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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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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백영희 목사 |
참고 : | 1982.1.31 주일오후. 백영희신앙연구 http://pkist.net/ |
출10장 1-2
미정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고 신령한 이스라엘이 되는 우리에게 하나의 형식계시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실은 우리의 신앙 걸음에 있어서 정확한 거울이 되어 있습니다. 마치 거울을 보면 자기의 생긴 것이 어떻게 생긴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들과 자기와 비교해 보면 자기가 어떤 걸음을 걸어야 할 것과 또 이 걷는 지금의 걸음은 그 결과가 좋을 것인가 불행스러울 것인가 하는 것도 정확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에 인도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의 구주시요 인도의 하나님이시요, 그때에 있던 악령도 또 오늘에 있는 악령입니다. 다만 그들은 육체적인 것이 많고 오늘 우리는 영적의 것이 많은 것뿐이지 그들도 육의 면과 영의 면이 겸했고 우리도 영의 면과 육의 면이 겸했습니다.
영이 성공되면 육이 성공되고 또 육이 성공되면 영도 성공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없는 하늘나라 구원이 없고 또 하늘나라의 구원이 없는 세상 생활은 아무리 번창해도 그것은 다 사망인 것이며 가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지고 가나안까지 갈려고 하면 순조롭게 간다면 한 4일간이면 블레셋으로 직통해서 갈 만한 그런 거리입니다. 그러나 40년이 걸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나 약속이나 사랑이 모자라 그런 것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이 모자라서 그런 것입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어떻게 크신 분이시며 그분이 모든 것을 주권하시고 계시는 모든 것의 주재가 되시는 이 창조주 하나님이신 걸 이스라엘이 확신하는 그 확신이 항상 흐렸고, 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이 사랑에 대해서 확신이 흐렸었고, 또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시고 호리도 어기지 아니하시고 어길 수 없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이 약속의 신실함을 믿는 믿음이 흐렸습니다.
이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 인도를 받지 못했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아니하니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약속도 그들이 받지를 못하니까 차차 더 희미해지게 되어서 애굽에서 나온 사람으로서는 이 40년이 되도록 되풀이 하다가, 되풀이 하다가 가나안에 갈 만한 그런 신앙이 마련되지 못해서 다 광야에서 시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만 몇 사람만 믿음의 연단을 바로 받아 가나안에 들어갈 만한 그런 믿음을 가졌는고로 가나안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하신 일도 공연히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용물로 이용을 했습니다. 이용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당한 모든 어려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여야 할 그런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면 그것으로 끝나버리기 때문에 애굽을 구속하시는 데에 이용하는 구속물로 하나님이 두셨다고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이용하신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것이나 또 광야를 통과해 가지고 가나안까지 간 그 모든 하나 하나의 순서는 전부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알려 주는 것, 또 이스라엘이 이해 못 하나 하나님은 참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계시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 또 이스라엘은 믿지 못하나 하나님의 선포한 계약 이행에는 호리도 변동이 없이 신실하다는 하나님의 이 신실성을 인정시키려는 것, 또 이 세상이 아무리 강하고 많고 크고 위대하다 해도 인간 대 인간으로 나라 대 나라로서는 강하지마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단합이 돼 가지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서 움직이는 그 움직임 앞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이러니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든든히 그의 크심과 사랑과 능력과 신실함과 그의 인도하심이 다 생명이 되는 것을 인정하고 꼬박꼬박 그저 순종만 하면 된다는 이것을 가르쳐 가지고 여기 대한 확신이 있는 자를 가나안에 보내서 가나안에 가고 난 다음에는 다시 실패가 없게 하려 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연단을 시키신 것입니다.
40년 동안이나 애를 쓰시다가 정 희망이 없는 것은 다 거기에서 제거해 버리고 늙어 죽도록 두고, 거기서 인도하면서 또 지저분한 것이 있었지마는 이것은 어쩔 수 없어 다수를 위해서 소수를 용납을 해 가지고 가나안으로 인도했습니다.
인도할 때도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들을 같이 가지 않겠다고 많이 자제를 하시고 그들의 그 장래에 믿음이 모자라서 위험하다는 그 위험성을 많이 말씀했습니다.
