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창4:1-12 |
---|---|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4장 1절-12절.
1절-12절: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첫날은 가견적인 싸움 또 불가견적인 싸움 즉, 눈에 보이는 싸움과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우리는 이 싸움을 모르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인간과 뱀과의 싸움을 창세기에서 봤지요?
이제 인간과의 싸움이 되겠어요. 가인과 아벨과의 싸움입니다. 또 가인과 아벨뿐만이 아니고 인인간의 싸움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는 모세를 죽이려고 하지만 공주는 모세를 안 죽이려고 하는 싸움. 그러니까 의사 대립적인 싸움이 있다. 그리고 부모형제 간의 싸움이 있습니다. 사실은 부모형제가 싸울 처지는 아닌데 싸운다 그 말이요. 왜 싸울까? 부모형제가 싸울 처지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싸우느냐 그 말이요. 싸우는 이유는 의사 단일성이 아니기 때문에 싸운다 그 말이요. 의사성이 달라. 의사성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목적성이 다르다 그 말이요.
인간끼리 싸우는 것은 인간이 많기 때문에 싸우느냐? 그건 아니지요. 인간이 아무리 많아도 의사 단일성만 되면 싸우지를 않지요. 그런데 인간이 둘이만 있어도 싸웁니까? 의사 단일이 안 되면 싸운단 말이요.
오늘 성경 본문에 보면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과 아벨 이 사람들만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더 있습니다. 그건 왜 그런가 하니 성경이 역사를 가르쳐줄 목적이란다면 낱낱이 기록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계시목적으로 기록이 됐기 때문에 가인과 아벨, 또는 다른 데는 아브라함 이삭 이렇게만 나온다 그 말이요.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이 가인에게 그랬지요? 가인을 죽이는 자는 칠 배의 형벌이 있겠다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지요.
성경은 역사책이 아니라 계시기록 목적으로 기록이 됐기 때문에 계시목적에 등용된 그들의 이름만 기록이 됐다 그 말이요. 그들의 활동은 계시목적에 의한 활동영감의 감화에 의해서 움직인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성령을 받아 움직이면서 ‘내가 하는 이 활동은 훗날에 성경에 기록될 활동들이다’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한 거냐? 그건 아니란 말이요. 그런데 활동영감의 감화로서 그 사건을 일으키고, 성령의 역사로서 그렇게 사건을 진행시키고, 성경에 기록이 되는 것도 기록영감의 감화로써 되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역사적으로 맞느냐, 안 맞느냐?’ 하고 보게 되면 마태복음의 족보장을 볼 때도 안 맞아요. 그런데 성경은 계시기록 목적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계시에 맞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기록케 한 것이라 그 말이요.
우리는 부모형제 간이라도 조심을 해야 한다. 마태복음 10장에 부모형제들끼리 싸우는 싸움이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리를 양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그랬습니까,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그랬습니까?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 그러니까 조심해야 된다. 너를 둘러싸고 있는 모두는 이리로 생각을 해라 그 말이요.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조심을 하라 그 말이요.
아벨은 형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나 부모에 대한 불평과 불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패배가 되었는데, 이 아벨은 마음속에 원통함이 생겼어요. 무슨 말인가 하니 어머니 아버지가 에덴동산에서 싸웠는데 이 어머니 아버지가 패배를 당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마음에 통분이 온다 그 말이요. 원수를 갚을 뭔가가 마음속에서 올라온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는 누가 패배를 했던 분통이 터지는 울음을 울 줄 알아야 한다. 아벨의 경우 그렇게 통분한 마음을 갖는 것은 영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믿는 자로서 어떤 기독자가 누구에게 핍박 환난을 당해서 죽었다고 그러면 거기에 대한 마음에 뭐가 있어야 된다 그 말이요. 아무런 느낌이 없는 있을 수 없다 그 말이요. 마음에 안타까움이라든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어떤 그런 마음이 속에서 일어나야 된다 그 말이요.
아벨은 생에 대한 목적이 어머니 아버지가 실패한 실락원 회복을 원했단 말이요. 즉 에덴동산을 그리워했어요. 가인은 부모가 말하는 것을 듣지를 않았으나 아벨은 잘 들었단 말이요. 그러니까 지금으로 말하자면 그 에덴동산의 사건을 아담이 가인과 아벨에게 들려주었을 텐데, 그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까? 그런데 가인은 그 말을 안 듣는단 말이요. 믿어지지가 않는단 말이요. 그런데 아벨은 그 말을 믿어.
그러니까 그 말을 들으면서 아벨은 생애목적에 대한 목적의식이 뚜렷하다. ‘부모가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야 되겠다.’ 마음뿐만 아니고 정신력도 ‘어떻게 살면 실락원을 회복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아벨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우리 기독자는 그래야 되겠지요? 각자 자기는 파도를 헤치면서 앞으로 나가는 작은 조각배에 불과한 존재이지만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그 말이요.
우리가 그림이라든지 영화라든지 뉴스를 들을 때도 그런 게 있잖아요.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이 그 험한 파도를 헤치면서 나가는 것은 목적이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요? 목적이 없으면 갑니까? 있을 수가 없지요. 다윗도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았고, 요셉도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았고,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신앙 면에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산다면 그 사람은 기대해볼만 하다. 에스더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내 동기 내 부모형제가 예수 믿는 나를 무시한다고 해도 피눈물을 짜면서까지 라도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자 그 말이요.
