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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4: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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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13년 3월 31일 http://dabia.net/xe/660206 |
정용섭 목사
생명과 죽음
누가복음 24:1-12, 부활주일, 3월31일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오늘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날을 가리키는 부활절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절에 기초해서 시작되었고 지금도 유지됩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이유도 부활에 놓여 있습니다. 부활절 없는 기독교는 성립이 안 됩니다. 이 사실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으며 인정합니다. 문제는 부활이 기독교인의 실제 삶에서 별로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일 년에 한번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끝납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에게는 오히려 부활절이 불편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 능력,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까지는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없지만 부활은 좀 곤혹스럽습니다. 믿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기독교인을 자처하면서 믿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믿기 힘든 이유는 부활이 자신들의 세계 경험과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썩습니다.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몸도 썩었을 겁니다. 썩지 않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이 겪는 모든 과정을 그대로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의 몸도 당연히 썩어야만 했습니다. 썩은 몸이 다시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객관적 사실에 어긋납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기 힘들어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사실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을 믿은 제자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은 둘째 치고 자신들이 메시아로 믿고 있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몇 번에 걸쳐서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에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런 흔적이 복음서 곳곳에 나옵니다. 그중의 하나가 오늘 우리가 제3독서로 읽은 눅 24:1-12절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평소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이 시체에 바를 향품을 준비해서 예수님이 묻힌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 무덤은 아리마대 사람인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묻었던 돌무덤이었습니다. 요셉의 가족 무덤으로 추정됩니다. 무덤에 당연히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자들이 얼마나 당황스러워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어떤 사람이 훔쳐갔을지 모른다고 걱정했을까요? 그 순간에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나타났습니다. 어떤 일상을 뛰어넘는 어떤 이질적인 힘의 출현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런 존재를 천사라고 말합니다. 여자들은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두 사람이 여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5절) 여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발언입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당연히 무덤에 묻혀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라고 말하는 겁니다. 천사들의 발언이 계속됩니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6절)갈릴리에 계실 때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고 하면서, 주님이 이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무덤 안에서 이런 발언을 들은 여자들은 천사의 말을 한편으로 수긍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전혀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사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자들의 말을 전해들은 사도들의 반응은 어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겠지요. 사도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다만 제자들 중의 하나인 베드로는 긴가민가해서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시체가 놓였던 돌판에 수의인 세마포만 놓여 있었습니다. 이런 장면이 상상이 되시나요? 이상한 장면입니다. 그걸 보고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으로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그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무덤에 시체가 없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확인한 사람들이 여자라는 것입니다. 네 복음서가 이 사실을 똑같이 말합니다. 향유를 예수님에 발에 부어 장례를 미리 준비한 마리아도 여자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제일 먼저 알게 될 사람들도 혹시 여자들은 아닐까요? 이 여자들이 무덤에 제일 먼저 간 이유는 부활을 예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빠뜨린 장례절차를 밟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무도 부활의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네 복음서 중에서 어느 하나도 부활 장면을 말하는 복음서가 없습니다. 현장을 목격하지 못한 사람들의 주장은 신뢰받기 어렵습니다. 못 보았다고 하더라도 본 것처럼 말해야만 사람들이 관심을 보입니다. 만약 복음서 기자들이 그런 부분을 염려해서 보충하려고 했다면 이렇게 상상력을 발휘해서 말했을 겁니다. 새벽이 가까운 시각에 천사들이 무덤 안에 나타나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시체 주위를 춤을 추며 돌았습니다. 그러자 불길이 하늘에서 무덤 안으로 들어와 죽었던 예수님의 시체를 휘감았습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눈이 열리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런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사건에 휩싸였다는 사실만 두서없이 전했습니다. 그게 부활 보도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그런 경험을 그 어떤 논리로도 납득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해를 받는 한이 있어도 그 경험을 아무런 해석 없이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복음서 기자들의 보도를 옳게 따라가려면 우선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부활에 대한 성경 이야기는 혼란스럽게 들릴 겁니다. 무덤에서 천사는 여자들에게 살아있는 자를 왜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말했습니다. 도대체 살아있는 자는 누구 무엇이고, 죽은 자는 누구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모두는 죽습니다. 여기서 예외가 없습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들의 운명은 모두 죽음으로 귀결됩니다. 죽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입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그것을 전제하고 그 아래서 나름으로 살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이건 그렇게 사변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적인 겁니다. 요즘 웰빙이니, 웰푸드니 하는 말들도 다 죽음 이전의 문제입니다. 건강과 외모를 위한 투자, 풍요로운 복지생활을 위한 노력도 다 죽음 이전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일 년 뒤에, 또는 한 달 뒤에 죽는다면 그런 것들이 다 쓸데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죽음을 조금이라도 뒤로 물리려는 노력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모든 행위는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한 말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무엇인가를 찾으며 다닙니다. 그런 방식의 삶을 살아있다고 말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죽은 이를 장사지내고, 그가 죽으면 또 살아있는 사람이 장사를 지내줍니다. 이렇게 본다면 무덤이 바로 우리 삶의 생생한 현장입니다. 우리 삶의 조건을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도 오늘 우리는 죽음의 힘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두 주일 전에 저희 가족은 영천의 한 시골 마을로 이사했습니다. 저의 서재는 이층에 있습니다. 서재 서편으로는 산이 바짝 붙어 있습니다. 창문 밖으로 손을 뻗으면 대나무와 참나무가 손에 잡힐 듯합니다. 그 뒤로는 무덤들이 있습니다. 오랜 된 무덤도 있고, 작년에 새로 생긴 무덤도 있습니다. 봉분 윗부분이 보일 정도로 우리 집과 무덤이 가깝습니다. 제가 집을 이층으로 지은 이유는 그 무덤을 가깝게 느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중세기 사람들은 ‘메멘토 모리’라는 글자를 그릇이나 가구에 문양으로 새기곤 했습니다.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죽음을 접어놓고는 우리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죽음 안에 갇혀 있습니다.
