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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안에 내가 있다(I Am in My Prayer)

누가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413 추천 수 0 2013.04.29 23:16:37
.........
성경본문 : 눅11:1-4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2년 2월 5일 주일: 주기도문 강해 설교 <너희가 기도할 때에...> 1
기도 안에 내가 있다"(I Am in My Prayer)
누가복음 11:1-4

1.

사람은 누구나 기도합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든,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 어떻게 기도하는가, 혹은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하는가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한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일생을 살면서 몇 번은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하고, 종교가 없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초월자에게 기도하며, 어떤 사람은 '하나님, 부처님, 알라님!'이라고 소리쳐 기도합니다. 무신론자도 알고 보면 어떤 형식으로든 기도합니다.

미국에서 최근 몇 년 동안 무신론 운동이 마치 하나의 종교 운동처럼 부흥했습니다. 어떤 평가에 의하면, 최근에 가장 급성장한 종교는 무신론교(the church of atheism)라고 합니다. 미국 무신론 운동의 부흥을 이끈 세 명의 저자가 있습니다.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 짐 해리스(Jim Harris) 그리고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입니다.  <만들어진 하나님>(God Delusion)을 쓴 리차드 도킨스가 무신론교의 교황이라면, <하나님은 위대하지 않다>(God Is Not Great: How Religion Poisons Everything)라는 책을 쓴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무신론교의 추기경 쯤 되는 사람입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암으로 투병하다가 2011년 12월 11일,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교회와 기독교 단체에서 치료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해도 되겠느냐고 문의했습니다. 히친스는 그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혹시나 히친스가 임종 전에 회심하지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는 결국 무신론자로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맞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죽음에 의해 수동적으로 당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죽기' 원합니다. 죽음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 보고, 그것이 다가올 때 무엇인가를 하려 합니다. (I personally want to ‘do’ death in the active and not the passive, and to be there to look it in the eye and be doing something when it comes for me.”)

참, 멋진 말이요, 멋진 태도가 아닙니까? 그는 언론인(journalist)으로서 일생동안 초월적인 것들과 신성한 것들을 맞서 싸우면서, 인간이 만든 모든 성역을 허물려고 몸부림쳤는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일관되게 살았습니다. 그 일관됨에 대해 그리고 그 거침 없음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냅니다만, 그의 태도는 인간이 한계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보여 줍니다.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중독에 가까운 흡연과 음주의 습관을 버리지 않은 것이나, 자신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신을 부정하고 죽음을 맞은 것이나, 제게는 모든 것이 강해 보이고 싶어하는 약한 자의 몸부림처럼 느껴집니다. 마음을 짓누르는 두려움을 부정하기 위해 주먹을 불끈 쥐고 "나는 두렵지 않아!"라고 소리치는 어린아이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그의 이러한 태도는 일생동안 부정해 온 하나님에 대한 그 나름의 기도 방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섰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홀로 버티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네 안에 있는 두려움을 위장하고 강한 척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느냐? 수고 많았다. 이제 내 안에서 쉬거라." 교리적으로 판단한다면 히친스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만, 하나님을 부정하려는 그의 몸부림에 대해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기보다는 가엾게 보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예수님을 통해 체험한 하나님은 꼭 그러실 것 같습니다.  

사실, 하나님에 대해 하는 모든 행동은 일종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행동도 기도요, 하나님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행동도 기도입니다. 시편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께 대들고 따지고 분노하는 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모든 것이 기도이기에 시편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신론자도 끊임없이 기도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의식하고 하든 의식하지 않고 하든, 기도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 중 하나입니다.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homo sapiens)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따진다면, 인간을 '기도하는 동물'(homo prex precis)라고 불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2.