그런데 그렇게 살다보면 뭐가 올까? 뭐가 오느냐? 행복이 올까요? 그렇게 살다보면 누가 오느냐 하면 가인이 온다 그 말이요. 그러나 아벨은 형이 오든 말든 자기 길을 갑니다. 형과 동생이 같이 살지만 목적의식은 전혀 다릅니다. 똑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만 속이 전혀 다르다 그 말이요. 질이 달라.
사욕이 강해지면 진리와 선도 사랑도 의리도 말살이 되고, 형제 우애도 저버려지고, 폭력이 나오게 되고, 살인이 나오게 됩니다.
이 가인은 형제애의 살인자요 골육상쟁의 조상입니다. 그러니까 그 후대가 하나 둘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으니까 종교적인 면에서의 살인자의 조상이 또 되는 겁니다. 참 이거.
5천 년이 지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하는 말들이 뭐라고 하는가 하니 가인이 그렇게 된 것은 ‘제사에 관계가 있다. 제사에 관계가 있어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 그렇게 말하지요. 그러니까 가인은 뭐가 없는 제사고, 아벨은 뭐가 있는 제사? 아벨은 피가 있는 제사, 가인은 피가 없는 제사.
그러나 이건 제물이 문제가 아니고 마음자세가 문제라 그 말이요. 아벨은 죗값은 반드시 지불이 돼야 된다고 하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 죽을 대신 양을 죽인 것이고, 가인의 제사는 그 성격이 뭐냐 하면 시은자입니다. 시은자가 뭐지요? 수은자 시은자가 있는 건데 시은자로서, 베푸는 자로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겁니다. 시은성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그 대가로 하나님께 축복을 더 달라고 하는 겁니다. 가인의 제사 속에는 그게 들었다 그 말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안 받았어요. 그런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에게 주시는 복을 빼앗기 위해서 자기 아우를 죽여 버린다 그 말이요.
아벨은 최초 순교의 영광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니 아벨은 옳으면 옳으니까 죽음이 올지라도 나 혼자라도 간다 그 말이요. 이런 아벨에게 가인이 돌변해 올 때에 아벨은 가인을 향해서 아무런 정죄나 대립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벨이 들판까지 따라가 줬단 말이요.
아벨의 그 신앙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지요. 그렇지요? 또한 아벨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렸고, 또 부모의 마음을 알아드린다 그 말이요. 아벨의 신앙이 그렇단 말이요. 그러나 가인은 그게 없다 그 말이요. 알아드리는 게 없어.
에덴동산에서 아담 하와가 내쫓기고 난 뒤에 쫓아내신 하나님의 심정이 오죽했겠느냐? 말하자면 에덴동산 밖으로 내쫓아 내놓고 하나님의 마음이 편했겠느냐 그 말이요. 누가 그렇게 생각하느냐 하니 아벨이 그렇게 생각을 한단 말이요.
형은 무력적이고 완력적이고 폭력적이고 살인적입니다. 그런데 동생은 여기에 대한 아무런 준비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인과 아벨을 보면 패자 같은 승자가 있는가 하면, 승자 같은 패자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걸 보는 거지요. 아벨은 패자 같은 승자지요? 우리 주님도 패자 같은 승자란 말이요. 겉으로 볼 때는 패자 같으나 이면적 정신 사상적 신앙적으로 들어가면 승자란 말이요. 죽을지언정 그 말이요. ‘죽더라도 죽을지언정 이것만은 안 빼앗기겠다’ 하는 그거. 죽으면 그 신앙의 마음을 뒤따라 와서 빼앗을 수가 있어요? 못 빼앗지요. 그러니까 그건 이긴 거지.
바울은 로마를 이겼습니까? 다니엘은 바벨론을 이겼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면류관을 주겠느냐 그 말이요. 로마에게 면류관을 줄까요?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에게 면류관을 줄까요? 그렇지 않단 말이요.
우리가 형제간 인인간의 싸움에서 신앙 면에서 ‘죽더라도 이것만은 내놓지 않겠다. 죽더라도 이것만큼은 내가 이기겠다’ 하는 그게 있어야지요. 그게 신앙이요, 그게 진리요, 그렇게 예수 믿는 그게 값있는 거지. 그렇지 않아요? 안 그러면 신앙이라는 게 말이 안 붙잖아요. 육신적으로 싸워서 이기는 걸 승리라고 말한다면 예수 안 믿어도 그런 싸움은 다 싸울 수 있잖아.
기도 올립시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싸운 싸움. 가견적 싸움 불가견적 싸움, 인간과 뱀과의 싸움, 인인간의 싸움을 저희들은 보고 있습니다. 아벨은 패자 같으나 승자요, 가인은 승자 같으나 패자가 돼버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님도 패자 같이 보이나 분명한 승자입니다. 이 승자의 그 정신 사상을 가지고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모든 면에서 이기고 나갈 수 있도록 명철한 지혜와 총명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 어떤 면이 다 빼앗기는 한이 있더라도 이 진리정신 신앙사상만큼은 빼앗기지 아니하는 승리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