그대로 이스라엘 중에 가 가지고도 믿음을 지키지 못함으로 인해서 모든 실패는 왔고 믿음을 지키는 데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왔던 것을 성경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요 이는 변함이 없고, 또 그때에 애굽은 이 세상을 모형한 것입니다. 애굽은 이 세상을 모형했고, 또 애굽에 있는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를 거스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모형했고, 또 그 나라에 바로의 신하들은 이 세상에 속한 하나님의 도를 거스리는 모든 굵닥굵닥한 그런 거물들을 모형한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업적으로 문화적으로 예술적으로 사상적으로, 이 종교의 그 종교적으로 이래 커단커단한 모든 인물들을 모형했고, 바로 왕은 곧 사탄 마귀를 모형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오늘 신령한 이스라엘을 모형했고, 유월절 출애굽은 사람들이 중생되는 자기의 몸의 기능 마음의 기능 이것이 변화를 받는 그것을 말했고, 그것은 예수님의 피 공로로만 됩니다. 또 홍해는 그 생활 변화, 세례를 모형했고, 광야는 교회 생활을 모형했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성령을 모형했고, 요단강은 죽음을, 가나안은 하늘나라를 이렇게 모형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하시든지 어떤 애로가 있어도 끝끝내 가르치시고 또 경험시키시고 체험시키시고 이해시키셔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도록 하려는 그 역사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변하지 않고 그대로 끝까지 그대로 계속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것이나 인도하는 것이나 소망을 가지는 것이나 적극 구원 역사에 열심을 가지신 것은 변함이 없이 오늘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나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노력하는 것이나 또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인도하시고 돕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는 순간도 찰나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서 어떻게 하시는 하나님, 또 이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주재자시며, 주권자시며, 개별 섭리자시며, 우리 위해서 전부를 다 기울이시고 영원히 책임지시는 이 책임지신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가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대한 확신 이것이 우리 신앙에 제일 기초가 되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무엇으로 기쁘시게 하며 무엇으로 영화롭게 할 수 있는가? 이것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그 소원과 하나님의 그 능력과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이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 중에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가 나를 안즉" "저가 나를 안즉 내가 저를 얼마든지 높일 수가 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높이시는 일을 하려고 해도 믿지 않고 받지 않으니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목적도 없고 가나안에 가는 것이 그만 목적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우리 목적입니다. 이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 목적을 위한 중간 목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성경을 몇 번 읽겠다. 내가 이 사업을 어디까지 성장시키겠다. 내가 공부를 어디까지 하겠다. 또 금년에는 전도를 얼마 하겠다.' 하는 이런 모든 목적이 있지마는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 모시고 살 그 나라를 목적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거기에 속한 목적들이지 우리의 목적은 이 하나뿐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목적을 굳게 잡고 놓지 않아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에 중간에서 평안하고 잘 먹고 쉬는 그것이 저희들에게 복인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저들의 복인지 저들의 목적에 대해서 희미한 데에서 그들은 다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피곤해지고 견디지를 못하게 됐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 세상에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사는 것도, 배우는 것도, 뭐 가정을 이루는 것도 이것도 저것도 다 그것이 하늘나라의 이 구원을 소망하고 이 구원을 이루려는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런 것 저런 것 한 방편으로 쓰는 것이지 그것이 우리의 목적 아닙니다.
목적을 잊어버려도 안 되고, 흔들려도 안 되고, 목적을 바꾸면 그 사람은 완전히 변질돼서 그때부터는 죽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중간 목적, 이 유일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모든 필요한 이용되는 그 목적을 우리가 가지지 못한다는 말 아닙니다. 그것을 가져야 그 모든 가진 것이 공부하는 목적이 하늘나라 갈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강건하게 하는 것이 이 하늘나라 구원의 목적을 위해서, 자기가 사업을 하는 것이 가정을 이루는 것이 모든 것이 다 이 목적을 위해서 가진 목적들이면 됩니다. 이 목적을 잊어버리지 않아야 되고, 또 하나 알 것은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사람들, 거기에서 가정에서 바로의 신하가 있고, 회사에도 바로의 신하가 있고, 학교에도 바로의 신하가 있고, 또 이런 단체 저런 단체 뭐 시장에도 어디든지 좀 굵닥굵닥한 그 인물들은 다 바로 신하편에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는 사탄입니다.
이러니까 마귀가 이런 저런 그 처소에서 좀 위대하고 권력 잡은 그 사람을 거머쥐고 감동시켜 가지고 그 사람들을 통해서 모든 사람 움직여 가지고 우리의 이 구원에 방해를 하고 신앙생활에 자꾸 가로막는 이런 일을 하는데 그 애굽 사람들과 거기에 있는 왕이나 신하나 그들의 목적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뿐입니다. 그저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지 않으려는 것 목적 뿐이요, 놓아주지 않으려는 것.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 놓아주지 않고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실컷 부려먹고 남자는 아예 낳는 어린아이부터 다 죽여 버리니까 부려먹을 만한 그런 장성한 자는 좀 있으면 죽어 버리면 없어지지 않습니까? 나는 걸 없애니까 있는 것도 없애고 완전히 남자는 전멸하려는 것, 남자는 주권자인데 이 세상은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신앙으로 자유하려 하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 소련이나 중공이나 이북에도 기독교를 없애는 것 아니오. 그들에게 가 가지고, 만일 이남에 있던 어떤 자가 떡 들어가서 '내가 김일성이를 위하는 기독교를 하나 만들어 내겠다. 오해받지 말아라. 뭣 때문에 오해받겠나? 기독자들이 다 쭉 딸려 오구로 하지.' 만일 이런 방편을 꾸며 왔으면 용상에 금상에 올려 앉힐 것입니다.
예수 믿는 모든 신자들이 다 김일성이를 위하는 기독교를 믿도록 그렇게 해 보십시오. 얼마나 좋아할 것인가? 왜정 말년에 그들이 그때에 일본적 기독교를 믿으라고 이래 가지고 모든 믿는 사람들이 일본 정신과 일본 국가에 복종하는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마구 생활비를 다 대 줬습니다. 또 그렇게 어려운 때지마는 여비를 줘 가지고 얼마든지 일본 나라 관광하고 유람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줬습니다.
