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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6:36-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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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정직한 감정 위에 내리는 은총
마태복음 26:36-46
2007년 11월 17일(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여러 해 전에 미국의 한 경제 잡지에서 ‘돈에 대해서 당신은 얼마나 정직합니까?’라는 제목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설문 중에 하나를 들어볼까요?
‘공중전화가 고장이 나서 동전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밤거리여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 이 돈을 어떻게 하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59%는 주머니에 넣겠다고 했고, 20%는 돈은 자기가 가지되 전화국에 알려서 어느 공중전화가 고장이라고 말해 주겠다고 답했고, 20%만이 돈을 전화국에 돌려주겠다고 응답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 기도에 응답해주셨군요!”
어떠실 것 같습니까? 만약 여러분 자신의 정직성을 테스트한다면 몇 점이나 될까요? 이번엔 여러분들에게 조금 다른 질문을 해봅시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정직하십니까?
이것은 단순히 정직하게 죄를 고백하는 회개에 대해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생각, 의지, 감정에 대해서 정직한가 하는 질문입니다.
저는 교회를 보면서, 또 교인들을 보면서 가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수없이 설교와 교육이 이루어지는데 반해 정작 하나님께 대해서 정직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별로 없습니다. 그저 회개에 대해서만 정직을 말합니다.
그리고 교인들도 신앙에 어떤 의문이 들거나 이상한 생각이 들거나 믿어지지 않아도 아닌 척 합니다. 다 아는 척 합니다. 믿는 척 합니다. 그냥 믿어야 좋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힘들고 괴롭고 슬프고 아파도 괜찮은 척합니다. 꾹 참고 혼자 속으로 삭히고 맙니다. 그것이 인내하는 것이고, 그렇게 인내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성숙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도 아닌 척, 괜찮은 척합니다. 아니면 적당한 선에서 말하고 맙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정과 자세가 정직하지 못한 교인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것이 믿음이 좋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까요?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가인은 그 감정에 있어서 하나님께 정직하지 못했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동생인 아벨이 드린 제사는 받으셨는데, 가인이 드린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1:4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가인은 믿음없는 제사를 드렸고, 따라서 성의없는 제사를 드렸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그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 때의 가인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서운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잘못했어도 일단 거절 당하면 서운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를 거절하신 하나님께 서운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그 서운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겉으론 태연한 척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 있는 서운함은 점점 분함으로 바뀌고 그 분함이 결국에는 동생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그래도 그 감정을 숨기고 털어놓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 감정이 친동생을 죽이는데까지 가게 됩니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입니다.
만약에 가인이 그 서운한 감정을 하나님께 그대로 말하면서 정직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죠? 왜 제가 드리는 제사를 거절하신 거죠? 서운합니다. 저도 할만큼 했어요. 그런데 왜 안받으셨죠? 서운합니다.”라고 정직하게 고백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차분하고 인자한 음성으로 그 이유를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럼 가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다시 정성껏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생을 죽이는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서운함,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어찌 서운함이 없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서운한 것이 있고, 부부나 친구관계에서도 서운한 것이 있습니다. 목회자에게도 서운한 것이 있고요, 교인들간에도 서운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께 대해서도 서운할 때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고 봉사도 열심히 했는데 정작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상처입고, 혹은 자신이나 집안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어려움에 처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내가 잘 했든 못했든 그런 서운함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십니까?
아닌 척 합니까? 그 서운함을 가슴에만 두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이러실 수 있나?’하면서 그 서운함을 더 키웁니까?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것이든 사람에게 대한 것이든 서운함은 늘 우리를 따라 다닙니다. 이 서운함을 정직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표현해야지, 마음에만 두고 산다면, 그는 결국 그 서운함이 분노로, 시기와 질투로, 살인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때때로 하나님께 서운한 생각이 들면, 하나님께 그대로 들고 나가 아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실 것입니다.
