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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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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1장 1절-7절.
1절-7절: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이미 애굽에 있는 요셉까지 야곱의 혈속이 모두 칠십 인이었더라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기도: 아버지 하나님, 늘 시시 때때로 저희들에게 진리와 영감의 말씀으로 찾아오시기도 하고, 사건 환경과 존재를 앞세워서 저희들에게 찾아오셔서 부절히 하나님의 성품을 닮으라고 그 역사를 하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 진심으로 감사하옵나이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하면서 모든 인격 면에 있어서 성장이 되지 못하고, 생각하는 모든 소원 목적이라든가 그 취미성이 세상을 향해져 있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치 못하고 병적으로 앓고 있는 상태가 너무나 많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그 말씀 저희들은 믿습니다. 진리의 그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를 감동 감화시켜 주시고, 우리의 세상적이며 병적인 상태, 자라지 못한 상태,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잘못되고 비뚤어지고 꼬부라진 모든 추한 것을 깨끗케 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나오고 싶은 마음은 있어도 나오지 못한 당신의 자녀들도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들을 붙잡아 주시고, 이 험난한 세상을 걸어가고 헤쳐 나가고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말씀 붙잡고 나가는 그 믿음밖에 없는 줄 압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그와 같은 믿음을 저희들에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언제 어느 때 어느 시기든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정말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든 면에 구비해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자로 나타날 수 있게 저희들을 꼭 붙잡아 주시옵소서.
믿음이 연약한 저희들을 믿음 굳세게 하여 주옵시고, 앞으로 남은 시간도 날마다 그 믿음이 성장이 되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진리의 말씀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곧장 신앙 믿음의 길로, 하나님의 본질적인 신앙의 노선으로 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우리 기독자들은 뚜렷한 목적과 뚜렷한 방향감각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의 생애의 방향과 목적과 자기의 존재의 가치성이 뚜렷해야 이것이 믿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 주고 있어요.
66권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말씀’ 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 그렇게 하면 직선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지금 우리가 ‘양을 잡아 드려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하는 것을 글자 그대로는 할 수 없지요. 그래서 이 말씀들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 이렇게 알고 가면 됩니다.
어떤 성경은 글자 한 마디 한 마디 속에 성경 전체로 가는 말이 있고, 어떤 성경은 초두에 대 전제적으로 계시가 들어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본문을 읽었는데 ‘출애굽기’ 하면 그 안에 수많은 내용들이 있지만 오늘 읽은 본문이 몇 절이 안 되지만 출애굽기 전체를 말할 수 있는 그게 다 들어있다. 그러니까 ‘그 속에 뭐가 생략이 되어 있구나. 뭐가 숨어 있구나’ 그런 게 있다 그 말이요.
성경에 그런 게 많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여기서 저 쪽으로 가셨다’ 하면 여기서 저 쪽으로 가신 그것만 생각하기 쉬운데 ‘가시는 도중에 무슨 마음을 품고 가셨느냐’ 하는 그런 것이 거기에 숨어 있다 그 말이지요. 축소된 채로 숨어 있다 그 말이요. 우리는 그런 걸 잘 알아야 된다 그 말이지요.
우리가 성경 에스더서를 보면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에스더서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다 그 말이지요. 하나님의 호칭이 없으면 성경이 아니란다고 하면 ‘에스더서는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없기 때문에 그 내용 속에는 하나님이 없다’ 그렇게 말이 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에스더서를 보면 구구절절이 하나님을 전제로 말을 하고 있다 그 말이지요. 우리가 어느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마는 에스더서도 보면 하나님의 인격성을 말하고 있고, 하나님의 전능성을 말하고 있고, 하나님의 섭리성을 말하고 있고, 하나님의 목적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본문을 읽었지만 이 본문 속에 그런 것이 다 들어있다 그 말이요.
그리고 그것뿐만 아니고 하나님의 전능성 섭리성 목적성 하나님의 인격성 그런 것을 가지고 천국에 대한 강론을 또 할 수가 있다 그 말이요.