애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여자들은 어디든지 가면 피동적이지 수동적이지 주권적인 그런 야심이나 야망이 없고 또 그는 종자가 없어. 종자가 없어서 그저 종자는 남자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여자는 종자가 없고 키우는 것뿐이니까 애굽 사람의 종자만 심으면 결국 애굽 사람되는 것이니까 그런 주권자가 없기 때문에 여자들은 그대로 둬두고 딸도 낳거든, 여아는 낳거들랑 살려두고 남아는 낳거든 모조리 죽이라 하고, 있는 것은 부려먹다가 나중에 늙어 쇠해지면 없애버릴 요량하고, 그렇게 해서 애굽은 어쨌건 이스라엘을 이용하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한 이 정신과 주권 생활 이것을 전혀 말살시키려는 그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습니다. 섞인게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나갈 때에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인물들, 또 고위층 인물들, 또 그중에도 기독교를 옹호할 때도 있고 방해할 때 있지마는 어쨌건 기독교에 반대되는 그들은 '내가 이렇게 그들에게 좀 달콤하게 해 주면 이 문제는 해결이 되겠다. 또 그들과 서로 이렇게 손을 잡고 화평을 취하면 되어지겠다.' 하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반대하는 그런 박해가 일어나기 시작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첫 쓰는 수단과 방법이 그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애굽 사람과 친교를 가지지 아니하고 이렇게 성글게 했기 때문에 이래 됐으니까 그분들로 더불어 친교를 맺자고 이래 가지고 이스라엘의 그 두목되는 사람들은 그들과 친교를 맺어서, 밑에 이스라엘은 이용을 당하고 그들은 얼마 동안 호화롭게 지냈습니다. 그 이용물로 삼았던 것이라. 그러나 그 속에 내정에서 바로 왕이 계획을 가진 것은 '어쨌건 이스라엘의 남자는 하나도 종자가 남지 않도록 완전히 없애라' 하는 그 일을 추진하는 방편으로 '우리 말을 잘 들으면 내비두지 우리에게 반동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느냐? 아무 백성들이 순종하지 않지 않느냐?' '네, 순종하도록 할 터이니까 우리와 화친을 가지자.' '그러면 순종하도록 해라.' 중간에 심부름하는 그자들도 그 계획을 몰라서, 마지막에는 그 정책은 이스라엘의 그 인종은 완전히 전멸하자는 그것을 모르고 날 뛰었기 때문에 이용만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인도 그 목적은 "믿지 않은 불신자들 마음 가운데서 역사하는 공중의 악한 신이라" 우리들도 그 신이 우리를 주장하다가 이제 예수님의 구속으로 인해서 해방을 받아 그런 것이지, 그 신은 하나님이 부리는 신이요 첫째 아담은 그 신이 이겨서 아담은 그의 종이 됐지마는 둘째 아담이 그것을 이겨서 이제는 그 신이 예수님의 종이 됐습니다. 예수님와 부리는 신이 되기는 됐지마는 그것이 맡은 일은 무슨 일인고 하니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쨌든지 예수 믿지 못하게 해서 하나님에게 순종치 아니하고 저에게 순종하게 하려는 그것이 그 목적이요 다른 것이 섞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공산주의는 양보는 없다 그의 사상의 시종 일관이지 조금도 양보는 없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미혹받는다.' 민주주의 정치가들은 이걸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 방편에 따라서 흔들리고 맙니다. 그는 뭐 중공이 소련을 반대하고 편을 반대하고 서로 갈라진다 해도 언제든지 공산주의 이것 사상이라 하는 것은 하나이지 떨어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보니까 키신저가 '레이건 대통령이 와 가지고 외교 국교한 것이 실패됐다.' 키신저 그자는, 미국을 망친 자가, 제일 망친 자가 그자고 닉슨인데 그자가 또 뻔뻔스럽게 그말 하고 나옵니다. 눈이 어두우면 할 수 없습니다. 얼마든지 속히고 꾀이기 마련이오.
그런고로 이 세상에는 우리의 신앙을 끝끝내 자유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신앙을 꺾어서 악령에게 소속시키려는 그 무서운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매일 우리와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 가족 가운데도 그게 들어오면 그 군대고, 또 부모 형제 가운데도 그게 들어오면 그 군대이기 때문에, 발표는 못 해도 여기에서 설교 들을 때에, 또 성경을 보고 속에 자기가 확신을 가지고, 확신을 가지고 견고히 잡고, 나오면 거기에는 양보가 없이 끝까지 우리의 신앙을 삼켜서 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 이것을 속에 굳게 가지고 우리도 거기에서 발을 버투고 소리 없이 서로 전법상, 전법상 이렇게 저렇게 할지라도 그 속에는 우리의 구원을 삼키려는 그게 목적이라 하는 것을 견고히 잡고 흔들리면 안 됩니다. '이것도 우리 구원에 협조가 되는가보다.'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전도할 때에 귀신 들린. 점쟁이가 아주 사도 바울을 도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자인데 너거들에게 영생 얻는 도를 전하니까 잘 믿으라.' 하면서 뒤에 따라 다녔습니다.
이러니까 사람들 보기에는 그것이 아주 사도 바울 전도하는 데에 큰 일꾼으로 돕는 것 같았지마는 사도 바울이 가만히 살펴보니까 그것이 속에 사탄이 들어 가지고, 돕는다고 해서 '이 말이 맞다.' 바울이 그 점쟁이 인정을 해 주고 나면 바울 떠나고 난 다음에 '보라, 하나님의 사자 바울도 나를 인정하지 않던가?' 해 가지고 마구잡이로 마지막에 싹 전부 전부 삼키기 위해서 한다는 것을 바울이 알았기 때문에 여러날 근심하다가 마귀를 쫓아내고 그런 박해를 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빌립보 교회는 생겼습니다.
그러면 애굽의 목적, 이것 요동치 않는 것, '세상 목적이 세상 저거대로의 목적은 무슨 목적을 가졌느냐? 우리 기독자는 목적이 무엇이냐? 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우리에게 대한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하시는 분이시냐?' 하는 이것을 우리가 굳게 잡아야 합니다.
또 그러고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여러가지 이적을 행했습니다. 애굽이 이스라엘 백성들 내 보지 않으려고 하니까 또 이적 하나를 내 보였고.그래 가지고 애굽을 굴복을 시켰고, 또 안 내 보내려고 하니까 또 한 이적을 가지고 애굽을 굴복시켰고, 또 안 내 보내려 하니까 또 한 하나님의 권능의 이적을 나타내서 애굽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놀라 떨면서 항복을 했고, 항복하고 난 다음에 또 강퍅하게 하나님이 만들어 가지고 또 한번 반대하니까 또 한 이적을 나타냈고, 이렇게 해서 열 번이나 그와 같이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어서 그랬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과 자유하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그 이유가 뭐이냐? 방해한 목적이 뭐이냐? 그렇게 방해한 것은 저거 독단으로 방해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방해하도록 해서 방해를 했다 하는 것을 성경에 똑똑히 기록했습니다. 방해할 때마다 "내가 그 마음을 완강케 강퍅케 함으로 그들이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똑똑히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 혹은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흑은 어떤 단체에서 그 단체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시대적으로, 이 모든 이종교가 무엇이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가로막고 신앙에 방해를 하거든 방해하는 그것이, 방해하는 그것이 방해하는 줄 알아 그것을 미워하면 안 됩니다. 방해하는 그것을 저주를 하면 안 됩니다. 저주해서는 안 될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들이 방해하는데 방해하는 자를 저주를 하면 그 저주는 하나님을 저주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 방해하는 자들이 저거가 방해하고 싶어 방해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 마음을 강퍅하게 어둡게 만드니까 방해하는 자들이 되어 가지고 그렇게 방해합니다.
