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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9:1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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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백영희 목사 |
참고 : | 1981.03.15.01 백영희신앙연구 http://pkist.net/ |
출9장 13-16
출애굽의 도리
1981. 3. 15. 주일오전
본문:출애굽기 9장 13절∼16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바로 앞에 서서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네 마음과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너로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알게 하리라 내가 손을 펴서 온역으로 너와 네 백성을 쳤더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오늘 봉독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실 때에 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실 때에 어렸을 때에는 어렸을 때의 정도에 맞추어서 인도하시고 또 장성할 때에는 장성할 때에 맞추어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완전자시며 단일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렸을 때에 인도하시는 그 인도나 장성한 자를 인도하시는 인도나 외부적 방편과 그 기관은 달라도 그 안에 있는 진리는 꼭 같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가나안까지 들어가게 하신 그것은 하나의 외부적인 육체를 구원하는 그 순서들입니다. 그러나 육체를 구원하는 그 외부 역사에 그 안에는 영원한 하늘나라의 구원을 일으켜 주시는 이면적 역사가 주(主)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이 이 외부적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했다 할지라도 그 이면 영원한 구원에 참여하지 못하고 또 그 구원을 성공하지 못하면 그는 참 허무하고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애굽은 신령한 이스라엘 신약 교회에 있어서는 세상과 같은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와 광야와 요단강을 거쳐서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의 그 구원은 신약 신령한 이스라엘들에게는 세상에서 해방되어 홍해와 같은 방향 전환의 회개를 거쳐, 광야와 같은 온갖 구원의 시련을 받는 세상을 거쳐, 요단강을 건너는 것처럼 일단 영육이 나뉘어지는 육의 죽음을 통하여 무궁한 세계를 향하여 가는 그 노정과 꼭 같습니다. 하나는 형상이 있는 물체적이요 하나는 무형 속에 영감과 진리와 악령의 역사로만 되어 있는 것들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출애굽의 외부 그 형식 속에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그 진리를 연구하면 신약 시대 사도행전에 하나님이 외부적으로 역사하신 그 역사와 꼭 같은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구약의 형식 그 이면에 있는 진리가 신약 교회에는 외부적인 형식이 되었고 외부적인 형식 속에 있는 신약 교회의 그 이면은 곧 영감과 진리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신앙 생활 할 때에 세상과 성도와의 관계의 그 모든 여러 문제들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관계와 꼭 같은 이치를 가지고 있고 또 거기에 악령과 인간의 모든 죄악성이 다 함께 연관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기독자들이 신구약 성경이 구원 이루는 이치를 가르치고 있으나 범위가 넓고 복잡해서 그것을 부분적으로만 깨닫고 종합하기가 어려운 그런 어린 신앙의 사람들은 구약에 토막토막의 그 형식계시를 자기가 연구함으로 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그 해방 역사와 자기가 자기의 신앙 생활을 얽매려고 하는 이 세상 각양의 세력에서 해방되어 자유하는 것과 꼭 같은 구비들이 있고 꼭 같은 그 악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와 