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나에게서 아버지를 본다 (I See My Father In Me)
누가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499 추천 수 0 2013.04.29 23:16:37성경본문 : | 눅15:11-13 |
---|---|
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2년 2월 26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주기도문 연속설교 "너희가 기도할 때에......"> 3
나에게서 아버지를 본다 (I See My Father In Me)
누가복음(Luke) 15:11-13, 20-24
1.
요즈음 저는 아버님을 자주 뵙습니다. "한국에 계시는 아버님을 어떻게 자주 뵙는다는 말이냐?"고 의아해 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화상 통화 장치를 아버님 댁에 설치했나 하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좋은 방법이겠다 싶습니다만, 제 말씀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저 자신의 모습에서 과거에 보던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는 뜻입니다. 샤워를 하고 나서 거울을 보면, 거기에 아버지가 계십니다. 매끈한 이마,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머리카락, 나이가 들면서 더 깊이 들어간 눈, 탄력을 잃은 피부와 근육이 모두 과거에 보았던, 외출을 준비하시던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제가 하는 말에서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고, 밤에 하는 기침 소리도 영락없이 아버지의 그것과 같습니다. 제 양복에서 나는 냄새도 아버지에게서 나던 그 냄새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아버지를 뵙고 삽니다.
제 아버지로 말하자면, 중년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참 무서웠고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면 불편했습니다. 보통 아버지들처럼 제 아버지도 칭찬에는 인색하셨고 꾸중에는 매서우셨습니다.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 날에는 조심해서 놀아야 했고, 학교에서 성적표를 받을 때면 항상 꾸중 들을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학창 시절 저는 아버지의 꾸중을 듣지 않는 것을 목표로 두고 공부했습니다. 어린 제게 아버지는 참 강해 보이셨고, 빈틈이 없어 보였습니다. 아버지의 기준에 맞을 만큼 잘 할 자신도 없었고, 그렇게 잘 하는 일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 서면 저는 작아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가 저와 저의 형제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저는 생활기록부에 '존경하는 인물'을 쓰라고 할 때마다 '아버지'라고 썼습니다. 그렇게 한 가장 큰 이유는 제가 아는 위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위인전기를 읽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버지라고 쓰기는 했지만, 실제로 저와 제 형제들은 아버지를 존경했습니다. 이름 없는 시골의 초등학교 평교사였지만, 존경한다고 말하기에 충분한 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렵고 무섭기는 했지만, 아버지 때문에 억울하고 분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늘 큰 산이었습니다. 어쩌다가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으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고, 무슨 문제든지 아버지에게 맡기면 다 해결될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인 것이 늘 자랑스러웠습니다.
그 아버지와 마주 앉아 활짝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낸 기억이 제겐 없습니다. 함께 뒹굴며 놀아본 기억은 더 더욱 없습니다. 저의 큰 외삼촌은 제 아버지와 전혀 다른, 자애로운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외가댁에 갈 때마다 '내 아버지도 저랬으면......"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버지를 친구처럼 대하는 외사촌들을 보면서 부러웠습니다. 아버지 앞에만 서면 언제나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아빠'라는 말 한 번 해 보지 못했습니다. 저에게는 '아버지'가 애칭이었습니다. 상황이 조금이라도 심각해지면, 금세 '아버님'으로 호칭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언제부터인가 작아지셨습니다. 그 철저함과 매서움이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거대한 산과 같던 아버지가 작은 언덕처럼 폭삭 주저앉았습니다. 살가운 정을 드러내실 때도 있습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훨씬 덜 어려워졌습니다. 무섭지도 않습니다. 편해졌습니다. 그래서 좋을 줄 알았는데, 아쉬움이 더 큽니다. 어렵고 무서워도 좋으니 과거처럼 그대로 계셔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세월은 그 바람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산이 되어 주셨던 아버지에게 이제는 제가 산이 되어 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멀리 떨어져 살고 있으니, 참으로 큰 불효자입니다.