그러면 방해하는 자들이 되도록 만드신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뭐 하려고? 뭐 하려고 그렇게 방해하도록 그렇게 할까? 방해합니다.
방해하니까 이제는 뭐 메뚜기 재앙이니, 파리 재앙이니, 우박 재앙, 피 재앙 오만 재앙을 내립니다.
방해하니까, '방해하면, 안 내 보내고 너희들이 방해를 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이 재앙을, 파리 재앙을, 우박 재앙을, 흑암 재앙을 너희들에게 내려서 너희 백성들이 다 진멸하도록 그렇게 하겠다.' 모세와 아론에게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 말을 가서 한다는 것이 그렇게 말했다가 만일 안 되면 어찌 됩니까? 그렇게 말했다가 만일 안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말을 했다가 만일 안 되면 당장 사형만 받을게 아니라 굉장하게 뭐 지질는지 불에 태울는지 뭐 어떻게 할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그들이 지금 분개해 가지고 하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성사가 안 되면 참 굉장하게 그 형을 받을 그런 일이지마는 그들은 그때에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신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없이 믿기 때문에 그 믿는 믿음으로 인해서 그들은 그 죽음 앞에 가 가지고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선언을 했던 것입니다.
바로 왕에게 가서 '왕이 만일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보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이런 진노로 재앙을 내려서 너희들이 다 망할 것이다.' 이러니까 바로 왕이 '네가 무엇이건데 와 가지고 그러느냐? 이놈을 당장 쫓아내라.' 쫓아내 봤자 멀리 갑니까? 쫓아내고, 쫓아 내는 건 죽일 건데 그 조금 뒤가 매여 겁이 나 죽이지는 못하고 '쫓아내라.' 쫓아내고 난 다음에 '보자 보자 보자' 해 가지고 그 재앙이 안 내려 보십시오. '그놈 잡아라.' 하고 굉장할 것 아닙니까? 그런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가서 말할 수 있는 이 신앙이 요긴한 것입니다. 이 신앙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약속에 대해서 신실하신 하나님의 이 신실하심을 믿기 때문에 그들은 겁이 안 났습니다.
또 아무리 하나님이 신실히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그들은 염려나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이 능력도 있고 약속에 신실하지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치 않으면 어떻게 또 뒤비트릴는지 모릅니다. 그 약속은 약속대로 지켜 가지고 어떻게 뒤비트릴지 모른다 말이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 없이 확신했기 때문에 그들은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고 담대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같은 입장을 만나고 꼭 같은 처지에서 가지고 있었지마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하나님의 신실에 대해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믿는 믿음이 있는 것만치 저들에게는 평안이 됐고 안심이 됐고, 없는 것만치 그들에게는 두려움과 떨림이 됐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말하기를 '너거가 공연히 와 가지고 이런 말 해 가지고 우리에게는 지금 벽돌 급는 데에 그전에 몇 배나 지금 고역이 있으니까 우리가 지금 죽을 지경이다. 너거 때문에 우리가 고통을 당한다.' 그렇게 말하면서 원망을 했습니다.
그럴 때에 모세 아론도 처음에는 경험이 없으니까 흔들려서 하나님 앞에 원망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공연히 우리를 보내셔 가지고 바로에게 가 말하라 했더니마는 바로에게 가 말하니까 그 마음이 강퍅해져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전에 몇 배나 이 고역을 시켜서 짚도 주지도 않고 숫자는 그대로 벽돌을 구우라 하니까 이스라엘이 지금 고통스러워 견디지 못해서 부르짖고 있으니 아마 조금만 있으면 돌로 가지고 우리를 다 돌산을 만들어 우리를 죽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는 그것 한번도, 몇 번 경험한 일 없기 때문에. 그러나 그 뒤에는 모세 아론은 든든히 믿었어. '먼저 하나님께서 한 첫째 재앙 내리실 때 보니까 신실하다. 둘째 재앙 내릴 때 보니까 신실하다, 셋째 재앙 내릴 때 보니까 신실하다, 넷째 재앙 내릴 때 보니까 신실하다.' 그만 그 다음부터는 뭐 배짱입니다.
안심이오. 조금도 요동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때 보니까 말을 그래 왔어. "이 모세를 애굽 사람들에게 심히 높이 보이게 됐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처럼 봤고 바로 왕 그것은 말이지 애굽 백성들이 볼 때에 '아이고, 저거는 참 죽은 송장같이 우리와 같이 비참한 자요 무능한 자요, 아, 모세 아론 저 사람들은 저렇게 높은 분들이요 이스라엘 백성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이 높은 분들이라.' 이렇게 높아졌던 것입니다.