인간이 '기도하는 동물'이라는 말은 인간이 인간이 되기 위해서 기도가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라는 뜻입니다. 기도를 911 call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다행히도 그 동안 살아오면서 911을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누가 저에게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911 call이다"라고 말한다면, 저는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를 911 call로 생각하는 사람도 기도가 인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가 911 call의 역할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기도의 전부는 아닙니다. 기도를, 하나님을 조종하는 리모컨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를 완전히 오해한 것입니다. 기도를, 인터넷에서 상품을 주문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가 필요한대로 주문하면, 즉시로 그 상품이 배달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기도를 마법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손오공이 마술 지팡이를 흔드는 것처럼, 혹은 도깨비가 방망이를 내려 치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수단으로 기도를 오해합니다. 또는 기도를 넋두리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듣든지 말든지, 그냥 답답하여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한 명상 정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기도를 이렇게 생각한다면, 기도는 있
으면 좋고 없어도 크게 아쉽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참된 의미에서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사귐은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한 두 번 만난 것을 가지고 사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귐은 또한 서로 주고 받는 인격적인 소통입니다. 그래서 사귐은 사랑과 신뢰와 존경이 있어야 일어납니다. 친구 사이든 남녀 사이든, 서로 좋아야 사귐이 이루어집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귀다 보면, 말할 때도 있고, 무엇인가를 부탁할 때도 있고, 싸울 때도 있고, 말 없이 손 잡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사귐의 과정입니다. 그렇게 사귀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 더 깊게 사랑하게 되고, 사랑이 깊어지는 만큼 두 사람은 서로 닮게 됩니다. 진실한 사귐을 나누는 부부는 얼굴 생김새가 전혀 달라도 왠지 모르게 닮아 있습니다. 그것이 사귐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하나님과 사귐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과의 사귐인 기도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C. S. 루이스가 잘 표현했듯, 하나님은 인간 안에 두 가지 가능성, 즉 동물적인 차원으로 전락할 가능성과 하나님의 차원으로 솟아오를 가능성을 두셨습니다. 물론, 기독교는 힌두교나 다른 종교처럼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 형상이 깨어지거나 희미해지면 동물적인 차원으로 전락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선명하게 드러나면 하나님의 차원으로 솟아 오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됩니다. 인간이 인간 되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오롯이 회복될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 안에 있는,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려면, 하나님과 사귀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귀지 않고는 하나님을 닮아갈 수 없습니다.

동물의 수준으로 전락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차원으로 솟아 오르지도 않고, 그대로 인간의 차원에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차원으로 솟아 오르지 않으면, 동물의 차원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현상유지'라는 말이 있지만, 실은 그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진보하지 않으면 퇴보하는 것입니다. 하늘로 솟아 오르지 않으면 땅으로 내려가는 겁니다. 인간이 하늘로 솟아 오르지 못하고 동물적인 차원으로 전락하면, 타락한 마음이 동물적 본성을 사로잡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사악한 '짐승'(beast)이 될 위험에 노출됩니다. 그 증거를 우리는 매일 아침 신문에서 쉽게 찾아 읽을 수 있습니다.

지난 월요일의 일입니다. 아침에 배달된 신문을 펼쳐 읽는데, 하나같이 인간의 비열한 범죄 이야기 뿐입니다. 성 범죄, 정치인의 거짓말, 사업가의 부정, 교사의 부정 등, 그 날은 정도가 특별히 심각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아니, 오늘 신문은 왜 이래? 도대체 역겨워서 읽을 수가 없네!"라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이 지난 일 주일 동안 목회자 학교를 인도하느라고 한 번도 신문을 읽지 않았잖아요. 그렇게, 한 동안 신문을 읽지 않고 있다가 다시 읽으니 그렇게 보이는 거지요. 세상은 항상 그랬어요."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비열하고 역겨운 것인지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짐승같은 인간들에 익숙해져 있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사귐을 통해 솟아 오르지 않으면 언제든지 이렇게 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누군가 그랬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밖에 없다. 악한 사람과 악해질 기회를 아직 얻지 못한 사람!" 인간의 본성과 존재를 정확히 꿰뚫어 본 말입니다. 


3.

