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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6-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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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2.12.18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트랜스포먼스]로서의 성탄
눅 1:26-38
*이 설교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방송인지는 모르지만, [마의]라는 드라마가 이해를 돕는다. 천민인 그가 넘어서려는 사랑과 삶이 모두 [트랜스포먼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께로부터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동네로 보내심을 받아서 다윗의 가문에 속한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로 갔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26-27절).
가브리엘이 하나님께로부터 갈릴리 나사렛“동네”로 갔다고 하는 의미는, 가장 높으신 분이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갈릴리의 가장 작은 곳에 오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럴 때 이 행위는 기존의 상식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천사가 처녀 마리아에게 갔습니다. 이것도 당시의 사회적인 통념을 빗겨서는 일입니다. 당시 낮은 여성의 지위와 특히 시집가지 않은 처녀가 철저히 아버지에게 속하였음을 생각해 볼 때, 이것 자체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은혜를 입은 사람아,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라고 합니다. 은혜는 아무나 입는 것입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처녀, 그것도 시집가지 않은 처녀에게 은혜가 임하고 있으니 이 또한 상식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을 넘어서서 뜻밖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고 축복하는 말을 하고 있지만, 사실 마리아 입장에서는 까무러칠 일입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갖게 되고 배가 불러오면 동네 사람들로부터 질시를 받을 수 있고 약혼자 요셉에게도 어렵게 설명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당시의 법으로는 죽음을 당하는 일입니다.
“보아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는 위대하게 되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다”(31-32절).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이죠. 이름 자체가 탄생의 의미를 다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에서는 이사야를 따라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에서도 28절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한 것처럼, 마태에서는 아이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여 예수의 구원하시는 행동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일으키시는 행동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32, 33절은 바로 이스라엘이 다윗 왕조에게 가졌던 꿈입니다. 약소국의 설움을 딛고 주님의 힘으로 세워진 왕위가 굳건해지고 무궁발전하는 비전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기 예수에게서 이루어진다고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장차 그녀에게서 성취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아,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28절).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리아야,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30절).
우린 은혜를 입었다고 하면 흔히 부를 얻게 되거나 일이 잘 되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나를 쓰신다는 의미가 강하죠. 지금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혼자서 하지 않으시고 마리아를 통해서 하십니다. 하나님이 마리아를 필요로 하시고 쓰시는 겁니다. 그것이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신다는 자각, 이것이 진정 크리스천의 사명 의식의 출발점이라는 말입니다. 저 높은 하나님이 가장 낮은 나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내게 있는 재능을 보시고 주님의 해방하는 일에 나를 쓰시기 위해 내게 오시고 내 마음과 신체에 변화를 일으키시고 새로운 역사를 이룩해 가시는 것, 이것이 은혜이고, 이것이 크리스마스를 통해 알아야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계몽주의 이후로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만 합니다. 기적 이야기들은 합리적으로 해석해서 사실이 아니라고 하거나, 귀신이 쫓겨나는 것은 미신이라고 하거나,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배격해 버립니다. 성서는 온통 이해하기 힘든 기적 이야기 불가능한 일들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마리아를 통한 예수의 탄생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상으로 하는 모든 행위를 ‘퍼포먼스’라고 합니다. 밥 먹고, 돈 벌고, 옷 사 입고, 싸우고, 화내고, 사랑하고,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자고 뭐 이런 관습적인 행위들은 일절 ‘퍼포먼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시는 짧은 생애 동안에 만났던 많은 일들, 이를테면 거사라 귀신들린 사람이 자해하고 괴로워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식민지 지배하의 억압받는 사람들이 보이는 하나의 퍼포먼스요 귀신의 퍼포먼스입니다. 제가 어릴 때 아이들마다 머리에 종기가 많이 나서 집집마다 골칫거리였는데, 이런 것들이 시대적인 퍼포먼스이듯이, 당시대의 거라사 귀신들린 사람은 그 시대가 만들어낸 퍼포먼스인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그 일상적인 퍼포먼스에 뛰어드셨어요.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당시의 사회적인 정황에서의 귀신의 퍼포먼스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퍼포먼스를 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그들의 퍼포먼스를 바꾸었다는 의미에서 트랜스포먼스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맡고 있던 기성의 삶의 역할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이 귀신축출, 기적, 세례, 거듭남의 의미인 것이죠. 예수의 탄생에서부터 삶은 기존의 가치와 양식을 뒤집어엎어 버리는, 사람들이 습관처럼 하는 퍼포먼스 속으로 들어가 그걸 확 깨버리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걸 [트랜스포먼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탄은 그 퍼포먼스의 세상으로 들어와 그걸 뒤집어엎어 버리는 변화 즉, [트랜스포먼스]라는 것이죠.