그것 이것이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일, 방해하는 일 그 일이 이루어졌을 때에 하나님을 믿고 그대로 순종함을 인해서 그 결과는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뚜렷이 드러났고, 하나님의 장자인 이스라엘 백성의 가치는 참 애굽 사람들이 볼 때에 이렇게 높이 드러났고, 애굽 사람은 애굽 사람대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는 망함이라 멸망이라 하는 것도 그들이 알아서, 이방인도 좋지 이스라엘도 좋지 하나님도 좋지 소문을 듣는 사람도 이 소문 듣고 그대로 하면 다 복 받을 일이라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애굽 나라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방해하는 일을 열 번이나 하도록 하고 또, 한 번 하고 난 다음에 애굽 사람이 순종하면 뭐 두 번 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가만있는 사람을 재앙을 내릴 수 있습니까? 이러니까 애굽 나라의 사람들이 마음이 강퍅해져 가지고 반대를 해야 또 하나 내린다 그말이오. 하나님이 반대하게 하고 반대하니까 또 내리고, 반대하게 하고 또 반대하니까 내리고, 이러기 때문에 "애굽을 이스라엘의 구속물로 사용했다" 그렇게 이사야 43장에 말씀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러니까 혹 사람이 분노하기를 '그러면 택한 너거만 거석이고 우리는 너거를 위해서 이용될 사람이라 말이냐?' 이렇게 말하면서 달려드는 많이 봤습니다. 그럴 때에 그분에게 대답해 주십시오. '자기는 왜 택한 사람이 아니라고 어찌 아느냐? 나도 몇 해 전에는 반대하던 자들인데 내가 예수 믿는 사람 됐다. 자기도 택한 자인지 모른다. 이러니까 지금 반대하지만 내일 예수 믿을지 모른다. 나는 자기가 택한 자인 줄 알고 택한 자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한다.' 모릅니다. 그 사람이 안 믿는 사람이라고 그것 택한 자 아닙니까? 택함을 받지 않은 자는 누구인지 모르지요 그러나 그 사람이 택한 자라 할지라도 아직까지 하나님에게 부름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소속하기 전에는 세상 사람으로서 악령에게 이용물이 되고 있는 그 시기요 그 기간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어떤 박해나 거역이나 인간들의 대항이 어떤 대항이 있어도 그것은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이 그 배후에서 그렇게 일으킨다 하는 것을 이것을 확실히 잡아야 됩니다. 공산주의가 독침을 가지고 '이놈, 예수 안 내놓으면 찌른다 찌른다.' 할 때에 그것도 내나 애굽에서 바로 왕이 해방시켜 주지 않고 방해하는 것이나 꼭 같은 것입니다.
그럴 때에 '이것을 조정해 가지고 이 박해할 마음을 이 공산주의자에게 일으킨 것이 주님이시요, 이 독침이나 이 재료를 연구해 가지고 한 것이 주님이 사람 시켜서 하신 것이요, 주님이 구원 위해서 창조하신 피조물이요,' 그것도 다 재료가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지으신 것이요, 그러면 주님이 이렇게 하시는데 뭣 하라고 이러느냐? 뭐 하려고 이렇게 하느냐? 여기에서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신실하며, 그분의 사랑과 능력과 신실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만 하면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이 독침 가진 사람도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 떨고 하나님 앞에 복종하고, 나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이라고 이렇게 구원이 이루어지고 높이 그들에게 신같이 보여지도록 이렇게 되어지고 하는 이 출애굽 역사가 여기 있는 것이로구나. 아멘. 주여 믿사옵나이다.' 주의 능력과 주의 사랑과 주의 신실을 믿고 주님이 그 시간에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해요. '너 안 믿는다 하면' '예수님이 나를 구속하시기 때문에 나는 주의 것인고로 안 믿을 수 없다. 죽어도 살아도 나는 주의 것이라. 나는 주님 믿는 것 이것밖에는 나는 딴것은 할 수가 없다 나는 주님을 믿노라.' 다니엘이 '기도하겠다.' 하는 것처럼 이렇게, 믿음을 방해해서 절정으로 몰렸을 때에 우리가 의심 없는 믿음을 가지고 탁 선포하면 그때는 '왕!' 하면서 그만 폭발이 돼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요. 여기에까지 하나님이 가는 이것을 가르치려고 이스라엘을 많이 가르쳤지마는 안 되는 자는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런고로 이것을 기억해야 되고, 또 그 노정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하필 4일간이면 평탄한 길로 가나안에 갈 터인데 연단 받지 않고 가나안에 가 가지고, 믿음으로 가는 가나안인데, 믿음 없다고 가나안에 있는 백성들을 다 토벌하고 없애버리고 믿음 있는 백성들에게 주려고 가나안으로 가는데 가나안에 가는 이스라엘 이것도 믿음이 성장되지 못하고 믿음을 마련치 못해 가지고 가면 내나 가나안에 있는 과거에 쫓아내는 그 족속이나 똑 같은 족속이니까 어떻게 이것들이 그것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 입어서만 살 수 있는 그 나라인데, 그 나라가, 가나안이 뭐 땅이 좋은 곳 아니오. '땅이 좋은 곳이라 그런가?' 그런게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정한 장소인데 그 장소는 어떤 장소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그분에게 순종하니까 그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그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그 장소인데 이들이 믿음 버리면 그만 거기에서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밖에는 안 나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을 떠난 가나안은 저주의 곳이요 믿음을 지킬 때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세계에 제일 된 복지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땅이 좋아 그런 것 아니오. 땅이 좋아 그런 것 아닙니다. 그와 같이 박한 터가 없어. 왜 그곳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느냐 하면 그 땅이 좋다는 그게 아니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면 '너거들이 여기에서 순종하면 하늘에 충만한 건 막 여기다 부어 주겠다.' 하기 때문에 그곳이 제일 좋은 곳이지 믿음을 떠날 때에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진노가 왔기 때문에 거기 있는 사람이 세계 민족 가운데 제일 불쌍하게 됐던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갈 때에 블레셋으로 인도하지 않고 이 광야로 인도해서 하필 가다가 홍해 바다 있는 데로 딱 갔는데, 그 홍해 바다는 물결이 다른 데보다 세고 암석이 많은 곳인데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라 해서 낮에는 구름기둥이 인도하고 밤에는 불기둥이 인도하는 그대로 졸졸 따라오니까 홍해 바다 좌우도 갈 수 없는 외통목에 가서 딱 몰리게 됐습니다.
