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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히1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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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형준 목사 |
참고 : | 동안교회 |
현실을 극복하는 믿음
히브리서 11:30
한 교육학자는 자신의 세 아들에게서 각기 다른 세 가지 태도를 관찰하였습니다. 아이가 기어다닐 무렵, 앞에 장애물이 있을 때 큰 아이는 멈추어 주저 앉아버립니다. 둘째 아이는 장애물을 피해서 다른 데로 기어갔습니다. 셋째 아이는 장애물을 밀어젖히고 전진했습니다. 여기 서로 다른 태도에 흥미를 느낀 교육학자는 기어다니는 또래의 아이들도 실험했는데 역시 세 종류의 태도를 나타냈다고 합니다. 첫째 유형은 체념형으로 가장 소극적이며 비생산적입니다. 성인의 용어로 쓰면 비관론자 운명론자 염세주의자 자학과 자기연민에 사로잡힌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도피형인데 어른의 용어로 말하면 냉소주의자 방관주의자 책임회피자 그리고 동정과 인정을 받으려는 삶의 자세입니다. 셋째 아이가 가정 적극적인데 이 아이는 장애물을 젖히고 나아갔습니다. 동기를 분석해보았더니 두 가지더랍니다. 하나는 무엇인가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기분 나쁘다는 감정을 가지고 투쟁하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장애물을 장난감 삼아 놀면서 밀어젖히고 나가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장애물이 있을 때 어떻게 극복하십니까? 인생의 여정 속에서 우리의 지혜로도, 우리의 능력으로도 극복하지 못할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면서 좌절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신앙을 가질 때, 이 믿음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무엇인가 보장할 것이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예방하거나 피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제공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진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하지 못할 여리고성이라는 요새를 만납니다. 기대는 무너지고 실망이 찾아옵니다. 아울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인해 주저앉는 절망적인 상황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여리고성 같은 문제들은 존재합니다. 그 문제는 우리를 좌절시키기도 합니다. 반드시 나아가야 하는데 인생의 길목에서 여리고 같은 문제를 만날 때면 두려워집니다. 고통스러워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방황하게 됩니다. 개인이나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교회나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 핵이라는 여리고성 앞에서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 앞에, 감당하기 어렵고 도무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음에도 반드시 나아가야 할 때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믿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첫째 생각의 기초를 하나님 주신 약속에 두는 믿음입니다. 여리고성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보고 있고 알고 있는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명기 1장 28절,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다고 말합니다. 신명기 3장 5절, 모든 성읍에 높은 성벽이 둘러있고 문과 빗장이 있어 견고하다고 합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여리고 성은 두 겹으로 쌓여있어서 성벽의 꼭대기에는 두 대의 마차가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내성은 4-5m, 외성은 1.8m 입니다. 특별히 요새화된 곳에는 높이가 7.5m에 두께가 6m 가량 되어서 어떤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그리고 40여 년 전 정탐꾼들이 말했던 대로 여리고 성안에 사는 백성은 크고 장대해서, 현실적으로도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이 보잘 것 없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이루는 여호수아 6장 1절에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말씀합니다. 성문이 닫힌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망이 막힌 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해줍니다. 이렇게 눈으로 보고 확인할 때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도무지 우리 능력이나 힘으로는 불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할 수 없다고 포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에 도전한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 주신 약속의 말씀에 자신들의 생각을 맞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6장 2절 이하에 하나님의 약속은 두 가지입니다.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이스라엘 손에 붙였다는 것과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리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여기서 네 손에 붙였으니 에 ‘붙였으니’ 라는 ‘나타티’는 과거완료형으로, 물건을 받을 사람에게 이미 준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호수아에게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리라” 말씀하셨던 말씀의 재확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 앞에 ‘보라’ 즉, ‘레에’는 ‘주목하다’로 특별히 강조하고 분명하게 말씀 주심을 의미합니다.
