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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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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3.4. 21 주일 설교 원고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우리의 기쁨은 무엇인가?
막4:1-9
지난 시간에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서두를 시작하다가 말았습니다. ‘씨’를 ‘말씀’으로 해석한 초대교회의 영향 때문에 실제로 예수께서 하고자 했던 진의를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서두에서 ‘농부’ 대신에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는 단어를 쓴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일반적 의미에서 농사짓는 일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씨 뿌리는 일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일의 중요성을 충분히 강조하겠다는 뜻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씨 뿌리는 것은 이야기의 배경 정도로 여겨서 제쳐 두고, 얼른 그 이야기의 본론으로 보이는 그 다음 이야기, 곧 여러 가지 밭들에 떨어진 씨들의 이야기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씨를 뿌리는 일과 그것을 거두는 일>입니다. 그 사이에 있는, 자라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이야기의 극적 효과를 높여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전체 비유에서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사실은 같은 장에 나오는 ‘자라나는 씨의 비유’나 ‘겨자씨의 비유’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 비유들에서는 씨를 뿌리는 것과 그것을 거두는 것 또는 자란 다음의 결과만 나오지 중간 과정이 나오지 않습니다. ‘자라나는 씨의 비유’에서는,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하는 동안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까지 그 씨가 자라나는 과정은 씨를 뿌린 사람이 관여할 일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막 4:27).
어깨에 밀 자루를 메고 손에 꺼칠꺼칠한 밀 알들을 한 움큼씩 쥐고 밭에 휘휘 흩뿌리는 농부의 큰 몸짓을 생각해 보세요. 그의 뙤약볕 아래서의 수고와 땀 흘림을 생각해 보고 뿌려지는 씨알들에게 거는 그의 기대를 생각해 보세요. 그의 수고함과 소망 그리고 기쁨을 함께 느껴보세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의 이야기 속으로 자꾸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씨 뿌리는 수고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기쁨도 또한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우리는 지금의 삶에서 그 기쁨을 되찾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겠죠. 그 기쁨을 우리의 삶에서 재해석해 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재해석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는 이런 비유를 이야기했지만 실제로 농사를 지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꼭 씨 뿌리는 것 같이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식을 기르는 것을 농사라고 하는데, 예수에게서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확산시키고 그 일을 하는 인물을 키우는 것이 농사였던 셈입니다. 요한 기자는 예수의 이러한 삶을 알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는 씨를 뿌렸을 뿐 아니라, 자신이 씨가 되어 땅속에 묻혔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으로 보았습니다(요 12:24). 그는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 씨를 품고 산다고 보아서, 그리스도인 속에는 ‘하나님의 씨’가 있다고까지 하였습니다(요일 3:9). 바울도 죽은 자의 부활을, 씨를 뿌려 그것이 땅 속에서 죽어서 새롭게 피어나는 것에 비겼죠(고전 15:35-38). 모두 각자의 현장에서 씨 뿌리는 비유를 탁월하게 재해석했다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서 씨 뿌리는 기쁨을 찾아야 합니까? 어디에서 춤추듯이 기뻐하며 씨를 뿌릴 것입니까?
이어서 예수는 땅에 뿌려진 씨들이 당하는 험난한 운명을 이야기합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의 먹이가 되었고, 돌 짝 밭에 떨어진 씨는 싹을 좀 내긴 했으나,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해서 해가 뜨자 말라 죽어 버리고,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는 가시덤불에 가려서 제대로 크지도 못하고 열매도 맺지 못했습니다(4-7절). 서로 다른 곳에 떨어진 씨들의 운명이 동화처럼 극적으로 묘사되었지요? 긴장감이 생기면서 이야기의 재미가 더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들이 실제 씨 뿌리는 일과는 거리가 좀 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주의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농사를 지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씨를 일부러 길가나 돌 짝 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뿌릴 사람은 없는 거죠. 어쩌다 몇 개가 그런 곳에 떨어지는 것인데 그런 것이 씨 뿌리는 이에게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예수는 여기에서 농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씨들>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씨들의 파란만장한 운명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농사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왜 그렇게 길게 씨들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예수의 의도는 그만두고라도, 청중들은 씨들의 험난한 운명에 대해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청중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며 농사나 농부를 생각한 게 아니라 그동안 자신들이 살아온 인생, 삶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농사도 지어보지 않은 양반이, 농사와는 상관도 없는 다양한 군중들에게 하는 ‘씨 뿌리는 비유’라는 게 실제 농사와 시에 관한 이야기겠느냐, 아니면 거기 모여 예수의 이야기를 듣는 청중들의 인생이겠느냐는 겁니다. 여기저기에서 빼앗기고 걸려 넘어지면서 실패만 거듭하는 자신들의 인생들이 아닙니까? 그 씨들의 운명이란 게 말입니다. 그러니 씨들의 운명에 자신들의 운명을 대입시키면서 예수의 이야기에 몰입되지 않았겠어요?
