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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5:15-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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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5장 15절-21절.
15절-21절: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가서 바로에게 호소하여 가로되 왕은 어찌하여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 종들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고 그들이 우리더러 벽돌을 만들라 하나이다 종들이 매를 맞으오니 이는 왕의 백성의 허물이니이다 바로가 가로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자 하는도다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찌라도 너희가 벽돌은 여수히 바칠찌니라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너희의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 것을 만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개척교회의 창립예배 때 그런 소리 많이 들을 수 있을 거야. ‘이 교회가 부흥 발전해서 숫자적으로 많이 불어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니까 그 일을 잘하는 면에 있어서 충성스러운 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축복기도 많이 할 거야.
그렇게 되면 사람 망해요. 목회자는 망해요. 일은 얼마나 잘 돼서 숫자적으로 많이 불어날 런지는 모르지요. 또 잘 된다고 장담도 못하는 거고, 못 된다고 장담도 못하는 거지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목회자가 그런 정신을 가지면 하나님 앞에 안 만들어진 채, 육이 주격이 된 채 하나님께 대적만 하고 간다는 것은 확실해요.
자기가 자기 속에서 성경의 사상이 샘솟듯이 나오는 그런 것을 맛 본 것이 없으면 마음은 안 그렇다고 하지만 나오는 것은 육이란 말이요. 이렇게 되면 육으로 계속 나가게 되고, 육이 커지게 되고 그래요.
그렇게 육본주의로 나가면서 이제 육이 커지게 된 후에 옳은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대로 나가려고 하면 기존의 교인은 다 떨어질 각오를 하고 나가야 돼요. 아닌 말로 그렇게 해서 기존의 교인이 다 나가면 아무래도 목회는 안 될 거 아니냐? 진정 진리로 나가려면 그런 지경에까지 들어가야 돼요.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탈탈 털어버려야 돼요.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참 어려워요. 그런 식으로 굳어져 놓으면 진리로 돌아서기가 그만큼 어려워요. 그러니까 ‘이쪽 저쪽에 다 걸리지 않게 살살.’ 그거는 약은 꾀야. 진리의 노선은 육이면 육이고 영이면 영이지 영과 육을,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합친 것은 아주 간사한 인본주의에요. 그거 못써요.
그리고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또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사건이 있거든요. 풀리지도 않고 오그라지고 그런 게 있을 수가 있어요. 그럴 때는 ‘하나님께서 하시는구나’ 하고 아예 맡겨버려야 돼요. ‘하나님, 날 죽이려면 죽이고 살리려면 살리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날 죽이더라도 내가 죽는 면에 있어서 하나님께로 향해서 원망소리가 없을 정도로 들어가야지요.
‘네 집을 처리하라’ 그러면 ‘예’ 해야 되는데 ‘내가 이런 이런 공력이 있습니다’ 이래놓으면 이거 큰일이야. 우리가 얼마나 만들어져야 할런지?
우리 교역자들 세계에서 자기 혼자가 아니고 식구가 달릴 때에는 물질적인 면에서 상당히 고충을 당해요. 그게 참 뚫고 나가기가 어려워요. 목회자 가정에 물질적으로 그렇게 돼놓으면 모든 시험이 막 복합적으로 들어올 수가 있지. 그러니까 사단의 궤계가 ‘네가 이래도 견딜 수가 있느냐? 네가 이래도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느냐?’ 하는 거지요.
대국적인 사건이 아니라도 개인적으로 오는 사건 속에서도 그런 것이 때때로 있을 수 있어요. 그 때 참 어려워요. 그러니까 항상 밑바닥을 염두에 두고 그걸 이길 수 있는 실력을 평소에 키워야 하는데, 이 실력을 키우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깨닫고 영적인 면에 영력을 키우는 이것밖에 없어요. 딴 도리가 없어요. 절대 딴 도리가 없어요.
그리고 사건적인 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저 아는 대로의 성경을 깨닫는 것은 사건이 오는 것은 내가 무마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사건을 당할 수밖에 없는데, 이 때 무조건 ‘믿사오니’ 이거는 되지를 않는 거고, 그 사건 속에서 ‘내가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앞에 사건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어떻게 이걸 처리해 나가느냐’ 하는 이런 처리방안의 지혜도 있어야 되고, 여러 가지가 그 속에는 들어있는 거지요.