이 약속에 생각을 맞출 때에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손에 여리고 성이 달렸고, 여리고 성은 반드시 무너지지라는 약속을 믿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이 약속을 가진 백성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장애물은 가나안이 아니라 바로 불신앙이라 했습니다. 맞습니다. 오늘 우리 생각의 근거는 현실에 있습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져보는 것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포기합니다.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 생각이 약속의 말씀에 기초하고 계속해서 초점을 맞춘다면 두려움도 불안도 없습니다.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조니 에릭슨(Joni Eareckson)은 미국 수영선수로서 1967년 최우수 여자 체육인으로 뽑혔습니다. 그러나 다이빙 연습 중 사고로 목이 부러져 목에서부터 몸 아래 부분이 전부 마비되었습니다. 더 이상 자기 미래를 열어갈 수 없었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었습니다. 하반신 마비라는 자신의 처지를 헤치고 나아가는 것은 마치 여리고를 극복해야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조니는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있을 것을 그리고 약속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낙심하지 않고 주님의 뜻과 목적을 두드렸습니다. 그는 상업미술의 전문가가 되었고 ‘한 발만 더 멀리(A Step Further)’라는 베스트셀러를 저술하였습니다. 조니는 책에서 고백합니다. ‘나에게 장애가 있어도 내가 부족해도 하나님은 무엇인가 나에게 목적을 두셨습니다.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도 틀림없이 목적과 기대를 두셨습니다. 나는 휠체어에서 일어서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나의 휠체어에 가득 차 있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 이상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미래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신들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여리고 앞에서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믿었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약속하신 땅을 향해 희망의 전진을 계속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자신의 삶 속에서 여리고처럼 거대한 벽에 부딪힌 분이 있습니까? 우리와 함께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승리하게 하실 주님의 약속을 다시 바라보십시오. 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할지라도 이 약속이 있으니,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의 약속을 믿고, 붙들고, 선포하며 나아가십시다. 여리고를 무너뜨린 믿음은 생각의 기초를 하나님 주신 약속에 둔 믿음입니다.
둘째로 여리고를 무너뜨린 믿음은 행동의 기준을 하나님 말씀 순종에 두는 믿음입니다.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승리를 위해 구체적으로 행동지침을 말씀해주십니다. 여호수아 6장 2절 이하를 보면 매일 한번씩 성 주위를 돌되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성을 돌 때 제사장 일곱은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하고, 마지막 날 일곱 번째에 제사장이 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소리가 들릴 때에 온 백성이 큰 소리로 외쳐 부르라고 말씀합니다. 그럴 때 성이 무너져 내리는데,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길갈을 출발해서 여리고성을 한 바퀴 도는데 모두 2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합니다. 문제는 성을 도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 순종하는데 있었습니다.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성을 돌아야만 합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와 현실적인 계산에 근거한다면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돌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늘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때로는 이해하지 못할 일들도 많습니다. 만약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지시였다면 구태여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다 행동에 옮길 것입니다. 진정한 순종은 믿음에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아말렉과 싸울 때에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칠 때에 그들의 모든 소유와 짐승까지도 모두 진멸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생각했습니다. 정말 탐스럽고 좋은 짐승들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온 백성에게 풍성히 나누고 기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이고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깝습니다. 그래서 가치 없는 것은 제외하고 좋아 보이는 것은 남겨두었습니다. 이때 사무엘이 사무엘상 15장 22절에서 유명한 말씀을 전합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습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고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시고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심은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빌2:8).