성경을 표면적 역사적으로 보고 ‘성경의 말씀대로 그 역사는 아직 안 이루어졌다’ 그렇게 되면 성경이 어떻게 풀려지겠느냐? 하나님 말씀대로 아직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성경이 풀리지를 않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 말이요. 그렇게 본다고 하면 요한계시록이 풀렸습니까? 요한계시록에 있는 일들이 어떤 면에서는 아직 일어나지를 않았지요. 세상이 불에 탄다든지 뭐 그런 거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이 하도 알쏭달쏭해서 감히 손을 못 대지? 이 무슨 말인가? 짐승들이 나오고, 바다의 짐승이 나오고, 땅의 짐승이 나오고, 마귀가 나오고, 여자가 해를 입고 나오고 하는 이걸 어떻게 봐야 될까? 아직 안 이루어졌다고 해서 성경이 틀린 건가 그 말이요. 그건 아니다.
우리가 또 역대상에 보면 사람들의 족보가 죽 나와 있지요. 마태복음에도 족보가 죽 나와 있고, 누가복음에도 족보가 죽 나와 있어요. 그런데 각 성경의 족보들이 다 틀리다 그 말이요. 그러면 역대상은 구약이고 마태는 신약의 사람이니까 마태가 그 족보를 기록할 때에 역대상에 있는 족보들을 한 번도 안 읽어봐 놓으니까 그렇게 틀리는 거냐? 마태가 족보를 기록할 때에 역대상에 있는 족보들을 죽 기록하면 될 건데 왜 그 때는 그렇게 왜 안 했느냐 그 말이지.
성경은 역사서적이 아닙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는 안 맞을지 모르지만 계시 면에서는 그렇게 해야 맞는다 그 말이요.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마태복음에 있지요?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하는 그 사이에 왕으로 말하면 아하시야 아달랴 요아스 아마샤왕이 빠졌단 말이요. 아달랴는 할머니지요?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 모두 빠졌단 말이요.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하는 거기에 요람과 웃시야 사이에 그 세 사람이 빠졌단 말이요. 그러면 왜 그렇게 했느냐 그 말이지.
왜 그렇게 한 것 같아요? 족보를 몰라서? 누가 지워서? 왜 그렇게 했느냐? 알면서 왜 그렇게 기록을 했느냐 그 말이지. 알면서도 왜 그 세 사람을 빠뜨려놨느냐 그 말이요. 왜 그랬을까요? 쓰기가 싫어서? 원문이 조금 모자라서? 기록하다 보니 종이가 조금 좁았던 모양이지? 우리가 종이에 글씨를 쓰다 보면 글씨 쓸게 많이 남았는데 종이에 남은 공간이 모자랄 것 같으면 글씨를 작게 쓰고 칸도 당겨서 쓰고, 공간이 많이 남을 것 같으면 글씨도 크게 쓰고 칸도 넓혀서 쓰지.
계시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부득불 그럴 수밖에 없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앞 절과 뒷 절 사이에 많은 사건이 축소가 돼 있다.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하는 그 사이에 많은 사건들이 축소가 돼버렸어. 그렇지요?
만일에 축소된 그 내용들을 성경에 다 기록을 하려 했다면 성경에 있는 말씀처럼 이 세상도 부족하다. 하나님께서 하신 그걸 다 기록하려면 이 세상도 부족하다.
부족하다는 이 말이 종이가 부족해서 부족하다 그 말이요? 창세 이후의 세상의 모든 역사가 다 주님의 역사 아니요? 그걸 다 기록하기에는 이 세상도 부족하다. 그리고 예수님이 도성인신 하시기 전에 당신이 품었던 그 마음까지는 이 세상이 쓸 수가 없지요. 그렇잖아요? 인간의 좁은 두뇌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다 알 길도 없지만, 안다고 해도 그것을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모르면 출애굽기를 모릅니다. 출애굽기를 읽을 때에 창세기를 연상을 하고 읽어야 됩니다. 그렇게 보니 ‘그러면 창세기 앞에는 무엇이 전제가 되는가’ 이게 나온단 말이요. 이렇게 보게 될 때 창세기는 천지창조를 기록해 놓은 거고, 그 이전의 시기는 세상을 만들기 이전이니까 이제 하나님의 무형의 활동성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든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이시라 그 말이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들었다’ 하는 이게 중요한데, 세상을 만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차원 더 올라가서 이 세상을 만든 하나님을 아는 게 더 중요하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왜 세상을 만들었으며, 어떤 마음으로 무슨 뜻으로 무슨 목적으로 이 세상을 만드셨다’ 하는 그것이 세상을 만들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니까 우리가 그 마음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지요.