반면에 그 감정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표현하여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엘리야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열왕기상 19:1-10에 보면, 엘리야가 하나님께 그 감정을 정직하게 쏟아놓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서 18장에 보면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결을 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신 중에 누가 참 신인지를 증명하는 영적 대결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엘리야가 승리했고, 그 승리로 인해 갈멜산에 있었던 바알 선지자들을 전부 잡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아합왕과 이세벨은 분해하면서 엘리야에게 사신을 보내어서 ‘내일 이 맘 때에 너를 잡아 죽일 것이라’고 알립니다. 이제 아합과 이세벨의 군대가 엘리야를 잡아 죽이기 위해 쫒아오는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을 갑니다. 그러다가 광야로 들어가 어느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하나님, 이제 다 끝났습니다. 내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를 죽여주십시오.”
왜 이랬을까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바알의 선지자들을 쳐 죽인 그 기개 넘치는 엘리야가 왜 이토록 나약한 모습이 되었을까요?
그도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해 왔는데,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대가는 자기를 죽이려는 아합의 군대였습니다. 이만큼 했으면 아합과 이세벨도 손들고 항복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더 악해지고 더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순간 ‘내가 지금까지 한 것이 무엇인가? 내가 지금까지 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자신이 한 모든 일들이 모두 헛된 것 같은 허탈감이 찾아왔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사람이 이렇게 자기 목숨 하나 건지겠다고 도망다니는 신세가 한심하기도 하고, 살아있다는 것이 구차하게 여겨졌습니다. 영적인 탈진 현상이 엘리야에게 나타났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지난 주 설교를 기억하시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엘리야는 그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대로 하나님께 내어놓습니다.
“하나님, 다 끝났어요. 지금까지 한 것 다 소용없어요. 내가 하나님께 순종해서 뭐가 달라졌어요. 달라지기는커녕 아합과 이세벨이 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나는 이렇게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고요. 이제 다 끝났어요. 이제 그만 두세요. 그리고 내 목숨을 거두어 주세요. 아합에게 잡혀 죽느니 하나님의 손에 죽는게 차라리 나아요.”
어찌 들으면 하나님께 대드는 것 같고 불경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엘리야의 솔직한 마음이고 감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런 엘리야에게 어떻게 대하셨다고요? 천사를 보내 로뎀나무 아래서 잠이 든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을 준비해서 먹게 하십니다. 그렇게 40일 동안을 보살펴주면서 엘리야를 하나님의 산 호렙산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호렙산에서 하나님은 엘리야를 만나시고 다시금 힘을 주셔서 당신의 일을 하게 만드십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엘리야의 그 정직한 감정 위에 하나님의 어루만지시고 치유하시고 힘주시는 은총이 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지금 가인과 엘리야, 두 사람에 대해 보았는데,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안받고의 차이입니까? 그 보다는 정직의 차이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다 쏟아놓는 정직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결과 엘리야는 다시금 회복되어 일어서는 은총을 받지만, 가인은 끝끝내 하나님과 동생을 원망하다가 자신의 동생을 죽이는 끔찍한 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게세마네 현장으로 가봅시다.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저녁식사를 드신 예수님은 체포되기 전에 게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기도를 하십니다. 기도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심정이 편치 않아서입니다.
37절에 보면 당시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나를 보여줍니다. “고민하고 슬퍼하사” 그리고 이어서 38절에는 세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심정이 너무나 괴로워 제자들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도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쏟아놓으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것도 세 번씩이나 그 괴로운 심정을 하나님께 정직하게 쏟아놓습니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이 바로 이것인데, 게세마네는 처음부터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너무나 마음이 괴로우셨던 주님께서 그 솔직한 감정을 그대로 쏟아놓으신 곳이 바로 게세마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보고 좀 실망스러워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아들인데...’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야 연약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아들답게 당당하고 용감하게 대처를 해야 하는데, 너무나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평소의 예수님답게, 믿음의 영웅답게 십자가의 고통이 아무리 극심한 고통이라고 해도 결코 물러서지 않고 쉽게 물리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는데, 그 어디에도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혹시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좀 실망스러우신가요?
