의 이유가 설명되었고, 그것 하나로 온갖 폭력이 정당화 되었습니다. 나찌에 의한 유태인 학살이 일어날 때 오로지 ‘유태인’이라는 그 이유만으로 유태인을 죽여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 혈통주의가 교회 안에서 성찰 없이 수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그걸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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