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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골2: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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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1년 10월 9일 설교 <60주년 기념 설교> “몸이여, 나의 몸이여!”(2)
“몸이 필요하신 주님”(Our Lord Needs Bodies)
--골로새서 2:6-12
1.
오늘 우리는 와싱톤한인교회 설립 60주년을 맞습니다. 먼저, 교회의 발자취를 영상으로 보시겠습니다. (60주년 영상)
지난 역사 60년을 돌아보면 후반부 30년의 역사가 고 양승길 장로님의 표현대로 ‘순풍에 돛단 배’와 같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 교회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교우들이 서로 마음을 모아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서두르지 않고, 한 번에 한 걸음씩, 흐트러짐 없이 걸어왔습니다. 그 결과, 우리 교회는 버지니아 연회 안에 있는 1,200여 교회 가운데 가장 모범적인 교회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중에 한인교회가 일곱 교회 밖에 없습니다. 절대 다수가 백인 교회인 우리 연회에서 한인교회가 모델로 꼽히고 있다는 사실은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또한, 미국에 있는 300여 한인연합감리교회들에게는 큰 형님 같은 교회로 존경받고 있고, 교단을 넘어 많은 교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자화자찬 하는 것 같아서 민망스럽기는 하지만,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며, 또한 교우님들의 기도와 사랑과 헌신 때문이고, 또 그 동안 우리 교회를 섬겼고 또한 섬기고 있는 교역자들의 신실함 때문이었다고 믿습니다. 모든 영광과 찬양을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저는 몇 주일 전에 시카고 지방 연합감리교회 연합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여러 목사님들을 만나 우리 교회에 대한 그분들의 바램과 기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와싱톤한인교회가 다른 교회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교회가 되어 달라는 기대감을 제게 전해주었습니다. 와싱톤한인교회가 걸으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른 길을 걸어 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같은 높은 기대감을 마음으로 느끼면서 큰 자부심과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그 느낌을 그대로 교우들에게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모든 면에서 잘 하고 있다고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교회,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소문 좋은 교회라도 막상 들여다보면 문제가 있고 부족한 점이 있는 법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선할 점도 많고 보완할 점도 많지만, 교회다운 교회가 되려는 마음의 중심이 분명하고, 바른 길을 가려는 의지가 견고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기대감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명감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2.
우리는 교회 설립 60주년을 맞아 “몸이여, 나의 몸이여!”라는 제목으로 교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비유의 의미를 하나씩 생각해 보면서, 더욱 교회다워지는 길을 찾고 있습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라는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 사건에 대해 생각이 미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여기서 말하는 ‘그 말씀’은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성부 하나님과 함께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분은 영이시기 때문에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2 천 년 전에 나사렛 청년 예수의 몸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몸을 입고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차원에 계시던 분이 인간의 차원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4절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성자 하나님이 몸을 입고 오심으로 인해 사람들은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고 또한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누구나 보았던 것은 아닙니다. ‘볼 눈’이 있는 사람만 보았고, ‘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 들었습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을 마음으로 어림잡아 추측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음을 알지만, 믿는 사람들은 그래도 뭔가 손에 잡히는 것이 있고 눈에 보이는 것이 있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빌립이 이 같은 마음을 잘 대변해 주었습니다. 빌립이 한 번은 예수님께 이렇게 요청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요 14:8)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요 14:9-10)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몸으로 보여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분에게 일어난 일들, 그분이 행한 일들, 그분의 인격과 삶을 제대로 보는 사람들은 그분이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말씀’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나 귀에 들리는 것에 붙들리면 우상 숭배에 빠지지만,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을 통해 그 너머에 있는 영적 존재를 만난다면, 하나님 나라와 소통하는 길이 열립니다. 우리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이 몸으로 나타나신 사건, 바로 그것이 성탄절의 사건이요,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3.
