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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0:2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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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장우 목사 |
참고 : | 2001. 6. 3 늘푸른교회(창원시) http://evergreen17.80port.net/ |
출10장 21-29
흑암재앙
출애굽기 10장 21-29
애굽인들의 가장 큰 신은 태양입니다. 태양을 '라(Ra)'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태양의 아들이 바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3일동안이나 캄캄한 어두움이 몰려와서는 손을 더듬어야 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애굽인들에게 얼마나 큰 두려움과 공포 였겠습니까? 자신들이 섬기는 최고의 신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되자 바로가 모세에게 너희 모든 사람들이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양과 소는 머물러 두라고 합니다. 지금 까지 이런식으로 제안한 순서를 보자면, 8:25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8:28 ",,,,,,,, 광야애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마라" 10:11 ",,,,,너희 남정만 가라" 그리고 오늘 말씀 10:24절에서 너희 모든 사람은 가되 소와 양은 남겨두라고 합니다. 이러한 바로의 거절에서 우리의 신앙의 방해와 타협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러 가는데 꼭 멀리 3일길이나 광야로 가서 할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제사를 드리면 되지 않는냐 하는 것입니다. 꼭 세상에서 그렇게 구별나게 해야 되겠는가? 그러니 여름이면 해수욕장에 가서 간단히 예배드리면 되는 것이고, 겨울이면 스키장에 가서 근처에서 예배드리면 되지 않느냐? 지금이 무슨 구약시대냐?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메이면 안되지 하면서 결국은 자기 자유를 찾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함께 모여 주를 찬양함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과연 신자라고 할수 있을까요? 예배보다 다른 일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면 아직 애굽안에 있으라는 말에 타협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제사를 드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3일 길을 가야만 합니다. 왜 그곳이어야 합니까? 애굽을 떠나서 시내산까지 나아가는 거리가 3일길입니다. 왜 이렇게 떠나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애굽에서 완전히 분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애굽을 우리는 세상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분리가 일어나야 예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그러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2:15-16절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것이 출애굽의 이유입니다. 애굽의 사상과 정신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소위와 사상에서 완전히 분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왜요 너무 멀리 가면 갔다가 돌아올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세상을 떠난 듯 하지만 또 세상속으로 돌아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직도 너무 세상과 가까이에 있는 것입니다. 멀리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자세와 가치관이 아직 세상에서 멀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언제는 포기한 듯이 보이지만 어느새 또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다리를 걸치고 살고 있으니 세상적인 재미고 없고, 예수 믿는 재미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참으로 불쌍한 형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이 사실은 이런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를 성경이 무어라고 합니까?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 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 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벧후 2:20-21).
그러므로 사람이 멀리 떠나가지 않으려면 차라리 전연 가지 않는 것이 더 났지 않겠습니까? 원수도 이 사실을 잘 알기에 두 번째의 재안인 것입니다. 가기는 가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믿기는 믿되 너무 깊이 빠지지는 말라. 깊이 빠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같은 모습입니다. 말씀이 얼마나 우리를 그리스도의 생명의 풍성함으로 인도하고 있는데 애써 피할려고 합니다. 그렇게 살다가는 지금 내가 누리고 가지고 있는 것들이 어떻게 될까 전전긍긍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 번째로 어린이들이 남고 어른들만 가면 그것은 절반의 떠남입니다. 자신의 혈육이 남아 있는데 제대로 떠난 것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짐승은 남겨두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독종과 우박으로 많은 짐승을 잃어 버렸기에 노예들의 노동력은 일부 잃는다고 하여도 그들의 재산을 붙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재안이 결국 세상의 제안이라는 것입니다. 이 네가지의 요구들이 성도들에게 오늘도 동일하게 붙들고 늘어지는 문제들인 것입니다.
네 번째 제안에 대한 두가지 해석을 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꼭 재물이 있어야 하는가 그러니 짐승은 다 두고 가서 제사만 드리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돈없이 값없이 생명수를 받는 것입니다. 천만금을 주고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과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소유를 우리 마음대로 처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되었다면 우리의 소유도 사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소유는 또다시 나의 것으로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뒷주머니를 차고 있는 것입니다. 루터가 그런말을 했답니까?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고 하였지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수가 없는데도 우리는 예수 믿는 것 따로 내 재산 챙기는 것 따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소유가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직도 우리는 네 번째의 제안에서 빠져 나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일리 있는 해석이라고 봅니다.