내가 사건을 당하는 게 진리 때문이라면 진리를 붙잡고 목숨을 내대고 나가면 될 것이고, 사건적으로 내가 회개를 해야 할 문제라면 회개를 해야 만이 그게 이치인데 회개는 안 하고 ‘믿사오니’로 나가는 이건 되지를 않지요. 있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그건 미련한 거지요. 어리석다 그 말이지요.
쉬운 예를 든다면 개척교회에서 그런 거 많이 볼 수 있고 그래요. 물론 하나님의 주권적인 면에서 볼 때는 하나님께서 아시겠지만 그러나 이를테면 개척교회를 하는데 협조적으로 외부에서 헌금이 들어오는 것도 없고, 그리고 가정을 가진 이상 가정을 부양할 책임도 있는 것인데, 그 목사가 노동을 할 수도 있고, 기술도 있고 그렇다면 자기가 일을 찾아서 해야 하는 건데 그러지를 않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시겠지. 믿사오니’ 하고 그냥 있는 거라.
그게 믿음인 것 같으나 그건 믿음이 아니에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건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믿음으로 하는 거거든요. 그게 옳고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그게 신앙사상의 정신이고 그래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믿사오니’ 해가지고 상당히 어려움을 당하는 그런 자들이 많아요. 그 잘못 생각한 거지. ‘죽으면 죽으리라’를 그런 데다 붙이면 안 되는 거요. 그래서 고생하는 게 ‘주님 이름을 붙들고 고생합니다’ 그렇게 되느냐 그 말이요.
그러니까 나는 목회만 해 나가면 가족을 부양할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 보실 때에 그것도 있을 수가 있어요. 그렇지요. 그런데 그 면이 계속 안 될 때에는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게 급선무지요. 그러니까 비진리적 신앙으로 배짱을 내대고 자꾸 나가봐야 소용이 없다.
지금 내가 얘기하는 게 우리가 진리를 따르는 면에서의 얘기지 비진리적 신앙이라면 우리가 이런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예민하게 섬세한 구석구석까지 신앙으로 돼야 돼요. 어쨌든 목회를 하는 것도 실력을 키우는 거, 또 생활하는 것도 실력 키우는 거. 그 면만큼은 우리가 떼놓을 수는 없어요. 목회도 일종의 실력 키우는 거다.
실력이라고 할 때 방편적인 면에서 실력이 나오는 것도 실력은 실력이지. 그런데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거지만 내가 진리라면 일반인들이 볼 때는 ‘네가 기독교인이냐?’ 그렇게 말할지라도 내 입장에서는 진리 편에 서서 당당히 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를 않고 그 중간에 있으면 이쪽으로부터도 신임을 못 받고, 저쪽으로부터도 신임을 못 받고 그래요. 양쪽으로 협상적으로 믹샤를 시키는 것이라면 진리 쪽에서는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요. 안 되는 거요. 그러나 일 쪽으로는 그렇게 하면 일은 잘 돼요. 잘 하게 만들 수 있고.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망해요.
그러니까 목회자라면 아예 목회를 못했으면 못했지 그렇게 나가게 되면 교회도 가정도 사람도 다 망해요. 그리고 평신도라도 사람 바로 만들어져 나가는 이것이 더 하나님 앞에 큰 은혜고 복이야. 혹 시간은 더딜지 모르지만 사람이 만들어져 나갈 진대야 하나님께서 들어 쓰실 수 있는 거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나도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목이 곧고 교만하고 건방진 종은 하나님께서 들어 쓸 수가 없어요.
진리를 주는데 있어서 방편 자체를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요. 신앙 면에서 어느 궤도에 올라서기까지는 방편이 필요할 수도 있는 건데, 문제는 이럴 경우 뚜렷한 신앙사상을 가지고 사건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바로 세우고 나갈 수 있다면야 인본주의든 뭐든 잡아먹으려고 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그 방편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자기가 실력도 없으면서 날개도 안 돋친 상태에서 용기만 갖고 방편적으로만 하게 되면 상대가 진리에 잡아먹혀지느냔 말이요. 안 된단 말이요. 잡아먹혀지는 게 아니라 상대 쪽에서 나를 차단시켜 버린단 말이요.