우리가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인간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 전에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우리처럼 완전한 살과 뼈와 피로 이루어진 인간이셨습니다. 그리고 몸만 인간이셨던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가지는 모든 감정, 욕구, 의지, 생각, 한계를 다 가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철저하게 인간이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통 앞에 두려워하고,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갖는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것을 느끼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의 연약한 인간으로서 그 모습 그대로, 그 감정 그대로 하나님께 쏟아놓으신 것이 바로 게세마네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렇게 철저하게 인간이셨던 이 모습 속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써 당당하게 그 길을 가셨다면 그건 인간이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고통 없이 당한 것 밖에 않됩니다. 하나님이 무슨 육체의 고통을 느끼고 죽음의 고통을 맛봅니까? 그것은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고통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죄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써 우리를 대신해서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죄값으로 달려 죽어야만 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으로써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십자가의 모습에서 하나님으로서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나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만 있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 위에 우리의 구원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저는 철저하게 연약한 인간의 감성을 가지신 예수님을 보면서 오히려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습니다. 너무나 인간적이셨기에 저는 예수님이 좋습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가깝게 느껴집니다.
만약 무슨 슈퍼맨처럼 당당하게 십자가 어깨에 턱하니 짊어지고 갔다면, “야, 십자가 줘봐. 뭐, 가볍네. 가자.” 뭐 이런 식으로 하셨다면 저는 예수님이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을 겁니다.
나와 똑같은 감성을 가지신 예수님, 나와 똑같은 연약함을 가지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왭니까? 주님이 나를 이해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나와 똑같은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고, 두려움과 아픔을 경험하시고, 연약함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나를 이해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파서 쓰러져 있을 때, 내가 두려워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때, 내가 결단하지 못하고 미적미적하고 있을 때, 내가 외로워서 힘들어 할 때, 내가 다 탈진되어 헉헉거릴 때, 예수님은 나를 보시면서 “너 이것 밖에 안되니? 이렇게 형편없니? 이렇게 약하니? 이 정도도 못 견디니?”하시면서 꾸짖는 분이 아니십니다.
나를 보시고 조금도 꾸짖지 아니 하시고 나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힘들지. 나도 알아. 나도 너와 똑같이 아파봤어. 나도 외로와서 마음이 아팠어. 나도 정말 괴로워 죽을 것 같았어. 괜찮아. 힘내. 내가 있잖아. 내가 너를 이해하잖아. 내가 너를 도와줄게. 괜찮아.”
이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것에 감사합시다. 거듭 고백하지만 주님이 계시기에 나는 존재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 앞에 정직하세요. 회개 기도하는 것 말고도, 여러분의 감정과 생각에 있어서도 정직하세요.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숨김없이 그대로 쏟아놓을 때 주어지는 은총이 무엇일까요?
우선은 그 아픈 부분이 치유되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혼자만 끙끙 앓던 문제를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고백했을 때 우리는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상담을 하시는 분들을 보면 상담자에게 솔직하게 다 털어놓는 그 자체로 내담자들이 상당 부분 치료된다고 합니다.
속에 숨겨놓은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건강하지 못합니다. 혼자 끙끙 앓고 있는 사람은 건강할 수 없습니다. 털어놓으세요.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으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털어놓으세요. 꾸밈없이 그대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 문제를 하나님께 털어놓으세요. 그러면 우리 안에 무언가 막혀있던 것들이 후련해지고 치료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정직한 감정으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푸세요. 그래야 우리의 상한 감정이 사탄의 시험 꺼리가 되지 않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상한 감정을 공격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신 겁니다. 그 상한 감정 그대로 하나님 앞에 들고 나아가서 털어놓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많이 우세요. 아프면 아프다고 하세요. 힘들면 힘들다고 하세요. 말 많이 않해도 좋아요. 그냥 울기만 해도 좋아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치유의 기능을 주셨는데, 그것은 정직과 눈물입니다. 사람은 정직할 때 건강해져요. 정직할 때 치유가 됩니다. 그리고 눈물이 우리의 상한 감정을 치유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렇게 속상하고 억울하고 아프다가도 울다 보면 치유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세요. 하나님 앞에서 점잖은 척 하지 말고, 아닌 척 하지 말고 우세요. 그 눈물 속에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은총이 있습니다.
