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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에 기대어 살다(Leaning On His Mercy)

누가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516 추천 수 0 2013.04.29 23:16:37
.........
성경본문 : 눅1:46-56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1년 12월 11일 주일설교 <강림절 세 번째 주일>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자비에 기대어 살다(Leaning On His Mercy)
 누가복음(Luke) 1:46-56

1.

요즈음, 운전하고 다니다 보니, 가정집이나 교회 마당에 설치되어 있는Nativity Scene을 자주 봅니다. 성탄일에 일어난 사건들을 그림으로 혹은 구조물이나 인형으로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Living Nativity Scene이라고 하여, 교인들이 직접 성탄절 사건을 재현하여 보여주는 교회도 있습니다.
Nativity Scene은 대개 목가적(pastoral)이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마구간에 앉아있는 마리아의 모습도 그렇고, 말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그윽한 눈빛으로 그들을 지켜보는 요셉, 그리고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아는듯 경건하게 고개 숙인 암소까지, 보는 이들의 마음에 평화와 안식과 기쁨을 전해 줍니다. 아기 예수 앞에 절하고 있는 목동들의 모습이며, 예수님께 귀한 선물을 바치고 있는 동방박사들의 모습이, 마치 하늘나라가 잠시 땅 위에 임한 듯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Nativity Scene에서 느끼는 감정은 실제 현실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성탄절에 일어난 사건들은 그렇게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은 고결하며 신분이 귀하고 경건하며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를 예로 생각해 보십시다. 실제 마리아는Nativity Scene에서 보듯 그렇게 아름답고 고운 여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성탄절에 일어난 사건들을 고려해 본다면, 하나님은 특별히 아름답고 고운 여인을 고르시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일 교회 전설이 전하듯, 요셉이 혼기를 놓친 노총각이었다면, 마리아는 결혼 적령기에 있는 총각들에게 별 매력이 없는 여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정혼'은 우리 식으로 하면 '약혼'과 비슷합니다만, 내용은 약간 다릅니다. 정혼을 하면, 신랑과 신부는 남편과 아내로서의 모든 권리와 의무와 책임을 지게 됩니다. 다만, 약 1년 동안 각자의 집에서 살면서 결혼 준비를 합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유대교 전통이 요구하는 대로 경건하게 정혼 기간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기치 않은 소식을 듣습니다. 자신이 임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들은 겁니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우선,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은 처녀가 임신을 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34절)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37절)고 대답합니다. 거역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마리아는 일단 그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이 때 마리아가 한 대답은 한 편으로는 감동적이고 또 한 편으로는 마음을 짠하게 만듭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38절)

이 대답이 감동적이면서도 마음 아픈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마리아에게 들려진 소식은 그 개인에게는 운명을 바꿔놓을만큼 큰일입니다. 우리 속담에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리아에게도 할 말은 있었지만, 통할 리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난감했겠습니까? 요셉에게는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하나? 이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어떻게 생각할까? 영문도 모르는 부모와 친척들은 나로 인해 얼마나 수치스러워할까? 율법학자들에게 알려지면 율법의 규정대로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 숱한 위험을 뚫고 이 아기를 낳으란 말인가? 낳은 후에는 또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우란 말인가? 이와 같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한 순간에 마리아에 마음에 쏟아졌을 텐데, 마리아는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그러니 이 대답은 감동스럽지만 또한 마음을 짠하게 만듭니다.  

천사의 방문이 끝난 후, 마리아는 마음을 수습할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앞으로 마주할 상황들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엘리사벳 아주머니에게도 아기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 아주머니는 사가랴 제사장의 아내로서 아주 경건한 사람이었고, 마리아와 가까운 친척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 산골의 외딴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그 대목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 무렵에, 마리아는 일어나, 서둘러 유대 산골에 있는 한 동네로 가서,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다. (1:39-40)  

마리아가 '서둘러 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임신의 소식 그리고 그로 인해 예상되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앞에 두고, 마리아는 영적으로 도움을 줄만한 사람을 찾아간 것입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멘토(mentor)를 찾은 것이지요. 56절에 보니,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3개월 정도를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 충격을 소화하고 받아들이는 데 그만한 시간이 필요했다는 뜻입니다.


2.