신학교도 그렇지 않아? 그 신학교에 옳은 종이 한 분이 있다고 하면 그 옳은 종은 거기에 있으면 안 돼요. 민주주의는 다수결인데 신학교도 다수결로 운영되기 때문에 그 다수결의 수에 의해서 옳은 종은 쫓겨나가기 마련이에요. 생각을 해봐요. 다른 종들이 비진리적 종들인데 한 사람의 옳은 종을 향해 ‘아, 이 사람 참 종이다’ 그렇게 됩니까? 그렇게 된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지금 신학교가 그게 아니란 말이요. 그러니까 못된 세력이 힘을 얻어가지고 권력적으로 세력적으로 옳은 종을 몰아붙이는 거지요.
이럴 경우 쫓겨나가는 옳은 종은 쫓아내는 그들보다야 신앙이 더 좋지. 그렇게 옳은 종이 쫓겨나간다고 해서 옳은 종이 신앙을 잃어버리면 안 되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옳은 종의 신앙을 그들이 못 알아주어서 그런 거지 옳은 종의 신앙성분이 세상으로 나간 건 아니거든.
우리가 여러 말하는 것보다도 요한계시록에서 나타나는 영적인 그 모든 운동들이 우리 인간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사상으로 보일 거예요. 그게 사람의 마음을 사상을 다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개척교회를 하려면 갈수록 더 어려워져요. 옳은 종은 옳게 믿고 바로 믿고 거짓적인 그들 밑에 가서 조종을 안 받으려고 하니, 그들 밑에서 그들의 인정을 안 받으려고 하니 생활문제를 신앙력을 가지고 스스로 해 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 옳은 종을 하나님이 옳은 신앙으로 안 보는 거냐 하면 그건 아니거든요
이제 성경 출애굽기 5장 15절부터 21절까지.
하나님께서 성도 한 개인에게 꿈을 주시기 전에 히브리 전 민족이 공통적으로 가질 수 있는 공통적인 꿈이 있습니다. 히브리 민족은 전체 선민을 상징하는 상징계시입니다. ‘히브리 민족’ 할 때는 곧 택한 백성을 의미한다.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은 혈혈단신입니다. 이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살고 있었지요. 그 때에 그 가나안 땅에 한 민족이 들어와서 살 수 있도록 텅 빈 자리는 없습니다. ‘한 민족이 들어와서 살아라’ 하는 그 땅은 없단 말이요.
그 좁은 땅덩어리 속에 열 고을 이상 살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가나안 땅 저 유브라데 강을 경계로 해서 남쪽 홍해까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했습니다. 서쪽은 지중해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없으니까 인간의 생각으로 생각해 볼 때는 그건 실현 불가능입니다. 설령 자식이 있더라도 불가능이야. 그러나 아브라함은 ‘언젠가는 가나안 땅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하는 그 꿈을 갖고 있었다. 참 이거 놀랍지 않습니까?
아닌 말로 ‘나는 온 세계 몇 십억이 되는 인류 속에서 가나안 땅의 주인공이 되리라’ 하는 하나님의 그 꿈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거 놀라운 일이 아니겠느냐? 참 놀랍다. 우리가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니 참 놀랍단 말이요. 하나님께서 보실 때도 참 기특할 테지요. 그러나 세상사람들이 볼 때는 ‘그거는 옛날 전설에 나올만한 지나간 얘기다’ 할까요? 아예 정신병자로 여기고 말 겁니다.
사실 인간의 생각으로는 그 꿈은 실현되기가 참 어렵습니다. 수십 명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 롯까지 포함한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당시로 볼 때 그 때 현재적으로 있지도 않는 너의 씨로부터 난다고 했으니 그게 믿어지느냐 그 말이요. 그 땅에 뿌리박고 있는 터줏대감들을 내어 쫓고 아브라함과 이삭이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입니다.