성도의 걸어갈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세상에서 자유하는 몸으로 진리로 자유하는 그런 몸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갈 때에 토막토막에 생겨지는 그런 모든 일들을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가나안까지의 가기에 부딪힌 그 모든 사건들을 잘 인용해서 연구하면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그 역사를 증거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그 역사와 오늘 기독자들이 이 세상과 세상에게서 해방되어 자유하려는 그 역사와 꼭 같은 성질의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은 돈에게 속박을 당해서 그 경제 문제에서 얽매고 신앙 자유를 하지 못하는 그 돈 세력에게 붙들려 있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세상 이런 저런 그 권세의 세력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도 있고, 뭐 자기의 지위가 있어서 다른 것은 애끼지 안하지마는 자기 위신이라는 자기 지위라는 그런 것에게 붙들려 있는 사람들도 있고, 이런 사정, 저런 사건, 이런 저런 모든 문제, 인간, 가정, 사회, 자기 사업, 직장, 여러가지 애정, 정실, 수많은 것들이 우리 믿는 사람들을 붙들고 양심에 자유하지를 못하게 하고, 신앙에 자유하지를 못하게 하고, 진리에 자유하지를 못하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영광스럽게 존귀케 하고 싶으나 시작했다가는 어떤 것을 인해서 그만 중단당하고, 이제는 자기가 하나님의 영감과 진리대로 살고 싶은 소원으로 간곡한 결심을 가지고 이대로 살아보려고 출발하였으나 그만 어떤 사정이, 어떤 직장에, 또 정실에, 체면에, 예의에, 풍속에, 어떤 권세에, 이런 것 저런 것들에게 붙들려서 자기 결심한 진리대로의 자유가 이루어지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양심에 자유해서 내가 양심대로 살아보겠다. 뭐 돈이고 권세고 말할 것 없이 양심대로 살아보겠다.’ 그런 것은 문제가 없는데 꼭 인간의 생명 문제, 자타의 생명 문제나, 좀 커다란 민족 문제나, 국가 문제나, 많은 대중의 그 사회의 문제 그런 데 관했을 때에 ‘나 하나는 아깝지 않게 희생하고라도 양심대로 살지마는 너무도 관련된 문제가 크니 이번만큼은 양심대로 자유하지를 못하겠다. 양심대로 하지를 못하겠다.’ 해서 모처럼 결심한 양심대로의 살려는 그 자유가 이것이 중단을 당하고 마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여러가지 문제에 걸린 것은 다 세상에서 완전히 해방을 받고자 하나 해방되지 않는 것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고 싶어하나 해방될 만한 그런 힘이 자기들에게 없고 해서 해방되지 않는 안타까움과 꼭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첫째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이스라엘이 자유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마는 저들의 힘으로는 절대 해방이 안 됩니다. 불가능합니다. 요것을 우리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기독자들이 어떤 작은 문제에서는 내가 ‘내 힘으로 그까짓 걸 집어버려 버리고 거게서 내가 탈출되어 해방되고 자유할 수가 있겠다’ 싶으고 어떤 큰 것에게 붙들려 놓으면 ‘이것은 내 힘으로 안 되겠다’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보면은 잘못입니다. 인간은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하나님이 해방시켜 주시지 아니하시면 해방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이 말합니다.
사소한 것 아주 ‘담배 피우는 그까짓 것이야 거게서 해방받지 못해? 내가 그것이야 결심하면 담배 안 필 수 있지.’ 하지마는 제 결심으로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집사가 되고도 담배를 안 피울 수 없어서 남 모르게 피워 남에게 수치를 당하고 훼방을 받고 주목을 당하고 논평을 받고 이래도 그게 쉬운 것 같은데 그까짓 거야 끊으려면 대번 끊을 것 같지마는 못 끊습니다. 어떤 사람은 술도 그런 사람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야 나쁜 그 바둑 두고 노름하고 장기 두고 하는 그런 것이야 그것이야 뭐 버리려면 당장 버릴 수 있지마는 그 습성을 버리기가 어렵습니다.