육신을 입고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다시금 영이 되셨습니다.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다.”는 말은 잠시 몸으로 나타나셨던 그분이 다시 원래의 상태, 영의 상태, 신의 상태로 돌아가셨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성육신의 사건은 2 천 년 전에 한 번 일어나는 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다시금 영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여전히 성육신의 사건을 지속하고 계십니다. 바로 교회를 통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묵상한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엡 1:23)
이 구절을 J. B. Philips는 이렇게 번역했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그분의 몸입니다. 그 몸 안에 온 우주를 채우시는 분, 그리스도께서 가득 거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 지금도 성육신의 사건을 지속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영이신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하여 당신을 몸으로 드러내십니다. 성탄절은 2 천 년 전에 한 번 일어나고 만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교회를 통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 하나가 세워질 때, 성육신의 사건이 또 한 번 일어나는 것입니다. 2 천 년 전, 갈릴리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면,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주님께서는 이 땅의 교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몸이여, 나의 몸이여! 너희가 나를 이 세상에 보여 주거라. 세상은 나를 보고 싶어 한다. 나를 보아야 믿지 않겠느냐? 나를 보여줄 사람이 누구냐? 바로 너희다. 교회다. 몸이여, 나의 몸이여! 나를 세상에 보여 주어라!”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고 교회로 모이는 그리스도인 각자는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어야 할 고귀한 소명과 책임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교회로 함께 모일 때, 몸으로 연합된 교회는 그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이 흩어져 각각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갈 때, 각자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그리고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 매일 일어나게 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 부름을 잘 받들고 있습니까? 우리 각자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줄 만합니까? 우리 교회가 행하는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이 세상에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에게 이 같은 고귀한 소명이 주어졌다는 것조차 모르고 사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통해 그리고 우리 교회를 통해 당신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셨습니까?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범퍼 스티커 문구가 있습니다. “We are not perfect, just forgiven.” “우리는 용서받은 사람일 뿐,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얼른 보면 맞는 말처럼 들립니다. 교회로 모인 사람들이 대단한 것 같지만, 여전히 죄와 유혹에 흔들리는 연약한 죄인들이 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니, 교회 바깥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한 교회가 갈라져서 경찰이 출동하여 지키는 가운데 한 무리는 1층에서 예배드리고 한 무리는 아래층에서 예배드립니다. 예배 후에는 두 편이 서로 대립하여 험악한 말로 싸움을 시작합니다. 이 같이 기가 막힌 일도 벌어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용서받은 사람들일 뿐이야.”(We are just forgiven.)라는 말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문구는 기독교의 복음을 아주 교묘하게 왜곡합니다. 우리는 단지 용서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용서받고 새로 지음 받은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예수 믿고 죄 사함 받고 천국 입장권을 얻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보혈로써 죄 사함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 지음을 받아 전에 보지 못했던 하나님 나라를 보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전하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그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을 굳게 하여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6-7절)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와 권세의 머리이십니다. (9-10절)
여러분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12절)
이 말씀에서 보듯,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변화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는 차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소개한 범퍼 스티커는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합니다. “We are not just forgiven, but transformed.” “우리는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새로 지어졌습니다.” 혹은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We are not perfect, but in the process of being perfect.” “우리는 완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완전하게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교회로 모인 사람들이 단순히 죄 용서 받은 것에 만족한다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교회로 모이는 것을 '목욕탕'에 가는 것으로 오해할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죄 짓고, 주일에 교회로 모여 죄를 씻으면, 죽어서 천국 가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로 모이는 것은 우리 몸에 묻은 죄의 오물을 씻어내려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죄를 씻어낼 뿐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고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로 모이는 이력이 늘어날수록 그 사람의 삶은 진리와 의와 사랑에 있어서 진보해야 마땅합니다.
4.
개인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여줄 수 있을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믿습니다.
어느 교회에 큰 가게를 두 개나 운영하는, 아주 성공한 교인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 부부가 다른 교인 부부와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두 아이 대학 교육을 돈 한 푼 안 내고 시켰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 집 아이는 둘 다 아주 값비싼 명문 사립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었어요? 장학금을 많이 받았나 보죠?” 그러자 그 부인이 대답합니다. “아니에요. 왜, 우리 교회에 회계사를 하시는 장로님이 계시잖아요? 그분이 수입을 얼마 얼마로 맞춰 오라고, 그러면 학비를 하나도 내지 않게 해 주겠다고 하더군요. 그 장로님 말씀대로 했더니 한 푼도 내지 않게 되었어요. 그 장로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하나님께 감사하구요.”
어느 교회 이야기냐고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어느 교회에서나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장로님이나 이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나눈 분이나, ‘용서받은 죄인’일지는 모르나, ‘새로 지음 받은 사람’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성령으로 새로 지음을 받았다면, 최소한 그런 일에 대한 부끄러움은 느끼고 있어야 하며, 속사람이 더 자라면 그런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의식 수준과 행동 방식에서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정도의 책임조차 지지 않으려 합니다. 이리 저리 요령을 부려서 부당한 이득을 얻고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이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의 수준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세상은 묻습니다. “당신들이 믿는 주님이 그런 분입니까?”