그러니까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속담이 있듯이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맞지를 않아요. 인간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에 안 맞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꿈을 가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꿈이 실현되는 것도 못 보고 175세로 일생을 마치고 갔어요. 그런데 아브라함 당대에 그 꿈이 실현되게 해 주겠다고 하는 것으로 믿었더라면 아브라함이 죽을 때에 ‘아이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거짓말 했다’ 그렇게 될 것이 아니겠느냐 그 말이요.
그러나 아마도 죽으면서도 그 꿈을 갖고 죽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꿈의 전달은 이삭에게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너와 네 자손에게’ 라고 한 것을 보면 네 당대가 아닌 네 핏줄을 타고 나오는 백성에게서 언젠가는 실현이 될 것이라는 그 꿈을 아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그 말이요. 이삭은 또 그 꿈을 유산으로 물려받았습니다.
사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준다고 약속을 했으니 너는 그 꿈을 가지고 살아라’ 하는 말을 들을 때 이삭으로서는 그 말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게 아니므로 ‘이 아버지가 무슨 공상을 하는 거냐, 망상을 하는 거냐? 아버지가 노망이 들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기 쉬울 거란 말이요.
솔직히 말해서 오늘날 믿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그 말을 하면 우리가 상상컨대 그 때나 지금이나 ‘아버지가 미쳤나보다. 우리 부모가 미쳤나보다’ 그럴 거란 말이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이 욕심이 나서 그런 꿈을 꾼 것도 아니고, 공상도 아니고, 상상도 아니고 세상의 주인공이신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니 그 약속을 반드시 실현하실 것을 믿고 그 꿈을 이삭에게 물려주고, 이삭은 야곱에게로, 야곱은 열두 아들에게로 그 꿈을 물려준 겁니다.
야곱이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주리라. 너와 네 자손들이 이 땅에 편만하고 주인공이 되기까지 너와 함께 하겠다’ 하는 꿈을 꾸었지요. 그래서 야곱은 그 꿈을 버리지를 아니했지요.
현실은 형님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망명객이 되어가지고 삼촌 집으로 피난을 가지만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 이삭에게 약속한 것, 그 꿈을 들판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고 있는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그 벧엘 들판은 화려하게 꾸며놓은 호텔이나 여관방이나 호화로운 주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공이 들어있는 인조품이 없는 하나님의 자연물 그대로인 광야입니다.
그 때에 혹 그 광야에 무슨 아파트를 짓고 막 그런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실현되고 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돌베개를 베고 누워 있으면서 그 꿈을 꾼다고 하는 것은 인간 보기에는 실현되기 불가능한 꿈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영몽입니다. 이 꿈은 철학적 사색이나 일반적 종교적 그런 호화로운 꿈은 아니지요. 비록 야곱이 형을 피해서 삼촌 집으로 도망을 가는 처지이지만 이 야곱 속에는 ‘내가 죽어도 내가 가진 이 꿈은 나의 전 민족에게 주신 꿈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이 땅의 주인이 된다’ 하는 그 꿈을 가지고 가는 거지요.
이래서 열두 아들 가슴 속에 그 꿈이 들어가지요. 후에 애굽으로 내려갔지만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그 꿈 이 하나만큼은 물려주고 살았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야곱의 그 꿈은 가다가 깨어지고 허황되고 허탈이 되는 그런 꿈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기독자들이 꾸는 꿈을 보면 너무나도 허황된 꿈이 많습니다. 실현되기 어려운 꿈을 꾸고 있다 그 말이요. 야곱은 아들들에게 어떤 꿈을 심어주었느냐? ‘학자가 되거라. 정치가가 되거라’ 하며 애굽에서 부귀 명예 영광에 덜덜 굴리는 그런 꿈을 심어주었습니까?
오늘날 우리 부모들은 믿는 자의 자식에게 그런 꿈을 가지라고 호소를 하지요? 이건 자식 잡아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날 부모들이 자식에게 심어주는 꿈을 보면 참 별 더러운 그런 꿈도 다 심어주더라 그 말이요. 세상사람들이 그런 헛된 꿈을 많이 꾸지요?
