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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빗2519. 복덕방과 영감님 - 그때를 아십니까(57)
지금은 고기 파는 집을 수육판매소(獸肉販賣所) 또는 관집이라 하지만은 전일에는 다림방이라 하얏다. 다림방은 한자로 현옥(懸屋)이니 그때에는 소를 매다러서 잡는 까닭에 현옥(懸屋)이라 하엿다. 그리고 현옥(懸屋)도 제한이 잇서서 경성(京城)에 전부 5현옥(懸屋)을 두엇는데 수퓨교(水標橋) 다림방이 가장 큰 것으로 수십 년 전까지도 잇섯다. 평양(平壤)에서 밀매음녀(密賣淫女)를 코머리라 하고 개석(開城)에서는 덕이라 하덧이 서울에서는 은근자(慇懃者) 또 즘잔케 말하자면 은군자(隱君子)요, 밀매음개자(密賣淫仲介者)를 뚜쟁이라 하고 가옥중개소(家屋仲介所)를 복덕방(福德房)이라 하고 중개인(仲介人)은 가쾌라 한다. 이것도 시골에는 업는 말이다.”
이는 1929년 9월 27일 발행된 잡지 ≪별건곤≫ 제23호의 “경성어록(京城語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929년도 표기라 맞춤법이 나오기 전이어서 요즘사람들이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문장이기는 해도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특히 “복덕방”이란 말이 시골에서는 아직 통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빈방이 하나 있으면 그냥 기약 없이 들어와서 살라고 하던 시골 정서를 그대로 말해주는 것 같아 넉넉한 인심을 느끼게 합니다.
서울이라 해서 복덕방에 방을 구하러 드나드는 사람이 많았던 것도 아닙니다. 1955년 12월 27일치 동아일보에는 노인 한 분이 복덕방 간판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진이 보입니다. 추운 겨울이라 이사철이 아니어서 인지 도통 손님이 끊어져 고통스럽다는 모습이 느껴집니다. 그러던 복덕방도 어느새 우리 곁에서 사라져 이제는 **부동산이란 간판으로 바뀐 지 오래입니다. 간판이 바뀌다보니 훈훈하던 복덕방 영감님도 사라지고 그 자리엔 능숙한 손놀림으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젊은 사장님이 손님을 맞이하는 시대로 변해버렸습니다만 아직도 부동산을 가리켜 복덕방이라 부르는 분들도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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