복음서와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말할 때 ‘죽은 자 가운데서’라는 구절을 꼭 붙입니다. 그게 형식적인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할 때 반드시 필요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 말은 예수님이 가사 상태에 빠졌다가 정신을 차린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임사체험은 실제 삶에서도 가끔 일어납니다. 심지어 관에 들어갔다가 살아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소문들은 죽음에 가까이 간 것뿐이지 실제로 죽은 것은 아닙니다. 죽었다는 말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죽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 실제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거기서 다시 살아날 수는 없습니다. 다시 살아난다면 그건 죽은 게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은 단순히 다시 살아났다거나, 또는 죽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 죽었지만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리시나요? 여기 씨앗이 있습니다. 얼마 후에 씨앗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었습니다. 씨앗과 꽃을 비교해보십시오. 씨앗 속에 꽃이 들어 있었을까요? 씨앗을 칼로 자르면 그 안에서 꽃이 나올까요? 씨앗에서 꽃이 된 것을 가리켜 질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의 변화를 가리킵니다.
씨앗과 꽃, 또는 달걀과 병아리를 예로 들으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제로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그렇게 받아들이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씨앗이나 달걀은 우리가 대상으로 살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부활 생명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실존 자체가 이 세상의 삶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배가 고프면 견디지 못합니다. 실연당하면 외롭습니다. 병들면 고통스럽습니다. 돈벌이가 시원치 않으면 무기력해집니다. 티브이와 신문을 통해서 바라보는 세상은 모두 이런 일들로 뒤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마치 아수라장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삶입니다. 그리고 소중한 삶이기도 합니다. 이런 삶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그런 것들은 다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가능한 생명입니다. 잠정적이고 무상합니다. 바람처럼 지나갑니다. 그게 이 세상의 한계상황입니다. 이런 세상의 삶에 파묻혀 있어서 부활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마치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말하듯이 동굴 안의 사람들은 동굴 밖의 세계를 아무리 설명해줘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이건 믿음, 인격, 진정성, 지식과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생명의 인식에 대한 근본적인 혼란에서 오는 문제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혼란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오해하고, 의심하고, 변질시키고, 더 나가서 기독교 신앙 자체를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부활을 막연하게 여기면서 신앙생활을 할 겁니다.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대답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됩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서 더 이상 설명할 자신이 없습니다. 이렇게는 분명하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부활이 멀게 느껴진다면 기독교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모든 신앙생활이 헛수고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고전 15: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사들이 여자들에게 한 말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제 생명의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질적으로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그 생명을 죽음의 연장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죽음은 모든 개인과 인류 문명의 미래입니다. 그것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방식으로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우리 자신이 노력해서 성취하는 게 아니라 창조의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으로 받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현현 앞에서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차츰 그 부활 신앙의 빛에 휩싸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시야가 뚫려서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부활 생명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점점 더 밝게 보게 되었습니까? 더 이상 죽은 자를 찾는 게 아니라 산 자를, 즉 죽음의 문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찾게 되었습니까?
지금 살아오던 길을 잠시 멈추고 우리의 영적인 자리가 어딘지를 한번 살펴보십시오. 죽은 자들, 죽어야 할 자들, 죽을 것들에 대한 흥미로만 가득한 자리인지 아닌지를 살펴보십시오. 죽음의 세상을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거기서 미혹당하지 마십시오. 죽은 자는 죽은 자가 장사를 지내도록 맡겨두십시오. 우리는 살아있는 자를 찾아야 합니다. 생명을 찾아야 합니다. 그 생명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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