자기 인격이나 자기의 재산이나 명예나 모든 좋은 것을 다 해칠 수 있는 남자 여자의 그 이성 관계의 그런 것도 그게 백해무익의 것인데도 자기가 아무리 해방을 받으려 해도 해방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것이라도 하나님이 해방을 시켜 주셔야 되지 인간 스스로는 해방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이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먼저 그 사람이 ‘요런 사소한 것에서야 내 힘으로 해방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런 것은 해결하고 끊을 수가 있지 않겠느냐? 버릴 수가 있지 않겠느냐? 요런 사소한 것은 내 힘으로 되지 않겠느냐?’ 하는 그것을 회개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해방시켜 주지 아니하시니까 그 사람이 아주 사소한 것 같은데 그것에서 해방을 받지 못해 가지고 자기의 아까운 일생의 구원 시기를 다 놓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래서 명신홍 목사님이라는 그 목사님이 언제 설교할 때에 ‘과수원에 있는 사과나무는 도적이 거도를 가져와서 베어 넘기는 그 숫자는 별로이 없고 잘 보이지도 안하는 아주 극히 조그만한 소스락벌거지 그것이 들어서 사과나무를 다 찍어넘긴다. 사과나무에, 사과 과수원에 있는 사과나무는 다 소스락벌거지 그것이 찍어넘겼지 도적이 와서 거도로 베어넘긴 것은 없다.’ 그렇게 비유를 하면서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일생을 실패하는 것은 사람들이 알기에 뚜렷한 큰 죄보다도 자기가 고치려면 당장 고칠 수 있는 사소한 죄, 사소한 문제, 사소한 습성, 사소한 욕심 그것에게 붙들려 가지고 일생을 실패한다.’ 하는 비유로 말하는 소리를 듣고 아주 적절한 그 비유라고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자기가 세상 어떤 것에게 붙들려서든지, 영감과 진리대로 사는 것만이 구원인데 영감과 진리대로 살지 못하게 되는 그 어떤 일이든지 큰 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사소한 일이든지 하루 종일을 살고 보면 하나님도 진리도 영감도 잊어버리고 깜빡 살았는데 하루 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뭐 산 데에 자기가 그렇게 하려면 할 수 있었지 뭐 사소한 일로 마음 조금 그저 마음에 안심을 하고 마음을 조심하지 안하고 그런 사소한 것으로 하루 종일 또 성경 없이 영감 없이 제 욕심 제 맘대로 살아버렸습니다.
이러고도 그것을 어떤 세력이 와 가지고서 하루 종일 못 살게 한 무슨 정권이라든지, 어떤 강한 세력의 뭐 재벌가든지, 사장이든지, 자기의 상관이든지 무엇이든지 그런 것이 들어서 그렇게 했으면 ‘나는 오늘 종일 이것으로 인해서 신앙 생활 못 했다.’ 해서 그것을 자기의 적인 줄도 알 것이고 적인 줄 알아 벗어나려고 애를 쓰지마는 자기 혼자 한 놀음이니까 자기의 혼자 한 일이니까 ‘이것이야 내가 안 하면 될 것인데’ 하는 그 일로써 하루를 실패, 일 년을 실패, 십 년, 평생을 실패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사소한 것으로 제가 그것을 버리면 제가 벗어나려면 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 그것이 들어서 하나님이 거게서 석방시켜 주시지 안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대로의 일생을 다 실패하고 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그런 것은 그리 해도 다른 사람이 볼 때에 ‘저 사람은 저런 어려운 문제는 참으로 포기하기가 어려울 것인데, 저런 어려운 문제에서는 자유하기가 어려울 것인데, 저 강한 세력에서 죽이니 살리니 하는 데에서는 양심 신앙 자유를 하기 어려울 것인데.’ 오히려 그런 일은 양심 자유 신앙 자유를 척척 생명 내놓고 합니다. 하나마 사소한 일에는 그 사람이 자유를 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사과나무를 소스락벌거지가 베어넘겼다는 것과 꼭 같습니다. 그것이 먹어서 찍혀 넘어가고 그게 먹어서 과실 안 여니까 베어 내버릴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건 전부 소스락벌거지의 장난이라 그말이오.
이런고로 우리는 어쨌든지 양심대로 살려고 하는 데에 양심대로 살지 못하도록, 영감과 진리대로 살려고 하는데 영감과 진리대로 살지 못하도록, 나는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는 가치 있는, 하나도 후회할 것이 없는 오늘 산 생활이 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등용이 되어서 영원한 구원이 될 수 있는 이 알찬, 썩는 데 이르지 안한 이 하루 종일의 생활을 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들이요 또 우리가 이 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의 성공입니다.
