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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로 내 고난이 끝났다고 말하지 말라

고린도후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709 추천 수 0 2013.04.10 19:3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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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후1:3-7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3.3.7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그리스도로 내 고난이 끝났다고 말하지 말라  
고후1:3-7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 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출 3:7-8).

이것은 호렙산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특징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곧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바로 그 현장에 내려 오셔서 구원활동을 개시하시는 분이시라는 겁니다(삼상 9:16을 참조).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는 홍해 바다가 있었고, 홍해 바다를 건넌 다음에는 다시 40년의 광야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고난을 겪은 다음에 그들은 비로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고난 받은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거나 감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단어는 지금도 [기억하라]입니다. 도시 곳곳에, 교과서에 이 글귀는 유언처럼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고난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그것을 잊지 않아야만, 그들을 건져 주신 하나님을 잊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출애굽을 기념하여 유월절 기간 이레 동안 누룩 넣지 않은 빵을 먹는데, 이것을 “고난의 빵”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먹는 것은,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의 일을 그들이 평생토록 기억하게 하려 함이다”(신 16:3). 그들은 이 고난의 빵과 함께 쓴 나물을 먹습니다(출 12:8, 민 9:11). 이는 중국의 월(越)왕 구천이 오(吳)왕 부차에게 당한 패배를 잊지 않기 위해 쓸개를 핥았다고 하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에 고국에 남은 백성들이나 끌려간 사람들은 고난이 극에 달했고,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예언자 이사야는 그런 민족의 고난을 대신 짊어질 ‘고난의 종’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고난을 이길 사람이 바로 ‘고난의 종’이라는 겁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 53:3-7).

이유가 있는 고난이라도 견디기가 힘든데, 아무런 죄도 없이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은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일입니까! 그런데 앞으로 나타날 메시아가 바로 그런 고난을 짊어질 이라고 합니다. 메시아라면 슈퍼스타처럼 하늘을 날고 권력자들을 속 시원하게 해 치우는 모습이어야 할 텐데, 어찌하여 꼼짝도 못하고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는 모습으로 온다는 것입니가?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끌려가서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일을 겪지 않았다면, 이사야 예언자는 이런 비전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 죄도 없이 죽은 어린아이, 아무 죄도 없이 순순히 끌려가는 백성들을 보면서, 예언자는 그들의 고난의 의미를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들 곁에 와서 똑같이 고난을 당함으로써, 그들이 받은 그 고난을 위로해 주고 그 눈물을 닦아 주고 그 짐을 대신 져 줄 하나님의 종이 오실 것이라는 비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신약성서 기자들은 예수가 바로 그 고난의 종이라고 보았습니다. 예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제국의 식민지배와 포악한 헤롯왕의 지배 아래에서 여전히 고난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 고난 속에서, 병에 걸리고 장애를 겪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영접하여 고쳐 주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십자가에 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죄 없는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하게 된 것은 온전히 그 백성들, 그 작은 사람들의 고난을 대신 짊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히브리 백성들의 고난이나 출애굽의 고난, 그리고 고난의 종이 짊어진 고난이 주로 민족적 고난이었다면, 예수가 짊어진 고난은 이러한 민족적 고난을 포함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던 갈릴리의 작은 사람들은, 로마와 헤롯의 지배를 받았을 뿐 아니라, 대제사장, 바리새파 사람, 율법학자 등, 그 사회의 지배세력들의 멸시와 지배를 받았습니다. 예수는 그들의 짐과 고난을 대신 짊어지고 고난을 당하였으며, 이는 예수의 고난이 민족의 고난뿐 아니라 사회에서 소외된 작은 사람들의 고난까지 짊어진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전에 자신들의 고난을 보며 한탄하고 눈물 흘리고 열등감에 사로잡혔던 갈릴리의 작은 사람들은 이제 예수께서 자기들을 사랑하여 자기들의 고난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를 졌음을 알고, 그 한탄과 열등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분노와 원망 속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르던 그들은 이제 예수의 고난 받으심에서 한없는 위로를 받고, 그들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그들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그들도 이 땅의 작은 사람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위로는 고난이 끝난 다음에 오는 것이거나 고난에 반대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고난 받으심으로 그들이 위로를 받았듯이, 이제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내 고난이 없어졌기 때문에 위로가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이제는 다른 사람의 고난에 동참하므로 생기는 위로였습니다.  즉,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동참할 때, 고난 받는 그 사람들이 위로를 받을 뿐 아니라, 동참하는 그들 자신도 위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히 혁명적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인생은 자기의 고난이 해결되면 그걸로 모든 게 종결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위로를 받은 사람들은 자기문제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로도 또한 넘친다”고 합니다(고후 1:5).