그렇게, 영적 멘토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면서 마리아는 앞으로 닥칠 모든 일을 믿음으로 감당할 마음의 준비를 합니다. 교회력에 따른 성서 일과(Lectionary)에 맞추어 읽은 오늘의 말씀은 그 같은 마리아의 마음을 잘 담아냈습니다. 라틴어의 첫자를 따서 '마그니피캇'(Magnificat)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이 노래는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행하신 일을 찬송합니다. 마리아는 이제 두려움, 놀라움, 당혹스러움을 떨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노래에서 특별히 두드러지는 주제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보통 '사랑'은 기독교적 용어이고, '자비'는 불교적 용어인 것처럼 오해합니다. 불자들은 그들이 믿는 붓다를 가리켜 '대자대비하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불자들은 '자비행'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교문화권에서 자란 우리들은 '자비'라는 말을 들으면 불상의 얼굴에서 보는 후덕한 미소를 상상합니다. 넉넉한 사람이 후덕한 인심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자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비'는 '사랑'과 함께 대표적인 기독교적 용어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야말로 '대자대비하신 분'입니다. '사랑'과 '자비'는 동의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굳이 차이를 말하자면, 사랑이 있기에 자비를 행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자들이 생각하는 자비와 성경의 자비 사이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의 자비에는 '아픔'이 핵심입니다. 후덕한 인심으로 적선해 주는 것이 아니라, 불행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고 마음이 깨지는 아픔을 겪는 것이 먼저이며 중심입니다.

구약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에서 '자비'를 뜻하는 말 '라하밈'(rachamim)은 '자궁'(womb)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자비란 어머니가 자식에게 대해 가지는 마음과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의 언어인 헬라어에서 '자비'를 뜻하는 단어 '엘레오스'(eleos)는 어려움에 빠진 사람에게 대한 긍휼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긍휼'(compassion)을 뜻하는 또 다른 헬라어는 '내장'을 가리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고 창자가 꼬이는 듯 한 아픔을 느끼는 것이 긍휼이고 자비입니다. 영어의 '컴패션'(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함께'(com)라는 말과 '아파하다'(passio)라는 말이 합해져서 만들어졌습니다. 한자의 '자비'(慈悲)에는 마음 심(心) 자가 두 개나 들어 있고, '비'는 '슬픔'을 뜻합니다. 영어와 한자가 모두 성서 언어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보듯, 자비의 핵심은 아파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자비 혹은 긍휼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말로 '동정'(同情, sympathy)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자로 '느낄 정'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동정은 아파할 정도는 아니고, 느끼는 정도입니다. 영어 sympathy도 역시 '곁에서 느낀다'는 뜻입니다. 반면, 자비 혹은 긍휼은 느끼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아파하는 정도까지 가는 것입니다. 곁에 서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부둥켜안고 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마음이 깨어지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힘겨운 일입니다. 불편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혹은 값싼 동정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불행을 보시고 마음이 깨어지는 아픔을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야말로 대자대비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3개월 동안 엘리사벳과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리켜 오늘날에는 '영적 지도'(spiritual direction)라고 부릅니다. 마리아는 참으로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 위급한 순간에 자신을 영적으로 인도해 줄 멘토를 찾은 것도 그렇고, 외딴 곳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면서 준비를 한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영적 위기 혹은 인생의 위기에서 이렇게 찾아갈 영적 멘토가 있어야 합니다. 멘토를 두는 것 그리고 멘토를 찾아 도움을 구하는 것은 겸손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의 영적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분의 처사가 잔인해 보였지만, 점차로 그 모든 것이 그분의 자비로 인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이렇게 하나님의 자비를 찬양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미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나에게
큰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46-50절)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을 향한 그분의 아픔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죄와 죽음 가운데 빠져 사는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마치 창자가 뒤틀리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그 아픔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망각하고 물질의 노예로 살아가는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마치 태중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태어날 한 아기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기를 받아 안아 키울 사람으로 마리아를 택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 여성들은 임신을 하면 '혹시나 내 안에 있는 아이가 메시야가 아닐까?'라는 꿈을 꾸어 볼 정도로 메시야에 대한 바램이 간절했습니다. 마리아는 비정상적인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당할 일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자 자신이 얼마나 큰 영예를 입었는지를 깨닫습니다. 그 같은 영예를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도, 이유도 마리아에겐 없었습니다. 다만, 이유가 있다면 그가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는, 외면당한 여인이라는 점 뿐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내 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은 마리아에 대한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것 외에는 자신이 뽑힐 아무런 이유가 없어 보였습니다. 
 