우리 믿는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이 꿈을 넣어주어야 되겠는데 자식들이 무슨 특기가 있다고 하면 그 특기의 학교에 보내가지고 교회도 등한시하게 만들지요. 그 자식이 그렇게 자라서는 이제 이단자들하고 결혼이나 하고. 오늘날 부모들이 자식에게 가나안 땅의 주인공이 되는 꿈이 아닌 애굽에서 왕이 되는 인조 꿈을 심어주고 있지나 않은지?
여러분들, 어른들은 어른들로서 가진 꿈이 무엇이며, 또 현재적으로 자녀들이 가지고 있는 꿈이 무엇이냐?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부모와 자녀가 같아야지. 그렇지 않겠어요?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의 주인공이 되는 이 원대한 꿈. 저는 우리 자녀들로부터 그런 꿈이 사라질까 싶어 아주 두려워요. 덜덜 떨려요.
벧엘은 정말 어려운 고통 속에 있는 그 환경 아니요? 그 광야에 집이 있어서 의지합니까? 집도 절도 아무 것도 없잖아요. 낮에는 뙤약볕이고 밤에는 추위, 그리고 비가 오면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이런 벧엘 광야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믿는 부모가 그 꿈을 갖지 못했다면 자식에게 그 꿈을 물려줄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이요.
야곱이 하나님의 자연물 그대로를 베고 조상으로부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조의 꿈을 꾸고 그 꿈을 버리지 않고 그 밤에 그 꿈을 가지고 일어나서 간다고 하는 이게 얼마나 기특한 겁니까? 참 기특한 거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찌 같이 안 할 수가 있어요? 인간의 생각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꿈인데 어려운 사건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그 꿈을 갖고 간다는 거.
그런데 부모 자기는 다른 꿈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녀들이 세상을 갖게 하기 위해서 예수 잘 믿으라고 한다면 그건 신조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잘 믿으라고 하는 건 아니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은 ‘너는 가나안 땅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 가나안 땅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 그런데 비록 애굽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부모가 자녀들에게 가나안 땅에서 주인공이 되는 이 꿈을 심어주었느냐? 못 심어주었으면 못 심어준 것만큼 그 고통의 양의 질도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신앙 면에서 보면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적 자녀들에게 영몽의 꿈을 심어주고 있느냐, 아니면 세상 꿈을 심어주고 있느냐? 야곱이 열두 아들들에게 아비가 되는 것처럼 오늘날 교회의 성도는 목회자 입장에서 볼 때에 모두는 영적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목회자 입장에서, 하나님의 종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영적 자녀들에게 어떤 꿈을 심어주고 있느냐?
교회에서 영적인 꿈을 심어줄 때에 교인이 그 꿈을 붙들고 따라가느냐? 교역자의 무슨 재간을 보고 따라가지 말고 가르치는 사람이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느냐? 그 꿈의 귀중성과 가치성을 바로 알고 그것을 보고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듣고 배우는 말이 좀 서툴더라도 가나안 땅의 그 꿈을 철저히 가져야 됩니다. 가나안 땅의 주인공이 되는 그 꿈이 아니면 그거는 벌써 개꿈입니다. 벌써 틀린 꿈이요.
야곱은 열두 아들에게 그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그 꿈이 불가능한 것이냐? 아니지요. 실현이 됐습니다. 또한 그 꿈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을까 싶어서 요셉을 들어서 또 실천교훈으로 보여주기도 했지요. 노예생활에서의 요셉의 꿈, 감옥 속에서 요셉의 그 꿈. 그 꿈이 실현됐지요. 요셉에게 맛을 보여준 거란 말이요. 그러니까 자기가 세상살이를 하는데 있어서 꿈이 좋던 나쁘던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면 그 꿈을 가져라.
내가 가진 꿈이 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고상한 꿈으로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아니면 버리고, 인간 나 보기에는 실현 불가능한 꿈같이 보여도, 허황된 꿈같이 보여도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라면 나는 가져야 한다. 그 꿈을 갖고 살아라.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기 때문에 그 꿈을 버리지 않았어요. 인간으로서는 상상을 못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꿈을 실현시켰지요.