이제, 과거에 멀게만 느껴졌던 아버지의 나이에 저 자신이 당도하고 보니, 제 자신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이 자주 보입니다. 강하고 고고한 모습의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약해진 아버지의 모습만 보입니다. 마치, 아버지가 그림자처럼 저를 따라다니시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아니, 아버지께서 제 안에 사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편으로는 참 좋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씁쓸하기도 합니다. 크고 강한 아버지의 모습이 그립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본 모습처럼 제 인식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전능자 하나님께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때, 육신의 아버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느낌과 정서가 개입됩니다. 저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왠지 모를 거리감을 느낍니다. 존경스럽기는 하지만 왠지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로 느껴집니다. 저의 외사촌 형제들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때, 저와는 다른 정서를 느낄 것입니다. 웬만한 잘못도 묵묵히 지켜보며 참으시는 아버지, 그래서 때로 그 품에 안겨 투정을 부리고 싶은 아버지로 느낄 것입니다. 자라면서 아버지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대한 분노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에게 다가가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들이 문제입니다. 저도 지금 아버지로 살고 있지만, 땅의 아버지들이 하늘 아버지의 축소판처럼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하늘 아버지에게 가는 데 있어서 장애물이 되곤 합니다. 우리 교회 교우 중 한 분은 언젠가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저에게 딸만 둘이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제가 아버지에게 상처를 너무 많이 받고 자랐기 때문에 제게 아들이 있었다면 분명히 제 상처를 고스란히 물려주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딸들이어서 그 실수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마음에 숨기고 사는 상처와 아픔들을 헤집어 보면, 아버지에게서 얻은 것이 절대 다수입니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원죄입니다. 자식의 마음을 살피려는 노력 없이 소리나 지르면 되는 줄 아는 아버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분을 못 이겨 '사랑의 매'라고 강변하면서 폭력으로 자녀의 마음에 시한폭탄을 만들어 주는 아버지들도 아직 적지 않습니다., 아버지들이 바깥에서 겪는 아픔과 절망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아픔과 절망을 자녀들에게 퍼부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자란 자녀들은 나중에 성인이 되어 배우자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게 되고, 직장에서 상사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에도 장애를 겪습니다. 그러니 그 얼마나 큰 잘못입니까?
물론, 어머니들도 자식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사실, 요즈음에는 그런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타이거 맘'(Tiger Mom)이라는 말 혹은 '헬리콥터 맘'(Helicopter Mom)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타이거'도 그렇고, '헬리콥터'도 그렇고, 그게 어디 어머니와 어울리는 말입니까? 어머니들이 그렇게 사나와지고 거칠어지고 집요해졌다는 뜻입니다. 과거에 아버지들이 맡았던 역할을 가로채서 아버지 대신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겁니다. 요즈음 아이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어떤 느낌을 가질지 궁금합니다. 혹시나, 아무 힘없이 끌려 다니는 무력한 존재로 느끼지나 않을지 모릅니다. 그 같은 아버지 상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큰 장애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려면, 먼저 그분이 '어떤' 아버지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한 아버지의 이미지로 하나님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부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읽고 하나님이 어떤 아버지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제대로 대할 수 있고, 또한 제대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놀라운 면이 있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파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배척당한 가장 큰 이유가 그분이 가르친 하나님 상 때문이었습니다.
3.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오늘 읽은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입니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서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이 비유에서 우리는 아주 이상한 아버지를 만납니다. 우리에게도 이상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의 문화로 볼 때는 더 더욱 이상한 아버지입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합니다. 유산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 가지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문화에서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에 유산에 대해 거론하는 것은 '호로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을만한 일이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불효 중 하나입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나에게는 아버지가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내 몫의 유산이나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그 아들을 호되게 혼내고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지 못하게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각각 유산을 분배해 주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기를 택했고,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제 욕심대로 살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곧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탕진하고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는 가장 치욕적인 일, 즉 돼지를 치면서 연명했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다가 그는 결국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아들로 받아들여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종으로 받아 들여 준다면 족하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에게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돌아갑니다.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유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받아 준다 해도 분이 다 풀린 다음에 그리고 못된 버릇을 단단히 고친 후에 받아 주었을 것입니다.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는 매일 저녁 밥 한 그릇을 아랫목에 덮어놓고 자지만,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는 머리맡에 몽둥이를 두고 잡니다. 그것이 보통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를 보십시오. 멀리서 둘째 아들이 오는 것을 보고는 달려 나가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신발이라도 제대로 신고 뛰어갔는지 모릅니다. 종들에게 시켜 가장 좋은 옷을 꺼내다 입히게 하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겼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들에서 일을 하다가 돌아온 큰 아들이 이 광경을 보았습니다. 자초지종을 알고는 큰 아들이 분노했습니다. 아버지가 동생에게 한 일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그를 다시 받아들이더라도, 지금은 다리몽둥이라도 부러뜨려 놓아야 했습니다. 큰 아들이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분을 삭이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달려 나갑니다. 큰 아들의 감정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닙니다만, 잘 하는 일은 아닙니다. 아버지로서는 호통을 칠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 좀 보십시오. 큰 아들에게 가서 사정을 합니다. "얘야,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던 네 동생이 돌아왔는데, 내가 어찌 이러지 않을 수 있겠니? 내 마음 좀 이해해 다오."