그러면 왜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냐 하면 우리가 역사만 보고 창세기에서 그 역사를 아는 이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만 알면 하나님의 계시성에 대해서는 모르게 된다 그 말이요.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의 인격성이 숨어있고, 하나님의 생존성이 숨어있고, 하나님의 소원성이 숨어있고, 하나님의 계획성이 숨어있고, 하나님의 설계성이 숨어있고, 하나님의 목적성이 숨어있습니다. 물론 출애굽기에도 있지요. 이걸 알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들어가야 만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장 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그 말씀을 안 한 것이냐 그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고 역사적으로만 혹은 종교적으로만 얘기하면 되는 것이냐 그 말이요. 그거는 성경이 아니라, 또한 계시가 아니라 그냥 하나의 역사일 뿐이란 말이요.
성경은 공간을 초월하고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어느 때 어느 지방을 누가 치리했다. 누가 왕으로 나타나서 치리했다. 어느 시대를 누가 다스렸다’ 하는 그거는 정확하게 몰라도 된다 그 말이요.
그리고 설령 성경의 역사를 정확하게 안다고 해도 그것을 아는 자체만으로는 자기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에 우리의 구원에 정확한 역사가 필요할 것 같으면 왜 정확하게 기록을 하지 않았느냐 그 말이요. 그러니까 역사적 면만 정확하게 알게 할 목적일 것 같으면 그걸 틀리게 쓰지 않는다 그 말이요. 역사가 틀리게, 또는 각 성경이 같은 사건을 각각 다르게 써놓은 것은 계시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역사를 아는 것보다, 성경구절을 달달 암송하는 것보다 뭘 알아야 된다? 계시성. 그렇게 기록케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제가 늘 말씀 드리지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내가 말한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사건을 들어 일으켜서 당신의 뜻을 나타낸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 사건도 누구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로 소리로 의사를 나타내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사건을 들어 일으켜서 우리 인간에게 알도록 하는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사건화로 돼서 오는 거지요. 하나님의 뜻이 소리로 나에게 전달이 되는 게 있고,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뜻이 사건을 일으켜가지고 사건적으로 나한테 주시는 말씀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모두 몇 명이었지요? 70인이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몇 명이라고 그랬지요? 75인? 이게 각지 숫자가 틀린데, 그러면 만일에 사도행전에서는 75명이라고 그러지 않고 출애굽기에서 75명이라 하고, 사도행전에서는 70명이라 하면 이거는 해석하기가 좋지요. 어림잡아 반올림해서 말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75명이 내려갔더라’ 그러면 ‘약 80명이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고, 또 ‘70명에서 조금 넘지’ 이렇게 어림잡는 수도 있지요. 그렇게 넘겨잡아서 말하기가 쉽다 그 말이요.
그러면 어느 것이 맞느냐? 70명이 맞느냐, 75명이 맞느냐? ‘어느 것이 맞다. 틀리다’ 그 말을 할 것도 없어요. ‘맞다. 틀리다’ 그 말로 자꾸 왈가왈부할 것 같으면 그거는 둘 다 맞고, 둘 다 틀립니다. 그렇게 되는 거요.
우리가 주석에 보면 성경에 그런 것들에 대해 해석들이 아주 구구해요. 그런데 그런 것들을 계시로 이해하지 않으면 해석이 안 되는 거요.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하며 설명하는 것도 봤을 거야. 그런 거 성경하고 관계가 없는 거요. 혹 설교할 때 목사님들이 ‘고고학적 발굴이 어떻고, 어디서 뭐가 발견됐고’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역사가 확실하다’ 하고 말하는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그거는 성경해석이 아니란 말이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할 때는 계시성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단순히 역사로만 말해나갈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만 해 나가면 하나님의 말씀성 즉, 하나님의 계시성이 없어져 버려요. 알겠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없어져 버려요.