우리가 죄짓고 권세를 아무리 얻어도, 죄짓고 돈을 얻어도, 죄짓고 어떤 행락을 누려도, 죄짓고 어떤 지위나 사업이나 어떤 그런 직장을 가진다 할지라도 죄지어 가졌으면 우리는 실패입니다. 우리는 썩을 것만 했습니다. 망할 것만 했고 심판에서 정죄받을 일만 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는 하나도 수입이 없습니다. 죽을 때에 솔빡 두고 갈 헛일만 한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성공은 첫째로 하나님이 인정하고 환영하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고, 진리가 우리를 옳다 증거해서 우리를 위해서 변호해 줄 수 있는 우리 행위와 사람이 되어야 하겠고, 우리는 이 죄에 불의에 대해서 얼마든지 자유할 수 있는 이런 자유의 사람, 양심 자유, 진리 자유, 의에 자유하는 이 자유의 사람이 되어야 우리는 우리의 성공입니다. 우리 성공은 세상을 떠날 때에 가져가지 못할 것 성공이 우리 성공이 아니고 세상을 떠날 때도 가져가 가지고 영원 무궁토록 가지고 누릴 수 있는 그 성공이라야 우리의 성공입니다.
기독자의 성공은 다 완전성에 속한 것이며, 영원성에 속한 것이며, 생명성에 속한 것이며, 불변성에 속한 이런 행동, 일, 소유, 인품, 속성, 지능 이것들이 우리의 성공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우리의 성공 우리의 소원을 이루는 데에는 이렇게 우리의 성공하는 이 길을 걸어가려고 할 때에 걸어가지 못하게 붙드는 거게서 자유를 받아야 됩니다. 거게서 해방을 받아야 됩니다. ‘저 사람은 그 참 물욕 때문에 구원 헛일한다.’ 하는 사람은 그 물욕에서 해방을 받아야 됩니다. ‘저 사람은 어쩐다고 그 지위 하나 얻는 것 지위 욕심, 권세 욕심, 그 욕심 때문에 항상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대항하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 하는 사람은 거게서 해방을 받아야 됩니다. ‘저 사람은 소용없는 그런 취미 그 버르징이, 그 취미와 그 버릇 그것 때문에 항상 구원을 헛일한다.’ 하는 사람은 그것에 거게서 해방을 받아야 됩니다.
어떤 것에게 붙들렸든지 내가 그것을 안 하려고 버리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해도 그것에게서 버리지 못하고 끊지 못하고 자유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그것을 내가 가진 것으로 알고, 그것을 내가 둘러마시니까 내가 먹을 식물로 알고, 그것을 내가 가지고 노는 것으로 알고, 그것은 내게 속한 것으로 알지마는 실상은 나는 그것에게 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게 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 눈에 보기는 그것이 사소한 껍데기를 입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적대시 아니하도록 하는 보호색이오. 보호책이오. 보호책이나 그 속에는 나의 일생을 삼킬 수 있는 악령과 죄악과 악성, 원죄와 본죄와 악령이 그 속에 들어 가지고서 그것을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에 실은 ‘내가 뭐 담배 피는 이까짓 거야 안 피우면 되지’ 하지마는 담배 속에 마귀가 들었고, 원죄가 들었고, 본죄가 들었고, 이 역사가 들어 가지고서 자기의 일생 생활을 망치려고 하는 강한 세력이 껍데기는 ‘내가 피우기 싫으면 말지’ 하는 그런 사소한 꺼풀을 입고 나타났기 때문에 그 사람이 거게 속아서 일생을 뺏기고 맙니다.
이번에 우리 총공회서도 거창 어떤 교회에 그 집사가 담배 피운다는 그것이 여게 건의서가 들어와서 그 건의의 건을 가지고 그 재판국 위원들이 심사하다가 ‘이것을 총공회서 논할 시간이 없으니까 이것은 지방공회로 미루고 다른 것만을 처리하자.’ 해서 그것은 제거됐지마는 이 총공회서 거론이 될 뻔하다가 지방공회로 이양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것은 사소한 것이라 그거요.