사실, 이 비유의 주인공은 두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비유의 제목을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탕부의 비유"(the Parable of the Prodigal Father)라고 불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탕자'는 재산을 탕진한 아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탕부'는 사랑을 허비하는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하늘 아버지 즉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이상한 아버지'를 등장시킴으로써 하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충격적으로 전해 주려 하십니다.
유대인들로서는 이 비유에 나오는 하나님 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성부 하나님은 빈틈없고 치밀하여 털끝만큼의 빗나감도 허용하지 않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분노가 부글부글 끓는데 간신히 참고 계십니다. 그 분노의 정도가 더 커지면, 그분은 마침내 분통을 터뜨려 불의 심판을 행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제사를 드렸고 구제를 했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 하나님에게 둘째 아들처럼 행동한다면, 당장 천벌을 받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하나님 상을 버리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분이 아는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되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는 분입니다. 그분이 아는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에 대해 분노하기보다는 아파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아는 하나님은 심판하고 징계하시는 분이 아니라, 참으시고 기다리시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아는 하나님은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고 다시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습니다. 사랑에 인색한 아버지가 아니라, 사랑을 탕진하는 어머니와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아신 하나님을 이빨 빠진 호랑이로 보면 안 됩니다. 언제고 "오냐, 오냐!"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업신여기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아신 성부 하나님은 전능자시요 심판자이십니다. 결국, 우리는 그분 앞에서 모든 것을 결산하는 날을 맞을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아무 힘이 없어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해서 우리의 죄악을 참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분의 사랑이 그분으로 하여금 다른 모든 것을 뒤로 미루고 우리를 사랑으로 대하게 만드십니다. 그렇기에 그 사랑이 더 값지고 소중합니다. 약한 모습으로 나에게 달려 나오시고 나를 끌어안으시는 그분의 손길이 더욱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4.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생각하고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셨고,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도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암송하는 주기도문은 헬라어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원래의 정서가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헬라어 "파테르 헤몬"(pater hemon)의 번역인데, 그 배후에는 아람어의 '아바'(abba)가 있습니다. '아바'는 우리말로는 '아빠'에 해당하고 영어로는 Daddy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바'라고 하셨는데, 예수님 이전에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람어 '아바'의 역사는 우리말의 '아빠'의 역사와 상당히 닮았습니다. 제가 어릴 적만 해도 '아빠'는 어린이들의 전용어였습니다. 성인이 아버지를 이렇게 부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정서가 달라지면서 요즈음은 '아빠'라는 말이 성인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저는 아버님에게 한 번도 '아빠'라는 말을 써 본 적이 없습니다. 어릴 적에도 그랬습니다. 제가 만일 아버지에게 "아빠"라고 부르면, 그 순간 두드러기가 제 온 몸을 덮을 것이고, 아버지께서는 "너, 미쳤냐?"라고 하실 것입니다. 반면, 제 아내는 지금도 친정아버지에게 '아빠'라고 부릅니다. 제 아내가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하면, 아내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아버지 요셉을 어떻게 불렀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아바'라고 부르며 자라셨을 것입니다. 그 말을 써 보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아바'라는 말을 사용하기 어렵다는 것은 제가 경험으로 잘 압니다. 저는 자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아빠'라는 말을 사용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 칭호가 제 기도를 방해하면 했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아버지'가 최고의 애칭입니다. 반면, 제 아내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아빠'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할지 몰라도, 친정아버지에게 느끼는 애정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부르면, 하나님을 사귀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던 '아바'라는 말로 하나님을 불렀을까요? 대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그토록 친밀하게 느끼셨기 때문입니다. 그 친밀감을 다른 호칭으로는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른 것은 연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인간으로서는 그 앞에 서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크신 분이시지만, 그분이 지으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마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사랑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아버지처럼 우리를 대하십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에게 '아빠'라고 부르기에 주저함이 없을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초청이다"라고, 누군가가 쓴 것을 기억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라고 초청하신 것은 말버릇을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롬 8:14-17)
5.
우리는 기도로써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 한 마디 속에 우리가 성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이 크신 분이 우리의 눈높이까지 스스로를 낮추셨다는 신비, 마주했다가는 질식되거나 타 죽을 것 같은 그분이 우리를 품에 안으셨다는 신비, 그리고 온 우주의 심판자인 그분이 우리의 아빠가 되셨다는 신비가 이 한 마디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 신비에 눈 뜨고 이 신비를 경험하라고 청하십니다.