이와는 정 반대 되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몸으로 드러내 보여 준 사건입니다. LA에 있는 프레스노 카운티(Fresno County)의 교육감 래리 포웰(Larry Powell)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2015년까지 교육감으로 일하기로 계약을 맺었고, 연봉은 29만 달러로 책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업무를 시작한 이후로 그는 카운티의 교육 시설과 상태 그리고 정부의 예산을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LA 주정부가 빚으로 인해 교육 예산을 대폭 삭감했는데, 그 예산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겠다 싶었습니다. 포웰 교육감은 아내와 함께 이 문제를 두고 고민을 하다가 결국 하나의 해법을 찾았습니다. 그는 자원 은퇴를 하고, 그 다음날로 은퇴자로서 교육감 직에 다시 계약을 합니다. 은퇴자에 맞게 연봉을 3만 1천 달러로 정했습니다. 원래 책정된 연봉의 10분의 1로 줄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그가 교육감을 그만두는 2015년까지 그의 연봉에서만 80만 달러를 절약하게 된다는 계산입니다. 포웰 교육감은 이 돈으로 교사를 더 많이 채용하고 교육 시설을 개선하는 데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고 이 사람에 대해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 같은 행동의 배후에는 무엇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안수 받은 침례교 목사였습니다. 그가 왜 목회를 안 하고 교육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선택은 그가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돈을 더 많이 쌓아 둘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There's no reason for me to keep stockpiling money.")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아내와 나의 목표는 물건을 쌓아 두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되돌려 주기를 원합니다.”(“Our goal has never been to have things. We want to give back.")
포웰은 80만 달러가 없어도 넉넉하게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아내가 든든한 직장에 다니고 있고, 이미 준비해 둔 연금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웰의 선택을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쌓아둔 것이 많을수록 더 불안한 것이 하나님 없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포웰과 그의 아내도 마음을 돌려 먹으면 돈 쓸 곳은 한 없이 많았을 것이며 돈을 모아야 할 이유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이 같은 선택을 통하여 그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준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믿는 분이 ‘진리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진리의 삶’을 통해 보여 주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가 믿는 분이 ‘정의의 주님’인 것을 ‘정의로운 행동’을 통해 보여 주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이 ‘사랑의 주님’인 것을 ‘사랑의 행동’을 통해 보여 주기를 기대합니다. 진리의 주님, 정의의 주님, 사랑의 주님은 우리 각자를 통해 당신이 진정으로 진리와 정의와 사랑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시기 원하십니다. 세상의 이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 줄 사람, 주님의 이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드릴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5.
이 같은 변화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로 모여 의논하고 결정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모임에서도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을 하고, 그 어느 모임에서도 볼 수 없는 일을 해 낼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 같은 높은 소명 의식과 책임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교회로 모여 어떤 일을 두고 의논할 때마다 사람의 생각이나 세상적인 사고방식이 지배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묻고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마음을 합할 때, 교회는 이 세상이 놀랄만한 선택과 결정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몸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는 말로 선전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몸으로 보여주는 일에 실패할 때가 더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요즈음 우리 교회는 교회의 미래 방향을 두고 의견을 나누고 있습니다. 어제 첫 번의 공청회가 있었고, 오는 화요일 저녁에 또 한 번의 공청회가 있을 것입니다. 센터빌 캠퍼스에서는 다음 주일 예배 후에 공청회를 할 것입니다. 맥클린 캠퍼스가 더 이상 그대로 둘 수 없을 정도로 비좁아졌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센터빌 캠퍼스를 시작한 지 4년을 넘었으니, 이제는 뭔가 확실한 방향을 정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지난 4개월 동안 교회개척위원회로 모여 여러 가지 대안을 두고 의논한 다음, 교우들에게 의견을 여쭙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의 기준을 두고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편리할까? 내 자녀들에게 가장 유익한 결정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는 것이 재정 부담을 가장 가볍게 할까? 시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는 것이 교회가 더 커지는 데 도움이 될까? 교회가 하나 됨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 좋은 질문이요, 또 해야만 하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몸으로 보여줄 만 한 선택은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이 “와 교회답다! 교회니까
저럴 수 있다.”라고 할 만 한 선택은 무엇인가?