기도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그리고 참된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이 있다면, 기도를 제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가운데 오셨던 예수님에게도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1절)

네 개의 복음서 중에서 특히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분이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 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신 것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이 늦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일곱 개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세 개는 기도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 27:46)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 23:46) 주님은 공생애를 기도로 시작했고, 기도로 마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도 늘 기도하셨습니다. 열 두 제자를 뽑을 때도 먼저 기도하셨습니다(눅 6:12). 전도하도록 제자들을 보내놓고 나서 기도하셨습니다(눅 10:17-20). 이른 아침에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고, 밤이 늦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숨 쉴 겨를도 없었지만, 기도하는 시간만큼은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기도로 일을 준비했고, 기도로 시작했으며, 기도하며 일했고, 끝나고 나서도 기도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아, 그거야, 예수님이니까 당연히 그랬어야지요"라고 말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건 당연한 일이 아니라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보냄을 받으신 분이 아닙니까? 그분에게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초월적인 능력을 구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기도할 이유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기도를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식사를 거르는 한이 있어도 기도는 거르지 않았습니다. 충분한 기도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잠 자는 시간을 줄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기도가 약해지는 것만큼 하나님과의 관계가 느슨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큰 능력을 행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나누는 일을 가장 우선적인, 가장 중요한 일로 삼았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을 때에만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권세를 올바로 사용할 수 있음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한자의 '이심전심'이라는 말은 불교에서 나온 말입니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대면하여 말 없이 마음으로만 가르침을 주고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불교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석가세존이 어느 날 설법하기 위해 제자들 앞에 서더니, 아무 말 없이 꽃을 하나 꺾어 들어 보여주었습니다. 그 때, 다른 제자들은 무슨 뜻인지 몰라 모두 어안이 벙벙해 있었는데, 가섭이라는 제자만이 활짝 웃었다고 합니다. 스승이 꽃을 꺾어 든 이유를 알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상태를 가리켜서 '이심전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친구 관계에서도, 부부 관계에서도, 혹은 교우 관계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한자로 '지기'(知己)라 하고, 영어로는 Confidant라고 합니다. 기도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통해 그분의 뜻이 저절로 느껴지는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분의 성품이 우리 안에 흘러 넘치게 됩니다.

기도가 예수님에게 제일 중요한 일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 동고동락하던 제자들이 그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1절)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유대교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 전통에 따라 기도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예수님도 그들처럼 기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분과 함께 살면서 그분의 기도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음을 알아 차리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내로라던 율법학자들의 기도와 뚜렷이 달랐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제자들은 진지하게 따져 보았을 것입니다. 상당한 기간 동안 관찰하며 분석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분을 관찰하며 분석하던 제자들은 그것에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어떻게 기도하시는지, 터놓고 이야기하며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같은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 질문을 한 제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다른 열 한 제자는 그 질문을 한 제자에게 속으로 감사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학교 다닐 때 한 두 번은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뭔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막상 손을 들어 질문할 용기가 없어서 망설이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질문과 동일한 질문을 할 때, 그 아이가 얼마나 고맙습니까? 열 한 제자의 심정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모르셨을 리 없습니다. 그 때를 기다려 오셨을지 모릅니다. 그분은 마치 그 때를 위해 준비해 두셨다는 듯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여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4.

우리가 예배 때마다 드리는 '주기도문'이 이렇게 하여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교회에서 이 기도문이 너무 자주 사용되다 보니, 마치 '주문'(spell)처럼 취급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주문'은 '주기도문'의 약자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 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이유는 주문처럼 외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이심전심의 사귐 안에 들어가려면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기도를 통해 참된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가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와 맥을 같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고, 참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을 하나씩 짚어 가면서 교우 여러분과 함께 기도에 대해 배우려 합니다. 이 기도문은 오늘 읽은 누가복음 11장 2-4절에도 나오고, 마태복음 6장 9-13절에도 나옵니다. 우리가 보통 암송하는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것을 따른 것입니다. 그것이 좀 더 예전(liturgy)에 맞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기도문은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도문보다 짧은데, 이것은 이방인 독자들을 위해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으로 마태복음의 본문을 따라 설교를 이어갈 것입니다. 부디, 이 연속 설교를 통해 기도의 정수를 발견하고, 예수님처럼 기도하여 그분을 닮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안에 그 사람이 담겨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 기도 안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 무엇을 고민하고 있으며, 무엇을 목표로 살고 있고, 무엇을 귀하겨 여기며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실하게 기도하고 있다면, 자신이 기도에 담은 것이 무엇인지 적어 놓고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성장함에 따라서 기도하는 내용과 태도가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같은 것을 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영적 상태는 언제나 같은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영적 성장은 기도를 달라지게 만듭니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많은 기도시를 남겼습니다. 그 기도문 안에는 릴케의 내면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기도 중 하나가 이렇습니다.