여기서 순종하는 믿음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끝까지 순종합니다. 본문에서 칠일동안 여리고성을 돌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총 13번을 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은 온전한 순종이요 끝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여리고성을 한 바퀴 돌았을 때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는 칠일 째 되는 마지막 날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일정한 시간에 여리고 성을 돌고 일을 다 마친 후에는 진으로 돌아가라 지시했습니다. 계속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조금의 변화도 없고, 변화될 희망도 없는 일을 반복해서 한다는 것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이것은 말씀하신 분을 믿고 끝까지 신뢰할 때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일곱째 날 여섯 바퀴를 돌때 가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성들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찾아올까요? ‘정말 돈다고 무슨 변화가 일어날까?’ 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말씀대로 순종하면서도 찾아오는 의심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상황은 수리아의 장군 나아만이 엘리사에게서 요단강에 7번 몸을 담갔다 나오면 나을 것이라는 지침과 유사합니다. 한번 담갔을 때도 아무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진흙탕 물에 정말 용기를 내어 시킨 대로 했는데도 말입니다. 중간에 그만 두고 싶었지만 신하들이 격려했습니다. 6번까지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일곱 번이 끝나고 난 후 나아만의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바퀴 돌고 왔을 때에도 변화는 없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13번을 다 돌고 나서야 성은 무너졌습니다. 끝까지 온전한 순종이 있을 때 하나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성을 7번 돌았다고 무너집니까? 요단강 물에 7번 들어갔다 나왔다고 해서 문둥병이 나았습니까? 7번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대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지식이 역사를 이루지 못합니다. 말씀에 근거한 순종이 새로운 변화를 일으킵니다. 한 성서학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한 번의 순종이 상황을 바꾸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온전한 순종은 반드시 상황을 바꾼다.’ 누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 번쯤은 아니 몇 번쯤은 말씀대로 용기를 내어 순종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은 온전한 순종이요 끝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순종하고 인내하십시오.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 이성이나 지식과 지혜보다 하나님의 명령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혜롭고 정확합니다. 때로는 내 이성과 반대되더라도 말씀대로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열심을 내지만 삶의 변화가 없고, 그리스도인이 누려야 할 구원의 즐거움이 없다면 순종부분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지난주 수요 예배 때 진돗개 전도왕 박병선 집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교회 출석 첫날부터 저 빈자리를 자신이 채우겠다고 약속하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자기 체면이나 능력을 따져 보지 않았습니다. 이제 처음 교회나간 분이 신앙에 대한 무슨 지식이 있었겠습니까? 무슨 전도훈련을 받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간증을 들으면서 우리 중에는 무모하고 무식하게 전도했다 생각한 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영혼구원이 인간관계와 사랑으로 이루어진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이 신앙 생활했을 것입니다. 박 집사님의 아내, 권사님도 40년 동안 전도하지 못한 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인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그대로 행한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한 영혼이 주님 앞에 돌아오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자기 생애에 그토록 울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슬퍼서가 아니라 말씀대로 순종할 때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 영혼을 포기치 않고 붙드시는 사랑을 함께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교양과 지식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대로 믿고 순종의 발걸음을 내 디딜 때 주님께서 예비하신 기적의 삶을 체험하게 됩니다.
여리고를 무너뜨린 믿음은 행동의 원칙이 하나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함에 있는 믿음입니다.
셋째 여리고를 무너뜨린 믿음은 감성의 훈련을 통해서 침묵으로 하나 되는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를 7일에 걸쳐 13번을 도는 동안 지켜야 할 독특한 명령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6장 10절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찌니라 하고” 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침묵하라 했을까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아는 특징이 하나 있었습니다.
현실과 하나님의 명령 사이에 이해되지 않고 간격이 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과 불평으로 항상 그 공간을 메웠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은 불평과 원망의 역사였고, 그들의 말대로 멸망한 역사였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리고는 정말 난감하고 황당하면서도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광야 40년을 기적으로 이끌어 오시고 요단강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넜다 할지라도, 여리고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이제 또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 입장에서 말하기 시작했을 수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던 불평과 원망과 의심이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람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도 기억하지 못하고 현실의 어려움 앞에 다시 불평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4장 28절에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여호수아와 지금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불평하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보지 못하고 그들의 말처럼 광야에서 다 죽게 만든 것을 보았습니다. 불평 불만하는 백성의 특징을 잘 알기에 여호수아는 침묵하도록 하였습니다.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이 사건에는 불평이나 원망의 말이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 것을 아십니까? 현실과 하나님의 명령 사이에서 이해되지 않을 때 누구든지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야, 이렇게 돈다고 정말 무너질까? 한 번 이치에 맞게 따져보고 계산을 해보자. 이것이 정말 맞는 이야기인가? 여리고 성을 연구하고 또 공격하기 위해 작전을 짜든지 아니면 돌아갈 길을 알아보든지 해야지 이게 뭐야 매일 성만 돌고......’ 여러분 이런 말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 아십니까? 모든 사람이 공감합니다. 왜냐하면 현실에 근거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에서 나온 말은 아닙니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합니다. 이 말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합리적인 하나님의 지시라면 누구든지 다 따를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을 때는 하나님의 사역이라도 불평합니다. 믿음과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미래를 보지 못합니다. 오직 자신과 현실만을 보기 때문에 불평합니다.