초대 교회도 이런 점을 본 것 같기는 합니다. 그들도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씨는 말씀이라고 해석하고 이런 저런 땅에 떨어진 씨들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말씀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우의적(寓意的)으로 해석했던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상황에서는 선교가 가장 중요한 과제였으니 그걸 인생 각자의 문제가 아니라 선교적인 관점으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우의적 해석에 빠진 것은 문제이지만, 험난한 운명에 처한 씨들의 사정을, 농사의 문제로 보지 않고, 이러 저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로 본 것은 옳습니다.
얼마나 많은 무리가 모여들었던지, 예수는 그들을 갈릴리 해변에 앉혀 놓고 배에 올라앉아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를 좋아하여 모여들고 그에게서 듣고 삶의 용기와 힘을 얻고 싶어 합니다. 그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앞에 두고,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과 갈매기 떼의 소리와 일렁이는 파도를 뒤로하고, 이야기를 하는 예수는 꼭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예수는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순간에는 그는 청중을 가르치는 선생이기보다는 그들과 한 덩어리임을, 운명공동체임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때 그는 그들 전체를 똑같은 감동으로 몰아넣을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꺼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실패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작은 씨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성공을 하고 싶은데 번번이 실패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은 즉시, 성공보다는 실패의 쓰라림을 맛본 그들 자신의 이야기가 됩니다.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조그마한 가능성도 없이 버려진 삶을 살거나 전쟁에 희생된 사람들, 어떻게 조그마한 땅이라도 얻고 소작이라도 하면서 살아보려고 하니 세금이다 뭐다 다 거둬 가서 뿌리를 조금 내리다가 말고 시들어 버리게 된 사람들, 한 번 기득권자의 세계에 합류해 보려고 기를 쓰고 노력해 보았지만 번번이 앞을 콱콱 가로막는 가시덤불 같은 기득권자들에게 시달려 좌절하고 낙망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 앞에 모여 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전하는 ‘씨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치 이야기속의 그 씨가 자신과 너무나 닮아서 자기도 모르게 엉엉 울어 버렸을 것입니다. 한숨도 쉬고 눈물도 마음속으로 동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인지 자기 스스로 자기의 얘기를 끄집어내고 있는 것인지…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사이의 벽도 이미 허물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군중들은 생각했을 거예요. ‘이것만으로도 좋다’, ‘ 속이 후련하다. 내 실패한 삶을 다 털어놓고 나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인가요? 이렇게 한바탕 울고 끝나는 건가요? 그런데 다음 대목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삼십 배, 육십 배, 백배가 되었다”(8절).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삼십 배, 육십 배, 백배가 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어떤 수치상으로 몇 배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뜻밖의 소득>이라는 뜻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실패한 경우는 세 번이고 성공한 경우는 한 번이지만 맨 마지막에 오는 이 한 번의 성공이 너무나 의외의 것이어서 앞의 모든 실패를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청중과 더불어 한바탕 울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소망을 갖고 일어서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라는 뜻밖의 기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야곱과 그의 아들 요셉의 이야기기를 보세요. 꿈 쟁이 요셉은 형들의 시기를 받아 이집트로 팔려가게 되지만, 야곱은 아들들이 하는 거짓말을 듣고 요셉이 죽은 것으로 알았죠? 요셉은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고, 기근이 들어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은 그의 형들과 만나게 됩니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듣고 다시 꿈에도 못 잊던 아들을 만난 야곱은 기뻐하면 소리칩니다.
“네가 여태까지 살아 있구나!”(창 46:30).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서 열 아들이 못하는 큰일을 해내는 것을 보는 야곱의 기쁨은 바로, 예수의 청중들이 꿈에도 그리던 기쁨이 아닙니까? 그것은 옥토에 떨어진 씨가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을 것을 믿는 예수의 기쁨입니다. 자식 농사 하나 잘 지어서 쓰러져가는 가문을 세워 보려 했던 우리 부모들의 꿈과 기쁨이기도 합니다.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도 그런 꿈을 가진 사람이 <씨를 뿌리는 것>이며, 그런 사람들이 “네가 여태까지 살아 있구나!”, “네가 정말 내 아들이냐” 하는 기쁨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예수의 씨 뿌리는 비유 이야기는 끝이 없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가 얻고자 하는 기쁨이며 또한 힘없는 자들이 기대하는 기쁨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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