그때는 열 가지 재앙의 이적을 보고 그들이 좋아서 졸졸 따라왔는데 안심하고 따라왔는데 딱 홍해 바다에 닥쳐 보니까 아무데로도 갈 수가 없지 앞에는 바다지 전진할 길이 없는데 딱 막혔습니다.
뒤에는 보니까 애굽 병정들이 와 가지고 대군을 거느리고 마구 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신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리로 인도했으니까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났으니 이 홍해 바다에 이제 하나님의 큰 권능 나타나겠다.' 이것을 짐작할 수 있을 터인데, 하나님의 사랑도 하나님의 약속도 하나님의 권능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출애굽 할 때에 하나님에게 얻은 지식 하나님에게서 보고 배운 경험 체험 이것은 없고 옛날 경험 체험 선입적 관념과 기존 지식 자기 주관 이것만 가진 자들은 자, 앞에는 바다가 가렸으니 가지 못하겠고, 좌우로는 암석이니 피할 곳이 없고, 뒤에는 저거 몇 십 배 강한 군대가 독을 품고 추격하고 있고, 여기에는 놀랄 길밖에 없고 두려운 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녹아났소. 그러나 거기에서 모세와 여호수아, 갈렙, 이런 사람들은 아주 기뻐했습니다. '놀라지 마라. 우리 하나님이 또 어떻게 하나님 솜씨 한 번 보자,' 그들은 열 가지 재앙에서 얻은 지식, 경험, 체험, 하나님의 신실, 진실, 권능, 하나님이 하시는 기이한 역사, 하나님에게 얻은 새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럴 때에 '야, 하나님이 또 무슨 일 하실 모양이다. 한번 구경하자.
염려하지 말고 우리 하나님의 하시는 솜씨를 보자.' 이렇게 했다 말이오. 다른 사람은 죽을 지경이라.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런 데로 인도하십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는 인간 보기에 어떻게 위급하고 참 낭패고 실패고 두려움만 멸망의 길 외에는 없는 것같이 보여져도 하나님의 인도에 대해서는 안심을 하라 하는 이것을 하나 깊이 인식시키기 위해서 그리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때에 모세도 마음에 '보자, 하나님의 솜씨를 보자. 구경을 하자.' 이렇게 했지마는 대중들이 너무 원망을 하고 '왜 우리를 애굽에서 죽도록 냅두지, 거기에 그만 하나님의 벌받아 죽었으면 좋을 뻔했다. 이리 인도해 가지고 홍해 가에 여기서 비참하게 우리가 다 살해를 받도록 이렇게 하려고 인도를 했느냐?' 너무 원망 불평이 많이 있으니까 모세도 그만 출애굽에서부터 얻은 지식이 밑천이 떠났습니다.
출애굽에서부터 얻은 그 지식, 경험, 하나님의 권능, 믿음, 이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믿음, 이로 말미암은 그 용감 이것이 그만 차차 자본이 떨어졌다 말이오. 밑천이 떨어졌어. 떨어지니까 모세가 있다가 '하나님이여, 지금 낭패를 당했는데 어찌 해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렇게 하나님에게 부르짖으니까 하나님이 모세에 대해서 책망을 했습니다. '얘, 너 이제까지 보고 경험하고 체험한 나와 너와의 관계, 나와 너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 나와 너와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굽 사람들의 관계 이 관계를 네가 그렇츰 보고도 지금 깨닫지 못하고 또 잊어버렸어? 뭘 부르짖어?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는 대로만 가라 했으니까 끝까지 가야지.
구름기둥이 여기에 머물고 있나? 가자고 하지 않느냐? 어디로 가느냐? 바다 위로 가지 않느냐? 바다 위로 가라. 건너가라.' 이러니 이것 참 기막힐 일입니다.
'작지를 바다로 가리키면서 그리 모두 가도록 해라 제사장들이 모두 법궤를 메고 이래 가지고 앞에 나서서 철렁철렁 흘러가는 물에 바다로 가라.' 이러니까 그때에 '바다로 가자.' 썩 들어서니까 물이 척척 척척 갈라져서 그만 양쪽으로 벽을 딱 쌓아버리고 가운데 바짝 마른 대로가 돼 버렸습니다. 그리 건너가게 되어졌어, 그것을 왜? 그리 인도하지 않으면 요런 모퉁이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경우까지 믿을 것이며, 어느 지경까지 그분을 인정하고 바라볼 것이며, 어디까지 주님의 능력이 있는가? 어디까지 이 애굽 사람들의 세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안심하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든든하고 되겠느냐?' 하는 이것을 거기 아니면 경험하고 체험시킬 수가 없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홍해 바다도, 좌우에 있는 암석도, 애굽의 그 대군들도 그것이 편이냐? 영원 전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 위해서 예정해 놓으신 그 순서대로 나오는 그 순서요, 또 그것이 영원 전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이때 쓰려고 그때 다 창조해 놓은 것이 딱 그때 그때 쓰여지는 것이라 말이오.