그러기에 우리는 첫째로 여게서 깨달을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되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고 싶지마는 애굽 나라에서 뽈끈 거머쥐고 놓아주지를 안합니다. 바로 왕이 거머쥐고 놓아주지를 안합니다. 그들은 저거 힘으로서는 도무지 거게서 해방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고 그것 때문에 해방 운동을 하다가 여러가지로 당하고 살해당한 사람 형벌당한 사람 많이 있었지마는 쫓겨난 사람도 있었지마는 해방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결국은 해방시켜 줬지 어떤 힘으로도 해방되지를 안했습니다.
하나님이 해방시켜 주시도록 되는데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호소한 것 기도한 것 그것 외에는 없습니다. 호소할 때에 하나님이 오셔 가지고서 그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이 교훈에 우리는 첫째로 깨달을 것이 무엇이냐? 나는 이 세상 불의 불법 죄악 악령, 영감대로 진리대로 양심대로 깨끗하게 깨끗하게 옳게 바르게 거룩하고 진실되게 참 하나님과 사람 앞에 떳떳한 이런 아주 영광스러운 칭찬받을 수 있는 이런 생활을 하고 싶은데, 또 이런 사람으로 살고 싶은데, 아무에게도 훼방이나 조롱받지 안하는 그런 성질의 사람으로 살고 싶은데, 분명히 우리 소원에는 그것이 소원이요 또 그것을 높이 평가하는데 내가 아무리 하고 싶지마는 내 성질을 내가 억제하지 못하겠고, 내 욕심을 내가 억제하지 못하겠고, 내 습성을 내가 억제하지를 못하겠고, 내 밖에 있는 모든 환경에 있는 이런 세력 저런 세력에서도 내가 자유하지를 못하니 이래 가지고 하루를 살아도 나중에 계산해 보니까 헛생활, 이틀도 헛생활, 이것을 여게서 우리가 찾아야 되겠습니다.
자기가 하루 종일 사는 데에 과연 하루 종일 산 생활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들려올림을 받을 수 있는 합격이 되는 그런 진리대로의 산 생활, 양심대로의 산 생활, 주님에게 순종해서 산 생활 그 생활이 얼마나 되는가 이것을 계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계산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것은 참 죽은 자나 같은 잠자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모세는 그는 말하기를 날수 계산하는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에게 간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모세와 같은 겸손한 사람이 어데 있으며 모세와 같은 충성한 사람이 어데 있겠느냐고 그렇게 칭찬받은 모세인데 이런 칭찬받은 그 모세가 된 그 원인이 어데냐? 그이의 전기를 성경에 찾아보면 그의 전기 속에 이 한 마디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날수 계산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는 요것이 그의 일생에 요런 아름다운 생애를 건설했다고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날수 계산하는 지혜를 달라 말은 하루의 계산하는 지혜를 달라 말입니다. 하루 동안. ‘나는 하루 동안 내 말은, 말은 몇 마디 실수, 몇 마디 이제 심판에 들려 올라갈 것, 몇 마디 나를 내가 해친 것, 내가 다른 사람을 해친 것, 도리어 내가 나를 정죄한 것, 헛된 자랑, 헛된 장담, 헛된 그 모든 주장,’ 이렇게 해서 자기 입술로 하루 동안 어떻게 했는지 ‘내가 하루 동안 내 입술의 산 생활을 계산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내가 하루 동안 다른 사람도 모르고 나도 퍼뜩 보고 구경 못 한 내 마음이 이렇게 저렇게 지내간 내 마음이 하루 동안 어떻게 움직였는지 이것을 계산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내가 하루 동안 성질을 어떻게 움직였으며, 내 수족을 어떻게 움직였으며, 내 눈은 볼 것을 봤는지 보지 안할 것을 봤는지, 내가 탐할 것을 탐했는지 탐하지 안할 것을 탐했는지, 내가 주장을 어떻게 했는지,’자기의 언행심사의 하루의 생활의 요 계산을 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했습니다. 그분이 다른 것을 기도하지 안하고 요것 하나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모세와 같은 겸손한 자 모세와 같은 충성된 자가 없다고 당신이 성경에 증거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증거했습니다.