이런 게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선포에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줄을 모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하나님께서 히브리민족을 하나님의 계획대로 애굽에 들어가서 살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왜 가나안에 살도록 두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게 해서 430년을 살게 했느냐? 범죄 했기 때문인지, 성장하기가 어렵기 때문인지? 한 가지만 꼭 집어서 ‘그래서 그렇다’ 이렇게 말하기가 어렵다 그 말이요. 왜냐하면 한 사건 속에는 이 면 저 면이 연관이 되어가지고 아주 복합적으로 다양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런 걸 많이 느낄 수 있어요. 직장에서 한 직원이 ‘아이, 일하기 싫다’ 할 때 왜 그러느냐? 힘이 없어서 그러느냐, 월급이 적어서 그러느냐?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냐? ‘일하는 분위기가 안 좋다’ 그것도 있을 수 있고. 말하자면 한 사건 속에 한 가지 이유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 말이요. 그런 것처럼 하나님의 계시 면을 볼 때도 아주 복합적이고 다양하다 그 말이요.
창세기에 요셉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된 것은 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형제들이 요셉을 장사꾼들에게 팔아먹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요? 역사적으로는 형님들이 자기를 은 20에 팔아먹은 건데 그 후에 요셉이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미리 자기를 애굽으로 보냈다고 그랬단 말이요. 참 여러분들, 이거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하나의 역사 속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걸 볼 줄 알아야지요. 그것 볼 줄 모르면 인간 잡고 막 싸우게 되지요.
다윗도 자기에게 닥친 사건을 신앙의 눈을 가지고 보지요?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갈 때 시므이가 다윗에게 돌을 던지면서 막 욕을 하니까 신하가 시므이를 죽이자 하니까 다윗이 하는 말이 ‘가만 두어라. 하나님이 시키는 거다’ 라고 했지요. 여러분들, 그 역사를 볼 때에 그런 걸 보는 눈이 있어야지요. 안 그러면 그것 잡고 싸울 거 아니요. 안 그래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불신자들이 보지 못하는 ‘그 배후에 누가 이걸 잡고 역사하시나’ 하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는 요셉이 애굽에 내려간 것은 사실이지만, 애굽에 들어가게 하는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라 그 말이지요. 역사적으로 보면 요셉이 팔리고 나서 그 후에 27년 지났는데, 팔릴 때가 17세였으니까 17세에 애굽에 내려가서 39세 때에 부모를 모셨고, 30세 때에는 국무총리가 됐고, 7년 풍년 7년 흉년. 이렇게 2년 후에 부모를 모시고 애굽으로 왔다 그 말이요. 역사적으로 그렇게 돼 있으나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볼 때는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고 공공연하게 말할 수 있다 그 말이요. 이해 갑니까?
우리가 출애굽기를 혹은 창세기를 얘기하면서 하나님을 뚝 떼놓고 역사로만 말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또 성경의 역사를 보면 인간은 이렇게 움직이고 저렇게 움직이고 한 것이지만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볼 때는 그걸 하나님이 했다고도 말할 수가 있다 그 말이요.
자, 그러면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이 하셨구나’ 하는 그걸 그대로 끌어당겨서 요한계시록을 또 그렇게 한 번 생각을 해 봐요. 그 요한계시록의 사건들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으로 보이느냐 그 말이요. 그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것으로 보인다면 악인이 무슨 일을 하니까 하나님은 그 자를 결과적으로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게 계시록에서 훤하게 보이지요. 또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을 하니 결과적으로 그에게 영광이 오고 축복이 오고 하는 이게 훤하게 보이지요. 그렇다면 그 성경을 읽는 우리가 그게 그렇게 보일진대 그걸 보면서 ‘내가 어느 편에 서야 되겠다. 이 편인가, 저 편인가?’ 그거 나오잖아요.
우리 기독자는 성경을 볼 때에 단순히 하나의 역사적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그렇게만 보면 뭐요? 성경구절 끼워 맞춰가면서 ‘어떤 거는 이뤄졌고, 어떤 거는 안 이뤄졌고. 나중에 예수님이 몇 년 몇 월 며칠에 온다’ 그 따위 소리가 나오고 그래요. 그럴 수밖에 없단 말이요. 그런 사람들은 뭘 몰라서 그런 짓들이 나온 거지요? 옳지. 계시성을 모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장난이 나온단 말이요.
그렇다면 우리가 출애굽기를 볼 때에 계시적으로 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요셉이 부모를 데려갔다. 요셉이 그랬다. 바로가 그랬다’ 그렇게 봐야 맞을는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랬다’ 그렇게 봐야 성경을 보는 태도가 맞을는지?