우리는 연속극을 보면서 어느 정도 거기 빠집니다. 학교를 다니고 군대를 갔다 오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세상의 입맛을 따라 삽니다. 그것은 삶에 있어서 하나의 퍼포먼스입니다. 그 퍼포먼스를 잘 하지 못하면 왕따를 당하고 이 사회에서 살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런데 그 퍼포먼스가 그대로 가면 새로운 가치나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퍼포먼스대로라면 재앙과 멸망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래서 트랜스포먼스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가담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용기 있게 그 길을 나서는 사람이 바로 예수의 기적에 가담하고 예수가 주시는 새로운 트랜스포먼스에 자기 역할을 맡는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마리아는 바로 그 트랜스포먼스에 가담한 예수시대 최초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교적부를 쓰고 일정한 봉헌을 하고 성경 지식을 배운다는 것 이상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나와 상관없는 위로부터의 영과 능력에 힘입어 기존의 퍼포먼스를 버리고 트랜스포먼스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게 세상의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리아에게 갑자기 다가온 천사의 소식이었습니다. 그의 몸에 아기가 생기고 출산준비를 해야 하고 결혼을 깨야 할지도 모르고 동네에서 추방되고 죽게 될 엄청난 위험이 그녀에게 맡겨진 트랜스포먼스였습니다. 천사는 마리에게 완전히 딴 역할을 맡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크리스마스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기존의 퍼포먼스를 버리고 트랜스포먼스를 하지 않는 한 대림절은 의미가 없습니다. 크리스마스는 그저 일상적인 절기에 그치게 됩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의 여종입니다. 천사님의 말씀대로 나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여종(douule)이라는 말은“여자노예”라는 뜻이며, 사회에서는 굴욕적인 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사명을 받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모세, 여호수아, 드보라, 한나, 다윗과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종으로 고백하면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어 주님의 하시는 일에 나 같은 사람이 쓰임 받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여자들이 집안에서 종처럼 지내면서 자기 존재도 없던 시절에 하나님 앞에서 저는“주님의 종입니다”하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마리아가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족보에는 여인의 이름이 넷 나오는데(다말 룻 라합 우리야 아내) 다들 기존의 가부장주의를 깨뜨리는 용기 있는 인물들입니다. 그 여인들이 결혼한 여인들이었다면,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그런 용기를 가졌다는 점에서 더욱 놀랍지 않습니까?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였다”고 노래하는 <마리아 찬가>(눅 1:46-56)를 보아도 그가 얼마나 용기 있고 깨어 있는 여인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탄과 맞물려 새해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희망의 성탄과 새해를 맞이합니다. 그 해가 그 해라는 식의 푸념과 회한과 한탄의 망년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구태의연한 퍼포먼스에서 우리를 선택하고 불러주시고 새로운 트랜스포먼스를 맡게 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약하고 작은 내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는 것을 감사하고 또 새 일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고 그렇게 사는 퍼포먼스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를 일궈가는 트랜스포먼스로 살아갈 결심과 깨달음이 필요한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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