저는 앞에서 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은 어린 저에게 매우 크고 강하고 엄했습니다. 그래서 다가가기 어려웠지만, 또 그래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고, 늘 최선을 향해 노력하게 만드는 채찍이 되었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아버지에게서 보고 싶었던 자애로움이 보일 즈음이 되니, 크고 강하고 든든했던 그 모습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어떤 일에도 "고맙다"는 말 밖에 하실 줄 모르는 아버지에게서 옛날 보았던 그 크고 강한 모습을 함께 보고 싶습니다만, 그것은 헛된 바램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아버지는 누구나 이렇게 한 쪽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어느 면에서든 결함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갖춘 아버지를 이 땅에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아버지는 하늘에만 계십니다. 그래서 윌리엄 윌리몬(William Willimon)과 스탠리 하우어워즈(Stanley Hauerwas)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모든 인간 아버지들에 대한 심판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늘 아버지를 제대로 알게 되면, 이 땅의 아버지가 얼마나 부족하고 모자란 존재인지를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은 그 부족함과 불완전함을 통해 완전하고 충만하신 하늘 아버지를 그리게 만드는 통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이 땅의 아버지에게서 아쉬움과 부족함을 느끼기에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를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크고 높고 깊고 넓기가 한이 없는 분이시며, 거룩하심과 선하심과 아름다우심과 정의로움에 있어서 아무 결함 없이 완전하고 충만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하늘에 계시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또한 "우리의 아빠"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경험합니다. 그것은 마치, 돌아서 앉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자신에게 화가 난 줄로 알고 두려워 무릎 꿇었는데, 아들을 향해 돌아앉는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때, 아들은 '아빠!'라고 부르며 그 품 안에 무너집니다.
'아버지'라는 말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은유(metaphor)입니다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은유 이상입니다. 자식은 아버지의 DNA를 물려받습니다. 아버지의 기질과 체질과 정서가 유전됩니다. 그뿐 아니라, 자식은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도, 가치관도, 말하는 것도, 걸음걸이도 아버지를 닮아갑니다. 마찬가지로, 하늘 아버지는 우리에게 당신의 형상을 물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유전된 하나님의 DNA를 잘 돌보고 키우면 우리는 점점 하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사귀며 살다 보면, 거울 앞에 선 제가 저 자신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듯,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라는 초청은 아침 이슬처럼 덧없는 존재에게 하나님의 DNA를 심어 주시고 그분을 닮아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그 신비를 살라는 초청입니다. 이것은 머리로 이해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책을 읽는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한 번도 불러보지 않은 '아빠'라는 말을 수 없이 되풀이한다고 하여 익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능자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분의 거룩성과 자신의 죄성으로 인해 두려워 떨어야 하고, 그분의 용서와 사랑에 눈물 흘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저처럼 '아빠'라는 칭호가 어색한 사람은 '아버지!'라고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그렇게 부를 때, 그분의 사랑과 애정을 마음으로 느끼고 믿으면 됩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어떤 아버지가 계십니까? 아버지라고 부를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분들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것입니다. 살아계시든 돌아가셨든, 아버지를 생각하면 여러분에게는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어떤 분은 무척이나 그리울 것이고, 어떤 분은 아리도록 아플 것이며, 또 어떤 분은 무덤덤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어떤 분이었고 그 아버지를 생각할 때 어떤 감정이든 상관없이, 우리 모두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리운 사람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픈 사람도, 모두 하늘 아버지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을 대면하는 것이 처음에는 두렵고 떨리는 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그분을 만나 '아빠'라고 부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굳이 '아빠'라고 부르지 않아도, 전능자 하나님을 생각할 때 그 사랑과 은혜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설렜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며 매일같이 사귀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우리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것입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를 보는 이들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제 안에서 아버지를 보고 좋아한다면, 제 안에서 하늘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얼마나 더 좋겠습니까? 제 안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마치 아버지와 제가 하나인 듯 하여 마음이 좋다면, 제 안에 하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과 제가 하나가 된 것을 느낀다면, 얼마다 더 좋겠습니까? 부디, 이 같은 신비와 은총이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당신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당신은 우리의 아빠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저희로 아버지를 참되게 알게 하시고
아버지의 사랑 안에 살게 하소서.
저희의 생각과 말과 행실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될 때까지
저희를 더 깊이 이끄소서.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