그런데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랬다’ 그렇게 하니까 어딘지 모르게 뭐가 씁쓸하잖아요? ‘나는 안 그러려고 그랬는데 하나님이 내 목을 끌고 가서 그렇게 시켰다’ 하는 식으로 꼭 느껴지기 쉽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의 자유를 박탈해 버리고 내 속에다 악령을 막 집어넣어가지고 꼭 그렇게 한 것처럼 생각이 되잖아요? 그건 아니지요.
그 때 당시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은 그 자들을 보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래도 제가 좋아서 그랬단 말이요. 제가 좋아서 환난주고 핍박주고 춤추고 그런 짓을 했지 않았느냐 그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 배후의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볼 때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 박탈하지 않아요. 강권적으로 하지도 않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대로 하고 활동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주권성은 그 밑에서 깔려서 역사를 하고 있어요.
그러면 여기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나오는데,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고 이성이 있기 때문에 선악을 판단 분별하지요. 그렇다면 자기의 이성으로 판단해서 자기 자유로 활동을 한 그 책임은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거지요. 비록 자기가 하나님의 뜻은 몰랐다 하더라도 그러나 인간 자기가 ‘옳게 살아야지. 바로 살아야지’ 하는 그런 것이 있게 되면 성령님이 오셔서 도와주신다 그 말이요. 도우는 겁니다.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내려간 그 사실을 알려줄 목적으로 출애굽기 1장 1절로부터 7절까지를 기록한 것이냐? 가령 1장 1절부터 7절까지의 내용을 다 지워버렸다고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가 있구나’ 하는 그 사실은 알지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1절로 7절까지의 기록이 애굽으로 내려간 사실을 알려줄 목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나오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출애굽기서를 준 목적은 역사성을 알려줄 목적으로 주신 것인가, 다른 무엇을 알려줄 목적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 이치와 도리 즉, 구원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출애굽에서 목적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고, 방향을 알아야 할 것이고, 지향성을 먼저 알아야 할 겁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부분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고.
‘일반 도덕성을 잘 지켜라’ 하는 이것이 예수 잘 믿는 것이냐, 아니면 예수 잘 믿는 이치를 알아야 잘 믿을 수가 있는 것이냐? 예를 들면 무조건 몸단장해가지고 집을 나서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먼저 목적과 방향을 알고 몸단장을 하든지 말든지 해야 되느냐 그 말이요.
내가 가는 길도 모르고,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 그것도 모르고 무조건 몸단장을 하고 대문 밖에 턱 나서면 어떻게 되지? 하기야 그런 사람도 있긴 있습니다. 방안에만 처박혀 있으니 하도 심심하니까 ‘일단 어디 밖에 나가보자’ 하고서 밖에 나와서 서성거리지요.
우리는 먼저 방향부터 바로 정하라. ‘일 크게 해라. 많이 해라. 잘 믿어라’ 지금 말이 문제가 아니고 먼저 방향부터 설정이 딱 돼야지요. 우리의 방향은 어디지요? 천국. 천국으로 그 방향을 딱 정했어. 그 다음에? 목적은? 그렇지. 하나님의 성품 닮는 거. 그리고 도덕적인 행위는 이제 몸단장.
지금 우리 기독교가 각 교파적으로 방향과 목적이 뚜렷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가만 속을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입니다. 첫째는 기독교 민족주의가 있고, 두 번째는 기독교 사회주의가 있고, 세 번째는 기독교 국가주의, 네 번째는 기독교 염세주의, 다섯 번째는 기독교 세속주의, 여섯 번째는 기독교 초절주의 등등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극기 극복주의 염세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국가주의 세속주의 이렇게 돌아가면 안 돼요.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방향과 목적이 전부 다 틀린 겁니다. 이게 다 공통적인 게 뭐요? 다 세상에 빠진 거지요.
하나 물어봅시다. 예수 믿던 사람이 세례까지 다 받았는데 교회도 안 나오고 술집이나 들어가고, 여자 집에나 들어가고, 술 먹고 길가에 다니면서 똥오줌이나 싸고 하면 타락이요, 타락이 아니요? 타락이지요. 타락된 거요. 맞아요.