제가 이제 만 2년이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마음에 안드는 부분들이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증에 마음에 드는 것 한가지는 헌금강조를 안한 것이 아닌가 제 나름대로 추측해 봅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더 무섭다는 말을 하기도 합디다. 전부 주님것이라는 말로 알아들으셨기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 압니다만 그러나 저의 관심은 여러분의 주머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가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로의 네가지의 제안들이 오늘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우리안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이 있다는 것이 캄캄한 어두움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두 번째로 3일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은 애굽에서 제사의 자리로 나가는 것이 3일길이 필요한 것은 그 자리에 가보아야 하나님께서 무엇을 제물로 요구하실지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애굽에서 꼭 3일길을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물도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면 선택하는 것이지 우리가 임으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까? (시내산에서 희생의 제사).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제사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죽으심이 어떤 제물로 드려졌는가를 이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주님의 그 영을 받아서 세상과 완전한 분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미 3일길을 떠나서 제사에 참여가 된 것입니다. 소나 양의 피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단번에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를 드린 일에 우리가 참여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우리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이 성도에게는 무엇으로 보여야 합니까? 어두움으로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안에 들어온 성도의 시각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 기대를 가지고 살지 않습니다. 바른 신앙양심을 가지고서는 하루도 살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살지 않고 세상의 방법으로 살려고 하지 세상이 어두움으로 보이지 아니하고 자꾸만 세상이 밝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오늘도 무어라고 합니까? 비록 어려운 문제들이 있지만 그러나 인간의 능력으로 풀지 못하는 것은 없다라는 것을 끊임없이 세뇌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 많다고 하여도 그러나 착한 사람이 더 많다. 어려움이 있어도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다. 이러고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라면 이 세상이 어두움으로 캄캄하여게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곳에서 살수도 없고 취할 것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로 나누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이 우리에게 어떻게 실제적인 결과를 가지고 온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6: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믿는 자의 죄를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믿는자와 세상과의 관계도 영원히 해결하여 주었습니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믿는자는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볼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믿는 자와 세상과 함께 서 있는 것입니다. 신자에 대하여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에 대하여 믿는 자가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히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의 실질적이고도 고귀한 지위입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에 대한 심판은 세상이 고의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던져준 입장에서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즉 세상은 살인자와 그리스도 중 누구를 살리겠느냐는 선택에 당면해서, 살인자는 석방시켜주되, 그리스도는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박도록 버렸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어두움에 속한 증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어두움이라고 보지 않고 자기들이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어두움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없는 것이 캄캄함이요 어두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없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일들로 사람들이 환호하고 좋아하는 것들이 십자가로 보면 어두움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이라는 거대한 나라,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 위대한 왕과 지혜로운 관리자들에 의하여 움직여 지기 때문에 나라들마다 애굽을 부러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어둠의 나라였음을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니 여지없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을 어두움이다 빛이다라는 구분은 착한 사람이 많은가 적은가 하는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자라면 그 영이 우리에게 나타나는데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매일 그가 행하고 경험하는 가운데서 그 사실을 실현해내도록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십자가가 신자와 세상과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갈라내는가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의 보내심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묶게 되는 것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심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심판하여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을 성령이 오시면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에서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그러나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어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활로 그러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들어 올리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히우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주의 자리에 등극하셔서 자기의 백성을 다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스림이 시행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등지고 세상을 볼때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신자는 십자가 이쪽에서 세상을 보니 세상은 어두움이요 죽은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쪽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에 있는 자들이 죽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간격은 얼마나 큰지 그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세상과 통하는 길은 주님을 부인하는 경우에 통하게 될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한 세상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공통점이라고는 앞으로도 찾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안에 누가 예수를 믿는지 아닌지 구별이 안됩니다. 어두움과 빛이 섞일 수가 없는데 지금은 함께 혼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자라면 이렇게 계속 갈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제외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이기에 그러합니다.
이렇게 어두움과 빛의 분리가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분리가 더욱 선명하여 지도록 영안을 밝여 달라고 기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 캄캄한 세상에서 빛을 발견 하였다면 죽어도 좋은 것입니다. 조문도석사가의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미 세상의 도가 아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듣고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죽어도 좋은 것입니다. 담대하게 세상과 대적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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