교회개척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두고 의논할 때, 담임목사로서 저는 제 개인적인 생각과 바램을 모두 내려놓고 교우들이 정하는 결정에 따르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교회개척위원회에서 제안한 것처럼 센터빌 캠퍼스와 맥클린 캠퍼스를 모두 끌어안고 가자하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혹은 센터빌 캠퍼스를 독립시키고 더 많은 교인들을 내어 보내어 60주년을 기념하는 건강한 교회로 세우자 하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혹은 제가 맥클린 캠퍼스에서 손을 떼고 센터빌로 나가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여기시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자신의 기득권 즉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는 주님의 뜻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다 싶은 기득권은 다 놓았습니다.
이 일을 두고 제가 가지는 간절한 바람은 주님께서 보시기에 “너는 내 몸 다운 선택을 했다!”는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교회가 한 선택을 보고 “와, 교회답다!”라고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교우들 모두가 “주님께서 하신다면 이렇게 할 것입니다.”라고 한 마음으로 껴안을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교회개척위원회로 모여 의논하면서 알았습니다. 25명의 대표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그렇게 쉽지 않았는데, 1500명의 교인들이 마음을 모으는 데에는 얼마나 더 어려움이 많겠습니까?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나에게 좋은 것’을 찾기를 멈추고, 주님께서 원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두고 기도하고 찾는다면, 교우들이 모두 기뻐하고 축복할 수 있는 일을 이룰 것을 말입니다. 우리 교회가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포기함으로써 흔히 보기 어려운 결정을 이룬다면, 우리는 이 하나의 선택으로써 우리가 믿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몸으로 보여주게 됩니다. 성육신의 사건이 또 한 번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같은 거룩한 역사를 위해서라면 무슨 기득권인들 버리지 못하겠습니까?
6.
오늘 우리는 60년 역사의 방점을 찍고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이처럼 중요한 전환점에서 우리는 “세상에 나를 보여주라.”는 주님의 명령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교회로 모일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행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 보여 주어야 합니다. 또한 흩어져 세상으로 나아갈 때, 내가 곧 교회임을 기억하고,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 내가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분신입니다.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주님께서는 그렇게 기대하고 계시며, 세상도 그렇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명예롭고 거룩한 기대감을 두고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 나는 그렇게 못하겠습니다. 나는 기독교인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소명이 부담스러운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 소명을 따라 살라면 희생할 것, 손해 볼 것, 포기할 것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엄두가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다. 그것은 우리 힘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의 지식으로, 혹은 우리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가득 거하시며 교회를 통해 일하기를 원하시는 주님께 우리의 주권을 내어 드리고 그분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자리를 만들면, 그분이 하십니다. 또한 이 소명을 위해 희생하고 손해보고 포기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60년의 역사를 맞는 우리 와싱톤한인교회가, 그리고 그 거룩한 역사에 접목된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은총을 힘입어, 교회로 모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흩어져 또한 교회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 설립 60년을 맞아 묵상하는 중에 적은 글을 기도로써 대신합니다.
몸이여, 나의 몸이여!
네가 나의 몸으로 산 지 60년,
한 때는 연약했으며,
질병에 신음하던 때도 있었고.
몸이 찢어지는 아픔도 있었다.
그로 인해 내가 아픈 눈물을 흘릴 때가 있었다.
하지만 너는 나의 몸으로
새 생명을 낳기 위한 해산의 수고를 쉬지 않았으며,
내가 가려는 곳에 발길을 내딛었고
내가 닿으려는 곳에 손길을 뻗었다.
너로 인해 기뻐했던 때가
너로 인해 슬퍼했던 때보다 많았다.
몸이여, 나의 몸이여!
인간의 몸에게 60년은 노년의 시기이지만,
나의 몸에게 60년은 아직 유년.
그 햇수를 자랑하지 말라.
나의 몸이 노화되게 하지 말라.
아직도 돌아보아야 할 일이 많고,
찾아야 할 영혼이 많으며,
가 닿아야 할 곳이 많다.
나의 몸이라는 허울을 쓰고는
나의 뜻과 상관없이 사는 몸이 얼마나 많으냐?
그러니 너는 깨어 있으라.
더욱 나의 몸이 되어라.
더욱 나의 몸으로 살아라.
몸이여, 나의 몸이여!
나의 기쁨이여, 나의 사랑이여!
너로 인해 내가 기쁘다.
너로 인한 나의 기쁨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
나의 사랑, 나의 분신이여,
너희를 향한 나의 기도는
이것뿐이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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