그 다음에는 예수 열심히 믿으면서 노상 성령 받겠다고 저 산 속에 들어가서 금식기도하고, 집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자식 밥 해 줄줄도 모르고, 자식들에게 빨래해서 옷 해 입힐 줄도 모르고, 그저 부모도 ‘닐리리 날나리 따따리’ 해쌓고, 자식도 또 부모 따라서 그게 성령 받은 것인 줄 알고 ‘개나리 보따리’ 해쌓고. 자, 그게 성령의 불이 붙은 겁니까, 그것도 하나의 타락입니까?
그러면 아까 길거리에서 똥오줌 싸는 그 사람하고, ‘닐리리 보따리 개나리’ 하는 사람하고 둘 다 타락인데 뭐가 다르지요? 타락은 벌써 방향과 목적이 다 상실된 건데 그 둘을 놓고 볼 때에 하나님 앞에는 둘 다 타락이에요. 그러나 인간이 볼 때는 그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지요. 그러니까 타락을 했을 때 그 양상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나타나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나타나고. 알겠어요?
타락의 양상이 두 가지로 나왔지요? 자, 그러면 그게 있는가 하면 또 하나는 자기는 충성봉사 한다고, 예수이름 나타낸다고 제 돈 들여가면서 아무 데고 가서 충성봉사 하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칭찬도 듣고 그럽니다. 이거는 소금역할을 잘 하는 거요?
그것도 타락이요. 왜 타락일까? 부지런하고 잘 하는 게 아니라 왜 그걸 타락으로 봐야지? 하나님의 계시성이라고 하는 그 의미가 뭐요?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그게 있어야 하는 건데, 그런데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그 사상도 없고 그 정신도 없고 그 이치도 모르고 오로지 무조건 충성봉사야. 사회니 교회니, 뭐 이단 교회인지 그것도 모르고 그냥 막 하는 거야. 그것도 타락입니다. 그러니까 타락이라 하는 양상이 그렇게도 나타나는 겁니다.
우리가 세 사람의 예를 봤는데, 그런데 이 세 사람을 하나의 단체로 봐 봐요. 그 세 사람을 교회로 보자 그 말이요. 교회로 볼 때 그런 식의 타락이 많지. 그런데 교회적으로 그 일을 해 나가니까 그게 타락으로 보입니까? 대부분 타락으로 못 보고 있지요.
타락이라고 하는 것이 한 사람이 교회 안 나오면 그것을 타락으로 봐야 됩니까, 교회에 나와도 개인적으로 건 교회적으로 건 하나님 앞에 질적으로 성화구원이 아니고 세상길로 나가면 타락으로 봐야 됩니까?
그런데 보통 보면 어떤 것을 타락이라고 말을 하고 있지요? 한 사람이 그렇게 나가는 것은 타락했다고 그러고, 교회 전체가 이질적인 교훈, 육적 인본주의로 세상주의로 국가주의 민족주의 나가면 타락으로 보지를 않지요. 이 마지막 시대 기독교가 그래요. 타락을 보는 눈이 그렇게 되면 사역주의로 돌아가는 거요. ‘일 크게 많이’ 막 그렇게 들어가지요.
그걸로 인해 나온 헌금은 생명적이며 복음적으로 사람이 주님을 닮는 그 면으로 쓰여질까요, 아니면 자기네들의 세상적인 그 목적으로 쓰여질까요? 그렇게 해서 그 일이 커지면 그게 생명운동일까요, 사망운동일까요? 그게 옛사람이 주격으로 된 운동일까요, 새사람이 주격으로 된 운동일까요? 확실합니까? 이제 어느 정도 보입니까?
지금 보면 믿는 사람들이, 교회들이 방향감각이 없어요. 방향감각이 없어. 그러니까 항상 제가 말씀드리지요? 말세 때는 사람들이 교회를 보는 눈이 어두워지고, 성령을 보는 영관에 눈이 어두워진다. 그러니까 마귀가 하는 짓도 성령으로만 보이지요. 교회의 눈이 어두우니까 교회에서 세상적인 운동을 하는 것을 무슨 거룩한 일을 하는 것으로만 보이지요. 그러니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다 그 말이지요.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닮는 면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저희들을 강력하게 붙들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영육 간에 피곤하고 고단함이 없게 하여 주시고, 영육 간에 구원을 이루어 나가고자 하는 그 면에 방해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다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믿음이 부족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한 가닥의 마음만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를 꼭 붙들어 주시고 믿음의 길로 역사해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궁하고 극진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충만하심이 당신의 자녀들 머리 위에 영원히 같이할지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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