저의 눈을 감겨 주소서. 주님을 볼 수 있도록.
저의 귀를 막아 주소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발이 묶여도 저는 주님께 가렵니다.
혀가 없어도 주님께 기도하렵니다.
제 팔을 꺾어 주십시오. 주님을 껴안도록.
손으로 잡듯, 제 마음으로 주님을 잡도록.
제 심장을 결박하소서. 그러면 저의 뇌가 박동할 것입니다.
저의 뇌에 불을 붙이시면
저는 뇌에서 흐르는 핏줄기로 주님을 전하겠습니다.

Put out my eyes, and I can see you still,
Slam my ears to, and I can hear you yet;
And without any feet can go to you;
And tongueless, I can conjure you at will.
Break off my arms, I shall take hold of you
And grasp you with my heart as with a hand;
Arrest my heart, my brain will beat as true;
And if you set this brain of mine afire,
Then on my blood-stream I yet will carry you.

문학가로서 혹은 사상가로서 하늘의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온전히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도문만으로도 우리는 릴케라는 시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진실한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의 내면 세계가 담겨 있게 마련입니다.

주기도문 안에는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 안에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겨 있기를 바라는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문이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시려는 모든 말씀이 이 기도문 안에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주기도문 하나만 암송하고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냥 기계적으로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문의 내용과 정신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꾸준히 기도하고, 기도하는 것처럼 살면, 우리는 예수님을 점점 닮아갈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5.

그래서 저는 교우 여러분에게 청합니다. 마음을 다잡아 이 거룩한 여정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주기도문 연속 설교에 더하여, 2월 22일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새벽기도회 시간에는 '사순절 기도 여행'(Lenten Journey for Prayerful Life)이라는 제목으로 기도에 대해 배우고 훈련하는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부디, 앞으로 3개월의 기간이 기도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반성하며 진지하게 배우는 기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 역시 이 과정을 통해서 기도의 더 깊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하고 또한 기도하고 있습니다. 부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또한 여러분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과정을 통해 여러분이 하는 일 가운데 기도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도 속에 들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영적 성장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바른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참된 사귐을 누리시며, 그로 인해 예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동물성을 딛고 하늘로 솟아 오르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로 인해 거룩하고 아름다운 '인간다움'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또한 기원합니다.

주님,
저희로 기도하게 하소서.
주님처럼 기도하여
주님 닮게 하소서.
주님의 기도로써
저희를 새롭게 빚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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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89 전도서 나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My God Is Too Small) 전5:1-2  김영봉 목사  2013-04-29 3166
» 누가복음 기도 안에 내가 있다(I Am in My Prayer) 눅11:1-4  김영봉 목사  2013-04-29 2413
8987 고린도전 네가 누군데! (I Know Who You Are) 고전8:1-13  김영봉 목사  2013-04-29 2192
8986 고린도전 내가 누군데!(I Know Who I Am) 고전6:12-20  김영봉 목사  2013-04-29 2278
8985 사도행전 다 잡힐 때까지 (Until I Am Completely Grasped) 행19:1-7  김영봉 목사  2013-04-29 2255
8984 디도서 너에게서 예수가 보인다면... (If I See Jesus in You...) 딛2:11-14  김영봉 목사  2013-04-29 2697
8983 누가복음 자비에 기대어 살다(Leaning On His Mercy) 눅1:46-56  김영봉 목사  2013-04-29 2516
8982 이사야 너희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Here Is Your God) 사40:1-11  김영봉 목사  2013-04-29 2614
8981 이사야 나는 늘 기다린다(I Am Always Waiting) 사64:1-9  김영봉 목사  2013-04-29 2201
8980 신명기 감사절에 생각하는 영적 전염병(Thinking of Spiritual Epidemic at Thanksgiving) 신8:11-20  김영봉 목사  2013-04-29 3089
8979 스바냐 포도 지게미에 앉아(Sitting on the Lees) 습1:12-18  김영봉 목사  2013-04-29 1988
8978 고린도전 은사로 되는 교회(Church Run by Gifts) 고전12:4-11  김영봉 목사  2013-04-29 2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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