3.

하나님의 마음은 마치 깨어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항상 깨어지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피십니다. 어두운 곳, 냄새나는 곳, 허름한 곳, 누추한 곳에 더 깊은 관심을 두십니다. 가난한 사람, 병 든 사람, 세상에서 밀린 사람, 실패한 사람,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두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이렇게 편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같은 편애로 인해 그분의 마음은 늘 깨어집니다. 하지만 그분은 고집불통이십니다.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 깨끗한 곳보다는 누추한 곳에 먼저 찾아가십니다.

우리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에게는 잘 난 사람, 아름다운 사람, 멋진 사람, 잘 사는 사람, 유명한 사람들을 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로 오염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오늘 저녁에 어느 식당에 갔는데 오바마 대통령이 그 식당에 왔다고 합시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식사를 했다는 사실에 괜스레 마음이 설레일 것입니다. 그리고는 '혹시나 사진을 같이 찍을 수 없을까?' 생각하며 기회를 찾을 것입니다. 만일 함께 사진을 찍는 영예를 얻으면, 그 사진을 가보처럼 보관하여 자손들에게 물려주려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따져 보십시다. 내가 왜 오바마 대통령이 내민 손을 잡고 황송해 해야 합니까?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이 왜 가보가 될 가치가 있습니까? 왜 사람들은 그 사진을 보면서 "와!"하고 소리를 지릅니까? 왜 오바마 대통령과 악수한 손을 씻을까 말까 망설입니까? 단지 그 사람이 유명하다는 것,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 이유는 그 하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결국 우리는 오바마 때문에 흥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유명세 때문에 흥분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유명세에 열광한다는 것은 내게 그것에 대한 욕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지 못하니, 그렇게 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그렇게 된 것처럼 잠시 착각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에게는 우리만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낮은 곳으로 가기를 싫어합니다. 겉으로 볼 때 대단한 것이 없어 보이면, 무시하거나 등을 돌리려 합니다. 그늘지고 냄새나고 불편하고 추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외면하려 합니다. 가난한 사람, 병 든 사람, 실패한 사람, 뒤쳐진 사람들과 상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그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당할까 염려합니다. 그들과 어울려 보았자 손해 볼 것 밖에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낮고 어두운 곳을 찾기를 즐기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가난하고 외면당하고 냄새나고 병든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비'에서 나오지 않고 '동정'에서 나오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도와주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을 통해 아주 묘한 심적 위로와 보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동기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은 나보다 나은 사람들에게 줄을 대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도우면서 '나는 이만큼 좋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나보다 나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나는
이 정도는 되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알고 보면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몇 년 동안 성탄일 예배에 평화나눔공동체에 소속된 노숙자들을 초청하여 예배를 드리고 선물을 전달하고 점심을 대접했습니다. 그 때마다 평화나눔공동체의 요청에 따라 노숙자들이 예배 시간에 앞에 나와 찬송을 불렀습니다. 저는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작은 선물과 점심 한 끼를 제공하면서 마치 '우리가 이만큼 좋은 일을 하고 있소.' 하고 선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얼마 전, 그 사역을 맡은 분과 의논하여 올 해부터는 그분들을 예배에 초청하고 선물을 전달하고 점심 대접하는 것은 계속하되, 앞에 세워 찬송을 부르게 하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그분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 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우리 자신의 정직성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 마음을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들로 인해 마음에 아픔을 느끼고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자비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되게 하려면 늘 그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첫 번째 성탄절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편애로 인해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편애'라는 말에 놀라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실은,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공평하신 분입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비뚤어져 있기에 그분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보통 불이익을 받을 때 편애한다고 불평합니다. 그 행동으로 인해 이익을 얻으면 아무 소리 안 합니다. 높은 곳을 향하려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처사는 편애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보는 방향과 반대 방향을 보실 때가 많고, 우리가 회피하려는 사람들을 더 가까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성탄의 사건은 하나님의 자비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메시야를 보내어 새 역사를 시작하시면서 이스라엘에서 가장 이름 없는 고장인 나사렛을 선택했습니다. 그곳에 유명하고 잘 난 사람이 많았는데, 굳이 이름 없는 마리아와 요셉을 택하셨습니다. 호적 조사로 인해 그들이 밀려간 곳은 이스라엘 역사에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는 베들레헴이었고, 그곳에서도 사람이 거처하는 곳에 빈 방이 없어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처음 맞은 사람들은 목동들이었습니다. 당시의 목동들은 오늘날 미국으로 따지면 불법체류 노동자들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찾은 동방박사들은 오늘날의 Ph. D.와는 거리가 먼, 동방에 살던 점성가들이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4.