새벽기도나 기도회 때 우는 사람들 있지요. 어떤 사람들은 그럽니다. 왜 저렇게 우느냐고 짜증난다고... 아니예요. 우세요. 울면서 솔직한 감정을 하나님께 쏟아놓으세요. 그 분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내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람어인데 ‘아바’라고 합니다. 우리 말의 아빠와 아바의 중간음 정도됩니다. 그런데 이 아바라는 말은 어린아이들이 아버지에게 친하게 부를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 말로 아빠라고 하는 그런 느낌의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 하나님을 이렇게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아바’라고 부른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바라고, 우리 말로는 아빠라고 했을 때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나를 아시는 아버지,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나를 꾸짖지 아니하시는 아버지, 한없는 사랑과 인자하심으로 나를 받아주시는 아버지, 내가 솔직하게 내 감정을 쏟아놔도 그대로 받아주시는 아버지... 그런 마음으로 아바라고 부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아바라고 부르셨던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나의 아바, 나의 아빠이십니다. 내가 솔직하게 내 감정, 내 생각, 내 의지를 말한다고 해도 결코 꾸짖지 아니하시는 아빠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아버지 하면 왠지 어렵고,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엄격한 아버지였거나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는 사람은 더욱 그럴 겁니다. 그 아버지의 이미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부르셨던 아버지, 예수님이 가지셨던 그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하세요. 예수님의 아빠가 곧 나의 아빠입니다. 아빠에게 이해가 안된다고, 알려달라고 물어도 보고, 때로는 이렇게 해달라고 때도 쓰고, 때로는 그 넓은 가슴에 안겨서 울기도 하고, 아빠 앞에서 한없이 좋아하는 그런 어린 아이 같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저는 그런 아빠이신 하나님을 청년 때 알았어요. 물론 지금도 하나님은 여전히 거룩하시고 내가 경외하는 하나님이셔요. 그러나 그분은 동시에 나와 친한 아빠가 되십니다. 저는 청년 때 기도하면서 참 많이 울기도 했고, 속상하고 답답해서 하소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하나님이 정말 나의 아빠구나, 예수님이 부르셨던 그 아빠이시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저는 그냥 울 때가 많아요. 그냥 솔직하게 제 생각, 제 감정을 털어놓습니다.
“아버지, 저 힘들어요. 저 많이 아파요. 저 이것 때문에 요즘 힘들어요. 저 이게 이해가 안되요.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이러면서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저를 만져주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기도하면서 우는 분들을 보면 예뻐보여요. 기도하면서 울지는 않더라도 솔직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분들을 보면 참 마음이 가요. 반면에 괜히 아닌 척, 건강한 척, 괜찮은 척, 점잖은 척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내가 봐도 힘들 것 같은데 아닌 척해요. 내가 봐도 아픈데 아닌 척 안 아픈 척 해요.
하나님께서 보실 때 누가 더 예뻐 보일까요? 아프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힘들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면서 그러실꺼예요.‘그래, 너는 아빠가 누군지 아는구나’
생각해 보십시오. 아빠에게 솔직한 자녀가 더 예쁘게 보이잖습니까? 만약에 우리 집 아이가 어디가 아픈데 안 아픈 척 해봐요. 예쁠까요? 안예뻐요. 아프다고 울고 도와달라고 해야 예쁜 거에요. 아빠되신 하나님 앞에 솔직하시길 바랍니다. 두렵고 거리가 먼 아버지가 아니라 나를 아시고 나를 다 받아주시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빠되신 하나님으로 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한 감정을 가질 때 그 위에 하나님의 어루만지시고 치유하시는 손길이 임하게 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정직한 감정을 쏟아놨을 때 하나님은 그를 어루만지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그 괴로운 심정을 그대로 쏟아 놓으셨을 때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이 예수님께 임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했고, 그 서운함을 가슴에 품다가 그것이 시기와 질투가 되고 분노가 되어서 동생을 죽이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정직한 감정으로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기도가 드려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 기도를 하셨는데, 첫 번째 기도는 솔직하게 그 감정을 쏟아놓은 것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의 은총이 임했고, 두 번째 기도와 세 번째 기도에서는 여전히 나의 감정과 생각이 있지만, 이제는 내 의지, 내 생각, 내 감정이 아니라 아버지의 의지, 아버지의 생각, 아버지의 감정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나의 생각과 의지, 감정을 털어놓을 때 그 상한 감정을 어루만지시고 위로하시고 회복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내 생각, 내 의지, 내 감정이 아버지의 것으로 채워지는, 그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구하는 감정으로 바뀌게 되는 은총이 임하게 됩니다.
정직한 감정 위에 내리는 은총, 이러한 은총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기를 소원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른비와 같이 내리기를 아빠되시고 친구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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