여게 근거한다면 우리는 하루 종일 살고 ‘이제 어두워졌으니 자자. 피곤하니 자자. 이제 날 샜으니 일어나서 또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일하자.’ 하면 과연 썩은 사람입니다. 정말로 죽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안 믿는 사람과 꼭 같은 사람입니다. 하루 종일 산 것에 대해서 아무 계산 없이 그저 잠이 오니까 자는 사람이면 그는 짐승 생활이오. 짐승 생활입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짐승 생활입니다. 그는 고기덩어리의 생활뿐입니다.
아마 저녁으로 여게 와 가지고 삼십 분, 혹은 어떤 사람은 한 시간, 어떤 사람은 보니까 한 시간 반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분들은 하루 종일 산 생활을 계산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기도하러 와도 자기의 욕심대로 욕심을 만족하기 위해서 ‘주여, 내가 이런 욕심을 품고 있으니까 이것 주십시오. 저것 주십시오.’ 하고만 간다면 그것도 참 불쌍한 기도의 사람입니다. 불쌍한 의인들입니다.
먼저 와서 자기의 하루 생활을 낱낱이 돞아가면서 ‘내가 몇 시로 몇 시까지에서 무슨 언행심사를 했는데 어떻게 했는데’ 이렇게 계산을 대면은 자기의 하루의 생활에 주님 앞에 사과할 것이 생길 것이고, 용서를 구할 것이 생길 것이고, 후회되는 것이 생길 것이고, 자기에게 무엇을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것이 생길 것이니 그 생활을 한 말로 말하면 해방을 구할 것입니다.
‘나는 이런 것에게 저런 것에게 걸려서 나는 하루 종일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새벽에 내가 오늘 성경은 얼마를 보며, 기도는 얼마를 하며, 사람 접촉에는 어떻게 하며, 누구는 어떻게 관계를 가지며, 거기 대해서는 입을 함구할 것이며, 거기 대해서는 나는 상관하지 말 것이며, 거기 대해서는 어떻게 내가 절제하며, 어떻게 조절하며’ 한다는 그 모든 자기의 하루의 계획이 살고 난 다음에 밤에 잘 때에 계산을 대니까 모두가 다 허무하다 그말이오. 하나의 기계와 같이 이렇게 움직인 것뿐이었지 아무런 인격성을 가지고 성신의 감화 감동을 받아 가지고서 감각적인, 이 이성 비판적인, 영감적인 이런 생애가 자기에게 별로 없었다는 것을 그 사람이 반드시 찾을 것입니다. 어데까지 살아도 영감이 충만하면 다른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생애를 했다 했을지라도 자기에게는 또 불만스러워서 또 가난이 될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이 사람이 천국이 차지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에서 첫째로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해방받기를 원해서 부르짖었지마는 나는 해방받기를 원하지도 않는 해방의 필요성도 느끼지 아니하고 자기의 자녀가 막 그 나일강에 던져서 죽이고, 자기 될 것이 마구 전부 하루 종일 시체가 돼서 죽어나가고, 하루 종일 중생된 참 자기는 파묻혀서 요동을 하지 못하고, 자기의 소유도 전체 마귀로 인해서 다 썩어나가고 죽어나가고 심판에서 하루 종일 생활에서 자기 언행심사에서 자기 소유도 자기 몸도 자기의 생명도 전부 썩어들어가고 있는 이것을 모르고 사는 이 자기라는 것을 우리가 여게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구출되는 방편이 필요가 없습니다.