이렇게 하나님의 이 구원의 광대성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광대성, 그러니까 모세가, '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홍해 바다를 통해서 다시는 애굽 사람을 보지 않을 수 있는 그런 큰 역사를 꾸민단다. 안심해라.' 하고 이제 건너가자 하니까 쑥 건너갔습니다. 건너가고 나니까 저들이 건너오니, 그만하면 이적을 안 봤습니까? 이적을 봤지마는 거기에서 하나님께 대해서 하나님 역사에 대해서 신실에 대해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 머리가 푹 수그러지고 용기가 안 납니다. 기가 찹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조급하게 동동거렸으니 주님 앞에 참 이것 죄송하기 짝이 없다.' 목이 쑥 빠져 가지고 기가 막혀서 있고, 또 조금 신앙이 그보다 좀 나은 사람은 '참, 우리 하나님 권능 크다. 봐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 좋아서 노래를 부르고 찬미를 부르고 야단이고, 또 거기에서도 믿음이 하나도 생기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를 자기 머리 속에 담지 않는 그런 사람들은 '애굽 군대가 지금 쭉 갈라진 데, 저거도 오니까 저 사람들은 더 잘 오지 마차 타고 모두 병거 타고 오니까' 쪽 갈라진 데로 들어오니까 '아이구, 저 사람들 곧 온다. 곧 건너온다 건너온다.' 또 죽겠다고 또 인제 동동걸음을 또 쳤을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볼 때에는 하나님을 믿고 그 능력을 믿고 그 사랑과 섭리를 믿는 사람에게는 평강에 평강이 되고, 못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인도하는 걸음은 항상 동동거리고 항상 겁내고 기찰 걸음입니다.
떡 오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이것을 하나도 보지 못하게 한다고 했는데 또 그 약속을 지킬 것이라 말이오, 하나님께서. '너 작지를 가지고 가리키면서 그 홍해 바닷물이 그전 과거와 같이 되게 해라.' 하니까 싹 몰려 버리니까 그만 거기에 있는 애굽 사람들은 홍해 바다에 완전히 전멸되고 말았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려운 지경을 닥치게 하는 것, 지경, 그 노정입니다. 노정. 어려운 지경 어려운 자연, 어려운 자연 이 어려운 순서, 그 어려운 순서에 딱 다몰려서 진퇴양난이요 좌우로 도피하지 못할 수 있는 이런 외통목에, 홍해 바다는 기독자에게 어려운 일을 닥치는 그것을 누가 그렇게 하느냐? 그것 순전히 주님 한 분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것이 뭣 때문에 하십니까? 이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대해서 좀 유식하고, 또 하나님에 대해서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안심하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순종하면 된다는 이것을 재인식 재인식 자꾸 인식시켜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들과 하나님이 뜻이 맞고 행위가 맞아 가지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하나님 백성들에게 주고 하나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모든 것 받아 가지고 이 모든 피조물들에게 얼마든지 줘서 전부가 다 복이 되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복의 기관이 되도록, 피조물의 중보가 되도록 이렇게 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믿지 않기 때문에 낭파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홍해 바다를 인해서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뭐하려고 그리 꼭 그런 꼭닥스러운 일을 해?' 우리가 그 사실을 역사로 볼 때에도 하나님께 대한 지식, 하나님께 대한 소망, 하나님께 대한 순종 이것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이것을 주기 위해서 했습니다.
또 지나가니까 마라에 가니 물이 하나도 없었어. 물 있는데 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그만 물을 가니까 생수가 쿨쿨쿨 나오는데 목마를 때 벌떡벌떡 마시면 '주님, 감사합니다. 목이 마르더니마는 그 좋은 물이 있다.' 이렇게 할 터인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고 마라에 가니까 물이 없습니다. 보니까 모두 쓴 물뿐이오. 물이 씁쓰부리한데 목이 마르니까 할 수 없어 그 물을 먹었다 말이오. 그 물을 먹으니까 그만 병이 나고 배가 아프고 뭐 죽고 이럽니다.
이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뭐 원망하요. 모세를 원망하고 이러니까 모세가 있다가 '하나님, 이 백성들이 자꾸 이래 나를 돌로 치려 하는데 이것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러니까, 마라는 '여기 나뭇가지 이것 하나 꺾어서 물에 던져버려라.' 그게 뭐 대수롭지 않은 것 아니오? 그 나뭇가지 꺾어 가지고 그 물에 던진다고 그 많은 물이 어떻게 변화가 되겠어? 툭 던지고 나니까 그 다음에 보니까 그 물이 어떻게 아주 단지 맑고 이래 아주 깨끗한 물이 되어서 모두 먹었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이 이렇게 하느냐?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참 우리가 무엇인데 우리에게 어려움을 줘 가지고, 어려움을 줘 가지고, 어려움을 줘 가지고 하나님에게 호소하도록, 어려움을 줘 가지고 하나님에게 호소하도록, 나도 그런 경험 많습니다. 여러분들도 많이 경험 있을 것이라. 자녀들이 이게 뭘 도무지 평소에는 쓸 것 있고 이러면 그만 공부하고 난 다음에 저거끼리 학교 가 버리고 '학교 갑니다.' 하고 달아나 버리고 아버지한테 와 가지고 의논하는 것이나 뭣 좀 얘기하는 것이나 그런 좀 사귐은 없다 그말이오. 그러면 미리 '너 돈 쓸 일 있지?' 줘 버리면 안 되니까 돈 쓸 일이 있지만 안 줍니다. 안 주고 가만히 둬두고 애를 다룹니다. 왜 그러냐? 이것은, 그러면 우리집에 아이들 가운데 제일 돈 잘 얻는 아이가 하나 있는데 마지막딸 명희가 제일 잘 얻습니다. 와 놓으면 돈 달라 소리 안 합니다. 와 가지고, 떡 와 가지고 '아버지 뭐 어쩌고' 얘기도 하고 이것 참 부녀간에 재미있는 사귐을 이래 가지면, 가지면, 번연히 온 줄 알고, 또 그것 때문에 내가 안 주고 있었으니까 오면 '얘, 뭐 요새 쓸 일 없어?' '별로 뭐 쓸 일도 없는데요.' '혹 쓸 일 없나? 뭣 좀 쓸 것 있거든 말해, 아끼지 말고. 얼마든지 있으니까 갖다 써.' '뭣 그것 하나 있으면 필요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그래? 그것 얼마지?' 장만해 줍니다.