이제 그들에게서 고난은 그저 피하거나 참아야 할 것이 아니라 “동참해야 할 것”이 된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여러분이 고난에 동참하는 것과 같이, 위로에도 동참하고 있다”고 합니다(7절). 이 구절을 직역하면, “여러분은 고난에 동참하는 이들인 것같이 위로에도 동참하는 이들이다”가 됩니다. 여기서 “동참하는 이들”(koinonoi)이라는 단어는 친교(kononia)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우리가 친교라는 단어에 익숙하므로, 그 말뜻을 살려서 이 구절을 다시 옮겨 보면, “여러분은 고난을 친교하는 이들인 것과 같이 위로를 친교하는 이들입니다”가 됩니다. 우린 흔히 친교한다 하면 좋은 일로 함께 먹고 마시면서 사귀고 나누는 것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즐거운 일만 아니라 고난도 그렇게 함께 사귀고 나누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이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내 고난이 해결되었으므로 이제는 남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은 신자가 받는 특권 또는 은혜라고 합니다(빌 1:29).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고, 또한 부활에 이르고 싶다고 합니다(빌 3:10-11).

후대로 오면서 이런 고난의 의미는 상당히 소극적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베드로전서 기자는, 하인이 주인에게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참고 견디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고난의 종’에 관한 말이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졌다고 하면서 그것을 본받으라고 합니다(2:18-25). 고난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구약성서의 맥락이나 바울이 말한 맥락에서는 많이 벗어난 것입니다. 고난을 개인주의에 국한 시켜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이기주의 세대에 부합되어 아예 고난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로 인해 자기의 벗어던지고는 세상 누구의 고난도 모른 척 하게 된 것입니다. 나만 고난이 없으면 그만이다는 것입니 다.

이런 해석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아주 축소시키는 것인데도, 오히려 오늘날 크리스천 가운데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는 고난 받는 이들이 그것을 딛고 일어서게 하였는데,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고난 속에 매몰되고 맙니다. 그리고 늘 자기의 내적 고난의 문제에 사로잡혀서, 민족의 고난이나 이웃의 고난에 대해 무관심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성서 전체에 흐르는 고난에 대한 해석의 맥에서 너무나 벗어난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일찍이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여 3.1운동을 주도한 자랑스런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3.1운동의 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3.1 운동의 선봉에 선 주동자로서 오기선, 안세환, 오상근, 함태영, 안창호, 전덕기 등과 청년학생층으로서 박희도, 김원벽, 이용설 등이 있는데, 이들이 모두 크리스천입니다. 그리고 서울 상동교회, 승동교회 등은 3.1운동의 산실이었으며, 전국 교회는 3.1운동의 연락망 역할을 했습니다. 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붙잡힌 사람 가운데 유교 1.8%, 불교 1.1%, 천도교 11.1%인데 비하여 기독교는 17.7%나 되었습니다. 조지훈의 통계로는 천도교 1426명에 비해 기독교는 2190명이나 됩니다. 그 가운데 목사 40명, 전도사 59명, 기독교 기관에 일하는 이 52명 도합 151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3.1운동을 폭력으로 진압한 이후, 한국 교회는 좌절하여 피안의 세계로 도피하였습니다. 1920년대의 대부흥운동은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기보다는 개인의 내면적 고난 문제나 심령 대부흥에 몰두하였는데, 그때는 바로 3.1운동이 진압된 이듬해입니다. 처음 한국의 기독교는 공동체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3.1운동을 기점으로 개인주의, 기복주의로 돌아서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해방 이후에 한국 교회는 친미 일색이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으로 한국 교회는 반공과 기독교를 동일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월남한 사람들이 370만 명이나 되는데 그들은 모두 반공투사가 된 것입니다. 그 후 4.19가 일어나고, 5.16이 터졌어도 기독교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질 못했습니다. 유신독재와 5.18때도 독재자들에 대해 침묵하는 모습으로 일관했습니다. 광주항쟁 때도, 그 고난의 현장을 끝까지 지킨 크리스천들도 있었지만, 계엄군에 쫓긴 사람들이 교회 문을 두드렸을 때 문을 열어주지 않은 교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한국 교회는, 아니 우리교회는 민족의 고난 또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개인주의, 개교회주의,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상업화에 물들어 ‘고난의 연대’를 외면하거나 기피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세상이 돈에 미쳐 돌아가도, 교회는 교회의 본분을 지키고 본래의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교회는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 고난을 기념하는 공동체입니다. 또한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들을 위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공동체의 고난에 동참하고, 이 땅의 작은 사람들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바로 그 때, 이 땅의 작은 사람들은 교회로 하여 한없는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해마다 부활절 전에 수난절을 정하고 ‘왜 예수가 고난을 당하셨는지, 우리는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답은 우리가 읽은 본문 5절입니다.

‘그리스도로 고난이 끝났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고난을 짊어져서 네 고난이 넘치게 하라! 그럴 때 위로도 넘친다!’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바르게 해석하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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