여게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그렇게 학대받고 재앙받아서 그들의 족속이 전멸되어지는, 남자는 다 죽이라 하니까 여자 있어봤자 여자 그것은 씨가 됩니까? 씨는 아닙니다. 밭이지. 이러니까 이스라엘 족속은 씨를 망울라 하는 이런 일이 있었지마는 어떤 자들은 그것을 모르고 거게 애굽 나라에 패장이 돼 가지고서 이스라엘을 곤봉을 들고서 지도하고 저는 따시게 먹고 입으니까 상관 없는 줄로 이래 알고 있는 그런 어리석은 그 이스라엘 백성, 그런 악한 이스라엘 백성 이런 자와 같은 자가 되어 있는지? 이렇게 전멸되는 이런 지금 한없는 이 애굽의 학대를 받고 세상에 학대를 받고 있는 악령과 죄악과 마귀에게 학살을 당하고 있는 이 처지에 있지마는 이것을 느끼지 못하고 우선 밥먹고 옷입고 권세부리고 지위 가지고 욕심대로 다 하고 사니까 산 줄로 자유한 줄로 아는 이것부터 우리가 깨달아야 됩니다. 이스라엘 중에는 그런 가운데 있으면서도 애굽에 붙어 가지고서 알랑거리면서 기름 가마에 고기나 먹고 하니까 만족을 하고 살았던 그런 자들은 마지막에 완전히 전멸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도 하지 안했습니다. 안 하고 있다가 이스라엘에게 전 원수의 복수는 남아 있는 그들에게 복수 다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 죄악과 악령과 이 사망과 저주에게 우리가 어떤 압박을 받고 있으며, 어떤 학대를 받고 있으며, 어떤 학살을 받고 있는지? 내가 하루 종일 가운데 살아나는 게 얼마나 되며, 산 생활이 얼마나 되며, 하루 종일 내 진액은 다 죽는지? 오늘 하루 사는 데에 하루 산 그 진액이 부활해서 영원 무궁토록 자기의 기능이 되는 사람도 있고 오늘 하루의 진액이 산 진액이 전부 다 유황불에 탈 그 진액이 되는 자도 있고, 생애도 소유도 전체가 멸망되는 자도 있고 구원되는 자도 있으니 이것을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합니다. 여게 대해서 우리에게 느낌이 없으면 이는 죽은 자요 송장이요 칼로
찔러도 아픔을 모르는 송장입니다.
우리가 어떤 지위에서 어떤 처지에서 살든지 자기가 배운 하나님의 진리대로, 자기에게
영감시켜 주는 영감대로, 진리를 아는 대로의 그 신앙 양심대로 하나님과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사는 요것만이 우리 생활이요 산 것만이 우리의 성공입니다.
비유에 ‘나는 소를 사서 못 가겠소. 나는 장사할 것 때문에 못 가겠소.’ 이렇게 뭣 뭣 때문에 ‘토지를 사서 나는 못 가겠소' 이렇게 핑계 댔지마는 그것 때문에 이 구원에 참가하지 못했는데 마지막에 왕이 와 가지고서 싹 죽여버렸어. 그게 뭣입니까? 그게 우리입니다.
제 딴에는 세상에 이런 존귀 저런 필요, 어리석은 제 느낌에서 ‘이것은 큰 일이다. 이것은 참 중대한 일이다. 나는 이런 중한 일을 하고 있다. 이는 큰 사업이다. 이 큰 기업체다. 이것은 민족 운동인다. 이것은 문화 운동이다. 이것은 큰 일이다.’ 각각 평가하겠지마는 어떤 데에 있든지 기독자라면 네가 영감대로 진리대로의 생활을 얼마나 했느냐? 그것만이 제 수입이요 영감과 진리를 떠나서 세상 어떤 것에 지배나 자기 주장이나 어떤 생애를 했든지 영감대로 신앙 양심대로 산 것이 아닌 것은 다 유황불 구렁텅이에 몰려들어갈 것들입니다.