이것 모양으로 이제, 가다가 자꾸, 그냥 당신이 그래 줄 걸 시켜서 나뭇가지 하나 던지니까 그 많은 물이 그만 좋은 식수가 돼 가지고 되는 그런 능력 가지신 분이 그러기 전에 물 쿨쿨 흐르게 얼마든지 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안 하고 그래 하는 게 것이냐? '하나님이여, 우리가 죽겠습니다.' 이렇게 원망 불평하는 것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때 그랬어. "원망하다가 망했다" "원망 하다가 망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원망하는 그것은 참 하나님이 싫어 하시요. 그럴 때에 '하나님이여, 우리 목이 말라서 안 됐습니다.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주여, 우리가 주님에게 대해서 부르짖지 않고 주님에게 대한 이 사귐을 밀접하게 가지지 않고 성글게 하고 엉뚱한 것만 보고 주님 안 보고 딴것 보기 때문에 이렇게 한 줄 압니다. 주여, 목마릅니다. 마실 것 좀 주십시오.' 어린아이가 어머니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처럼 이렇게 말하면 주님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그래? 목이 말라? 주지.' 또 어떨 때는 우리하고 또 농담도 하실 거라 말이오. '그러면 내가 줄 수 있어? 내가 줄 수 있는 줄 알아?' '줄 수 있기를요. 어서 주십시오. 목마릅니다.' '그래, 주지.' 주시고, 이렇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되 우리가 당신에게 가까이 해서 당신에게 원하고 당신을 더 친근히 바라보고 의지하고 '이분 한 분 만 하면 못 할 것 없다.' 하는 이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 하나님이 이렇게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먹을 것이 없으니까 만나 가루 줄 때도 배고파 이러니까 '그래, 그뭐 내가 주려면 쌨지. 그러면 내일 아침에는, 아침에는 내가 먹을 떡가루를 줄 터이니까 많이 거두지 말고 먹을 것만치만 거두고 외에 것은 거두지 말아라.' 그래 약속해 놓고 '공중에서 무슨 떡가루가 내려올까보냐?' 그 이튿날에 보니까 이 서리같이 양사방에 소복하게 왔는데 이걸 먹어 보니까 참 아주 과자로서는 특등 과자 맛입니다. 이걸 끌어다가 40년 동안이나 먹고 지내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한 것이 무엇이냐? 의식주에 대해서 당신이면 다 해결될 수 있다. 당신에게 부르짖어서 구하라. '하나님의 계명 지키면 굶어 죽으면 어쩌려고? 맞아 죽으면 어쩌려고? 벗어 죽으면 어쩌려고? 목말라 죽으면 어쩌려고? 이 강한 세력, 세상 세력들을 어떻게 하려고?' 이것을 낱낱이 가르쳐서 당신 한 분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그 약속을 신실히 믿고 순종 하나만 하면 다 된다 하는 것을 인식시켜 가지고 가나안에 데리고 가려고 했지마는 이것을 믿지 못하고, 또 하나 시험해 보려고 하나 이래 내놓으면 어려운 일 있으면 '아이고, 이제는 죽는다. 이제는 안 된다. 이제는 안 된다.' '하나님이 해 주신다.' '몰라, 될런가? 하나님이 해 주실 수 있을까? 하나님이 해 주실란가? 하나님이 해 주실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해 주실지 안 해 주실지 그분의 사랑과 그의 인도의 신실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 믿기는 믿지마는 하나님의 권능이 없다고 하나님의 권능을 믿지 않는 사람, 이러니까 내가 열 번 시켜 놓고 '이제 믿느냐?' '모르겠는데요? 하나님이 해 주실런지 안 해 주실런지 모르겠는데요.' 이러니까 '봐라, 또 한번 해 주며 이제 믿겠나?' '예, 믿습니다.
이제는 믿습니다.' 또 좀 있다가 그런 일 한번 해 놓고 또 보니까 '인제 믿나?' '모르겠는데요?' 이것이 시험하다가 40년 동안 망했습니다.
항상 시험이라. '봐야 알지요. 두고 봐야 알지요.' 그만치 봤으면 믿을 수 있는데 이래 가지고 망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거울이라 그말이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 하나님의 우리를 인도하시는 이 책임지심 이것을 믿지 못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수십 년 신앙생활 한다고 해도 그이의 마음과 몸의 기능은 광야인 이 세상에서 다 썩어져 버리고 말고 하늘나라에 옮겨갈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의 믿음은 일합니다. 믿음은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믿읍시다. 그의 사랑을 믿읍시다. 그의 약속의 신실을 믿읍시다. 어느 현실에든지 그분의 인도는 다 생명이요 평강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어떤 낭패와 실패가 있어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없는 가운데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있는 걸 없앨 수도 있고 없는 걸 있게도 할 수 있습니다.
(축도) 주님, 우리를 오늘도 주님의 나라에 가는 길을 환하게 보여 주시고 또 능력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성령으로 도우셔서 성령의 결실이 100배, 60배, 30배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 주님 앞에 여러가지로 감사하여 감사 헌금을 드린 그 모든 조건마다 저들이 잘 강직하여 끝까지 감사하고 주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조심하는 저희들이 되도록 도와 주시고, 드리는 십일조에 대해서도 주께서 구조에 축복하사 더우기 주님과 밀접해 약속하신 대로 곡간에 넘치게 하여 주시고, 모든 헌금을 주께서 기뻐 받으셔서 많은 생명들을 구원하는 데에 오병이어와 같이 주의 축사가 함께 하사 많은 결실이 있게 하시고, 저들에게 더욱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과 성품을 함께 드릴 수 있는 산 제물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화 감동하심이 항상 저희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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