애굽사람들은 요셉에게 역사적으로 된 일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알지요.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게 된 동기가 말하자면 하나님의 주권적 입장에서 볼 때에 요셉의 꿈 실현 때문에 살고 있는 겁니다. 참 이거 멋있잖아요? 요셉도 개인적으로도 보면 그렇고. 꿈 실현 때문에 애굽에서 살고 있다. 멋있지요? 우리에게 모형계시로 보여주는 거 아니요?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살고 있지요? 왜 이렇게 주글주글 앉아있지요? 꿈 실현을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세상 쪽으로 뭔가가 잘 되기를 바라고 그 면에 대한 축복을 받기 위해서 사는 거요?
당시 이스라엘은 영토도 나라도 주권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가나안 땅의 주인공이 된다고 하는 거는 참 막연하지요. 그럼에도 요셉은 그 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또 모세도 그 꿈을 생생하게 가지고 있었지요. 모세에게 오는 여러 가지 유혹과 미혹 탄압적인 그런 것들이 와가지고 모세로 하여금 가나안 땅의 주인공이 되는 그 꿈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하지만 그게 그렇게 되지를 아니했지요?
갈대아 하류 갈대밭에서 모세는 사선을 넘고 공주의 손에 들어가서 자랄 때에 자라남의 그 환경이 누림의 환경이었지만 유모 같은 실모인 어머니 요게벳의 품속에서 모세는 이 실모로부터 그 꿈을 전해 받은 겁니다. 모세에게 심어준 그 꿈을 어느 유명한 박사가 심어주었습니까? 모세의 어머니는 사범대학이나 교육대학이나 신학대학이나 박사학위 가진 것 아무 것도 없지요?
여러분들, 참 여기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무슨 대학 무슨 대학 무슨 대학 학위 많이 따지지요? 이 신조의 꿈은 그런 걸로 심어지지를 않아요. 신조의 꿈은 그걸로 전달이 되는 게 아니에요.
모세의 어머니는 평범한 애굽의 노예요 아주 고달픈 노예입니다. 그렇지요? 그 때 당시로 보면 나약한 여자였지만 이 여인이 이스라엘 전 민족이 버린 꿈을 가지고 있었다. 조상들이 물려주고 받은 그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는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을 찾아가서 목회학을 배우는 것이 참 중요할 줄 압니다. 그 정신 그 사상을.
그리고 어머니가 모세에게 그 꿈을 가지라고 무슨 정서적 교육이나 무슨 웅변술 등을 가르쳤을까요? 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꿈, 신몽이요 영몽의 그 꿈을 가지고 모세에게 교육을 하는 거지요.
모세는 이것을 어머니에게 철저히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세가 타락이 된다면 그 꿈은 버린 셈이 되는 거고, 그렇게 된다면 애굽에서 통치자가 돼서 애굽을 통치하는 것이 낫지요.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이 주신 꿈을 버린 사람이 애굽에서 통치도 못하고, 꿈 실현의 그 꿈도 안 갖고 있고 할 바에야 무슨 맛으로 삽니까? 그렇지 않아요?
예수 믿을 바에야 철저한 꿈을 가지고 그 꿈 실현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 그러지도 않고, 세상을 향한 꿈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 뭐요?
모세에게는 유모 같은 실모가 넣어준 신조 꿈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꿈을 버려야 좋고, 어느 꿈을 꾸어야 이게 옳은 건지? 오늘날 많은 신학교와 많은 교회가 어떤 꿈을 꾸게 하고 충만히 주고 있는지? 우리는 심사를 해봐야 될 줄 압니다.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신앙적으로 더듬어 올라가면 믿음의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그 신앙의 사상과 그 정신을 가지고 고통과 어려운 사건 속에서도 그 꿈을 가지고 살았던 것을 알 수가 있고, 그 꿈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이 되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전달되고 있는 것을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께서 주신 이 꿈은 세상이 주는 꿈이 아니고, 세상에서 실현된 것 같으나 없어지는 꿈이 아닌 줄 압니다. 아버지 하나님, 신조의 그 꿈은 가나안 땅 같은 신령계 그 천국의 꿈이니 분명히 실현될 줄 믿습니다.
아버지여, 그 꿈이 그날에 가서 실현되기까지 저희들은 이 세상에서 영적인 면에 큰 능력성을 잘 길러가고 만들어가고 성장해 갈 수 있는, 그 신조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주인공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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