전 인류를 위했다면은 대단히 큰 일 같지마는 창조주 하나님에게는 조물주 당신을 위하지 안하고 인류를 위한 것이 당신에게는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뜻을 듣지 안하고 명령을 듣지 안하고 전 인류를 위했다 할지라도 당신에게는 적이요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해방을 받지 못하고 그 강한 원수에게 사로잡혀서 신앙 양심 자유를 하지 못하고 자기의 영감 자유를 하지 못하는 이 자유하지 못하는 요것을 우리가 참 있는 걸 다 기울여서 여게서 해방되고자 하는 요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 자유를 하고 있는지 내가 자유하지 못하고 어떤 세력에 붙들려서 한 시간 하루 동안이라는 그 생활이 다 멸망의 생활을 하고 있는지 요것을 첫째 알아야 되겠고 이것을 모르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니 예수 믿는 성경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영감이 무슨 필요 있으며, 방편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있기를? 진리와 영감대로의 양심 생활이 아니면 구원에는 상관이 없습니다. 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들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들입니다.
영감과 진리대로 살고 싶은 그것이 우리의 자유요 살고 싶을 때 그대로 산 것이 자유한 것입니다. 살고 싶은데 살려고 하는데 어떤 세력 때문에, 어떤 사건 때문에, 어떤 정실 때문에, 어떤 물질 때문에, 어떤 세력 때문에, 어떤 복잡 때문에 살지 못했으면 그것에게 자기는 붙들려서 자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유해야 되겠는데, 자유해야 되겠는데' 하는 이 자유를 원하는 사람이 돼야 되겠고, 둘째는 나는 어떤, 어떤 세력 때문에 나는 자유하지 못한다는 그 자유치 못하게 하는 원수를 알아야 되겠고, 셋째는 보기에 작은 자유나 큰 자유나 그 이면에는 강한 악령과 인간의 원죄와 본죄가 그 속에서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껍데기야 작든지 크든지 너를 사로잡아 있는 그 원수의 세력에서는 절대 네 힘으로서는 자유하지 못한다 하는 요것을 셋째로 알아야 되겠고, 그러면 자유하려면 네가 하나님에게 부르짖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지 않으면 자유하지 못한다 하는 요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됩니다.
오늘 오전에는 요 네 가지를 우리가 깨닫고 요 도리를 복음으로 받읍시다. 요것을 깨닫고 잡고 놓지 안한 자는 이 말씀이 자기에게 복음이 되고, 출애굽 된 그 시작이 자기에게 복음이 되고, 요 결심을 가지지 못하고 자기가 자유하고 싶은 여게서 자유를 원하는 자도 되지 못하고, 해방을 원하는 자도 되지 못하고, 원수를 발견도 못하고, 제 힘으로 불가능한 것도 모르고, 하나님에게 부르짖지도 않고. 하나님으로만 해방한다는 요것도 모르고 그러는 사람은 이걸 외우고 설교를 암만 해도 제게는 율법이요 복음은 아닙니다. 알고 행치 안했으니까 이 율법이 이 진리가 저를 정죄 하지. 이 진리를 알고 요대로 해서 자기의 구원이 된 사람이라야 이 출애굽 이 사실이 자기에게는 복음이 된 사람입니다.
한 사람도 율법으로 정죄받지 말고 복음이 되도록 이 시간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는 살아야 됩니다. 어리석게 땅의 것만 생각하는 자가 되지 맙시다. 예수님이 피 흘려 주신 것은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피 흘려 줬습니다. 우리는 신앙 양심대로 진리대로 영감대로 살고자 할 때에 아무것에게도 매이지 안해야 자유하는 자입니다. 그게 원수입니다. 그게 내 일생을 삼킬 원수입니다. 암만 껍데기는 나를 좋아하고 친근하고 있지마는 나를 삼킬 원수입니다. 그 원수를 우리 힘으로 벗어나지 못합니다.
결심 가지고 안 됩니다. 하나님에게 부르짖어 하나님이 해방시켜 주셔야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화 감동하심이 항상 저희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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