마이어(F. B. Meyer) 박사는 모든 명령 가운데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것이 ‘조용히 하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음성은 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아무런 말도 우리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불평을 하나님께만 토로해야합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습관과 취향에는 낯선 것입니다. 죽음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우주에서 함락되어야 할 마지막 원수이듯 그분의 자녀가 배워야 할 마지막 교훈은 혀의 절제입니다. 우리는 불평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불쾌감을 이야기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에 대해 가장 가능성이 있음직한 치료방법을 토론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침묵은 불신앙에서 나오는 의심과 불평을 중단시킵니다.
또 하나 침묵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나아가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하게 합니다. 일곱 제사장들은 언약궤 앞에서 진행하며 각각 나팔을 불도록 명령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광야생활을 통해서 나팔 부는 것과 또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민10:1-8). 나팔소리는 그것을 따르는 자들에게 승리를 확신시켜주는 기쁨과 자유의 소리였습니다. 또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습니다. 이 나팔소리는 언약궤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억 속에 있는 승리를 되새기게 했습니다. 그들의 침묵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강준민 목사님이 쓰신 ‘뿌리깊은 영성’을 보면, 영적 성장의 장애물 중 하나는 소음인데 외적 소음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이 내적 소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적소음은 세상을 사랑하는 육의 생각이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육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 되게 만듭니다(롬8:5-6). 침묵은 우리에게 분별력을 갖게 해줍니다. 침묵은 나의 기대와 바램, 욕망의 소리를 잠재우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해줍니다. 토머스 무어는 침묵을 통해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최근에 우리 입술을 통해서 쏟아낸 말들을 살펴보십시오. 그 말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는 말이 있었습니까?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며 눈앞에 전개되고 떠오르는 생각 저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 말들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분노와 상한 감정 등 주체할 수 없는 안타까움의 말들뿐이었습니까? 그 말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었습니까? 입술의 소리가 믿음의 소리였는지를 돌아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침묵 중에 걸아가면서 무엇을 묵상했을까요? 여리고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함께 언약궤와 나팔 그리고 제사장들의 모습은 지난날 불가능했던 일들을 가능하게 하셔서 오늘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을 묵상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그들이 함께 함성을 질렀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믿음 안에서 하나 됨의 소리입니다. 그리고 이미 자신에게 여리고를 주셨음을 확신하는 믿음의 소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인 나팔소리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순종의 함성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분명히 가야할 길이며 해결되어야 할 것인데 나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해결하지 못 할, 그래서 포기해야만 하는 크고 장대한 여리고를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으로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오늘 나의 삶 속에 너무나 큰 절망으로 다가와 있는 그 문제를 향해 주님은 여리고가 무너진 것처럼 분명히 해결될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내 인생의 여정에, 가정에 그리고 이 한반도 위에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여리고와 같은 크고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여리고를 무너뜨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 우리 믿음이 된다면 크고 장대한 성의 무너짐과 같이 삶의 여리고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제 좌절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종교개혁자 칼빈은 믿음이란 세상에 대하여 눈을 감고 하나님에게 귀 기울이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제 현실을 보던 나의 눈을 들어 하나님 약속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내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그리고 온전히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침묵하며 내 불신앙의 소리, 육의 소리가 아닌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 나를 향한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김형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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