마리아는 자신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한 다음, 계속하여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51-53절)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고 그 자비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고대 성가를 들어 보면, '끼리에 엘레이손!'이라는 가사가 자주 나옵니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입니다. 저는 홀로 기도하고 묵상하는 시간에 이 한 문장을 그냥 흘러나오는 대로 곡조에 맞추어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한 참을 부르면서 주님의 자비를 구하다 보면, 하나님의 자비가 느껴지고,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더 이상 많은 말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향해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아픔을 느낄 정도로 관심하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고 그 자비에 기대어 살아갈 사람입니까? 오늘 노래에서 마리아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50절)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54-55절)

'두려워하다'라는 말은 '공포에 질리다' 혹은 '무서워 떨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고 그에 합당하게 처신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임재에 눈을 뜨는 순간에 가장 먼저 압도하는 감정이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자각하는 순간, 자신은 하나님 앞에 한낱 이슬에 지나지 않는 피조물이요 죄에 물든 존재인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하나님을 떠나 피해 숨게 만드는 감정이 아니라, 죄악을 털어버리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열망을 심어주는 감정입니다. 범접할 수 없는 분, 그러나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분, 그분이 하나님이며, 그 같은 느낌이 바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분의 마음이 그들을 향해 있습니다. 그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면 하나님의 마음은 함께 찢어지고 깨어집니다. 하나님은 멀리서 지켜보면서 필요할 때마다 구명대를 던져주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기쁨으로 인해 함께 기뻐하시고, 우리의 아픔으로 인해 함께 아파하십니다. 특별히,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그분의 자비심에는 비상이 걸립니다. 우리가 억울한 눈물을 흘릴 때, 그분의 마음은 찢어집니다. 창자가 뒤틀리는 고통을 겪으십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강한 손을 뻗어 억울한 일을 풀어 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마냥 좋아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발동할 때, 우리가 그 자비의 은혜를 입는 편이 아니라 그 자비의 화를 입는 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천한 사람의 눈물로 인해 하나님의 자비가 발동할 때 교만한 사람이 내침을 당하고,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를 호소할 때 부자의 손은 텅 비어질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억울하게 만들었다면, 혹은 누군가가 나로 인해 피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자비를 호소하고 있다면, 나는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두려워 떨어야 합니다. 나로 인해 눈물 흘리는 아내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발동하게 된다면 어쩌겠습니까? 나로 인해 억울해하는 직원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발동한다면 어쩌겠습니까? 나와 거래하는 사람이 나로 인해 밤잠을 못 이룰 때, 하나님의 자비가 발동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자비를 입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기대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끼리에 엘레이손!'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기도 제목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것임을 깨닫고 늘 그분 앞에서 자비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안다면, 그리고 그 자비를 구하며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역시 그 자비를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부탁하셨습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눅 6:36)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그 자비에 기대어 살기를 원하면서 우리는 무심하게, 냉담하게 혹은 값싼 동정에 만족하고 살아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인해 마음이 깨어졌듯이, 나도 내 곁에 있는 사람으로 인해 마음이 깨어지고, 그 아픔이 이끄는 대로 무엇인가를 행해야 하겠습니다. 혹시나 하나님의 자비가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발동하여 내가 그로 인해 화를 입는다면, 그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위로만 향하려는 우리의 마음의 방향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신 주님처럼 우리도 낮은 곳, 어두운 곳, 냄새나는 곳에 눈길을 두고, 그런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깨어지도록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강림절 세 번째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묵상하며, 자비를 생각하십시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십시다. 그리고 그분을 닮아 자비를 행하십시다. 우리가 자비를 행할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는 더욱 넘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자비는 그분을 믿고 두려워하는 이들을 통하여 이 세상으로 널리 그리고 깊이 흘러갈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또 다른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마 5:7)

이 말씀을 오늘의 묵상에 비추어 풀어 쓰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낮은 곳으로 향하는 사람,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찾는 사람,
그로 인해 마음이 깨어지는 사람,
그 아픔에 이끌려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람,
그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얼굴이 그들을 향하시며
그들에게 마음을 주시고
그들로 인해 기꺼이 아파하시며
필요할 때마다
그들에게 당신을 내어 주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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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7 요한계시 종말 예언의 권위 계22:6-21  강종수 목사  2013-05-05 2042
9006 여호수아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 말라 수1:9-18  한태완 목사  2013-05-05 5182
9005 출애굽기 참 믿음은 하나님의 객관을 자기 주관화 하는 것이다. 출1:1-17  김경형 목사  2013-05-03 1729
9004 히브리서 보이지 않는 능력 히11:1-3  조용기 목사  2013-05-02 2298
9003 창세기 탐심과 욕심의 비극 창3:1-6  조용기 목사  2013-05-02 2307
9002 빌립보서 마음 하늘 빌2:12-13  조용기 목사  2013-05-02 2034
9001 고린도전 부활절을 맞이하여 고전15:3-8  조용기 목사  2013-05-02 1953
9000 베드로전 신앙의 본을 보인 사람들 벧전2:21  한태완 목사  2013-05-02 2708
8999 에스겔 상대방은 나의 거울 겔18:1-20  최장환 목사  2013-05-01 3505
8998 다니엘 꿈과 희망을 갖자 단9:1-19  최장환 목사  2013-05-01 3444
8997 요한복음 하나님 나라 소망 요3:3-5  한태완 목사  2013-04-30 2367
8996 로마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미워하시는 것 롬12:2  한태완 목사  2013-04-30 5299
8995 출애굽기 방향 감각을 상실한 교회들 출1:1-7  김경형 목사  2013-04-30 2201
8994 히브리서 땅에서 하늘처럼 산다 (Live On Earth As In Heaven) 히11:8-12  김영봉 목사  2013-04-29 2495
8993 누가복음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I Am Still Hungry) 눅17:20-21  김영봉 목사  2013-04-29 3102
8992 시편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다(It Is Not I But God) 시8:1-9  김영봉 목사  2013-04-29 2425
8991 누가복음 하나님 안에 타인은 없다 (No Strangers In God) 눅15:25-32  김영봉 목사  2013-04-29 2626
8990 누가복음 나에게서 아버지를 본다 (I See My Father In Me) 눅15:11-13  김영봉 목사  2013-04-29 2499
8989 전도서 나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My God Is Too Small) 전5:1-2  김영봉 목사  2013-04-29 3166
8988 누가복음 기도 안에 내가 있다(I Am in My Prayer) 눅11:1-4  김영봉 목사  2013-04-29 2413
8987 고린도전 네가 누군데! (I Know Who You Are) 고전8:1-13  김영봉 목사  2013-04-29 2192
8986 고린도전 내가 누군데!(I Know Who I Am) 고전6:12-20  김영봉 목사  2013-04-29 2278
8985 사도행전 다 잡힐 때까지 (Until I Am Completely Grasped) 행19:1-7  김영봉 목사  2013-04-29 2255
8984 디도서 너에게서 예수가 보인다면... (If I See Jesus in You...) 딛2:11-14  김영봉 목사  2013-04-29 2697
» 누가복음 자비에 기대어 살다(Leaning On His Mercy) 눅1:46-56  김영봉 목사  2013-04-29 2516
8982 이사야 너희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Here Is Your God) 사40:1-11  김영봉 목사  2013-04-29 2614
8981 이사야 나는 늘 기다린다(I Am Always Waiting) 사64:1-9  김영봉 목사  2013-04-29 2201
8980 신명기 감사절에 생각하는 영적 전염병(Thinking of Spiritual Epidemic at Thanksgiving) 신8:11-20  김영봉 목사  2013-04-29 3089
8979 스바냐 포도 지게미에 앉아(Sitting on the Lees) 습1:12-18  김영봉 목사  2013-04-29 1988
8978 고린도전 은사로 되는 교회(Church Run by Gifts) 고전12:4-11  김영봉 목사  2013-04-29 2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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