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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10: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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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상호 목사 |
참고 : | 공주세광교회 http://sk8404.or.kr |
주 예수를 믿으라
롬 10:1-15
2007. 4. 29, 오전
기본적인 인간 욕구
심리학적으로 인간에게는 기본적인 3가지의 욕구가 있습니다.
첫째는 소속욕 : 무엇엔가 예속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둘째는 의미추구욕 : 어떠한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셋째는 안전의 욕구 : 합리적인 안전을 확보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무엇엔가 소속되지 않으면 불안하고 평안이 없는 심리적 상황입니다. 그래서 때론 돈이나 명예 권력에 예속됨으로써 자기 스스로 만족하고 평안함을 느끼는 심리적 상태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와 같은 과정을 경험하고 진정으로 어디에 예속되어야 평안하고 행복한 것인가를 분명하게 역설했습니다. 그는 세상적인 지식과 명예와 권세와 부귀영화를 소유함으로써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 생활에 얼마나 어리석었던 것인가를 고백하면서 그 모든 것을 세상의 분토처럼 버리고 보다 가치 있는 삶을 깨달았다고 외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 삶을 살아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모든 위대한 역사의 인물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주 예수를 믿으라.”입니다.
1. 예수를 믿으면 율법의 마침이 됩니다. 4-8절
본문 4절과 5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고 기록했습니다.
'율법' 하면 오늘날 신약 시대에 사는 성도들에게는 일단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는 것이지만, 사실상 율법 그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율법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한 형태이며, 여기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한 것처럼 그것을 완전히 지킬 수만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며, 그래서 율법은 그 대신에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지킬 도리가 없는 죄인인 것을 겸손하게 깨닫고 인정하게 만들어 주는 기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만 필요했던 것이며 이제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심으로써 율법은 그 역할을 다 마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런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이루기 위하여," 즉 죄에 대한 형벌이 공의롭게 집행되기 위하여 죄인 대신에 당신께서 스스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그런 십자가 대속을 "믿는 모든 자에게"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입니다.
즉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켜 주셨을 뿐 아니라 실제적인 구원 능력이 없는 율법의 약점을 완전히 채우심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 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율법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게 만드셨습니다.
계속해서 6절과 7절에 기록하기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사람이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와야 하는 것 같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미 주님은 화육강생, 부활승천을 다 이루셨습니다.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도록 하기 위하여 '올라가고 내려오고' 하는 일들은 이미 예수님 편에서 다 해 놓으셨으므로, 사람이 그런 불필요한 노력을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이제 어떤 노력이나 수도나 정진 따위가 필요 없고 오직 그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기만 하면 되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사람이 교통사고가 나면 반드시 바로 그 자리에서 구급차가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부상당한 사람을 도와준다고 섣불리 움직이게 하거나 하면 오히려 더 위험하기 때문에 그저 경찰이 와서 사건 현장을 정리하고 전문 응급요원들이 와서 부상자를 치료하고 후송하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실제로 빌딩 붕괴 같은 대형사고가 났을 때 통제되지 아니하는 자원자들이 전문 구조요원들의 작업을 오히려 방해하게 되는 경우도 자주 생기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신의 구원 문제를 오직 이 문제에 대하여 유일한 전문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만 맡겨야 합니다. 죄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원은 예수 그리스도 단 한 분뿐이며, 구원의 길로 안전하게 보내어 주실 수 있는 믿음직한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헛된 구원을 받으려 하고 있습니까?
전혀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율법 준수'에 자기 생명을 걸었던 당시의 유대인들과 같이, 오늘날도 사람들은 구세주가 아닌 교주에게 자기 구원을 의지하고 구원의 복음이 없는 종교에 자신의 생명을 맡기고 있습니다. 정말 다 쓸데없는 일이며 오히려 참된 구원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율법의 마침'이 되신, 모든 헛된 노력을 종결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기만 하면, 다른 그 무었도 필요 없게 됩니다. 구세주는 정말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는 사랑과 능력을 소유하고 계신 진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단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실로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는 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2. 예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9-10절 말씀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인간에게는 본성적인 종교심이 있습니다. 그것을 심리학적으로는 예속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절대자에게 예속되었을 때의 평안함과 행복감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사도행전 16:3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본문 13절에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 할지라도 구원받지 못하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영원히 죽을 인간이 영원히 살게 되는 것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사에 최고의 가치요 행복입니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순자는 인간이 왜 악하게 되었는가를 몰랐습니다. 기독교는 여기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가졌습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멸망이 인간에게 왔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영원히 멸망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류가 지은 죄값을 치렀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16절이 성경의 요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구원이라는 말은 다양하게 적용됩니다. 가난으로부터의 구원! 질병으로부터의 구원! 전쟁으로부터의 구원! 불행으로부터의 구원!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은 본질이 다릅니다. 영원히 멸망당할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이 기독교의 구원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인간 생애는 이생뿐이 아닙니다. 다음 세상이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 세상이 영원한 세상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3. 예수를 믿으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11절입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된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이 부끄러움을 당하도록 보고만 있겠습니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실패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남에게 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헛되지 않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4:8절 이하에서는 이 사실을 이렇게 확인합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어디에서 이런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깐 예수를 믿고 나면 병이 들어 병원에 실려 가면서도 마음은 평안합니다.
사업에 실패해서 보통 사람은 자살도 하는데 오히려 다음에는 더 좋은 일이 있을 것을 확신하는 마음이 되어 절망하지 않고 열심을 다해 살아갑니다. 내일 먹을 것 없을지라도 전혀 불안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일상생활에 더욱 최선을 다합니다.
모든 것이 기쁨으로 느껴지고 감사함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을 두고 요한일서 5:4절 이하에서는 세상을 이기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렇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4. 예수를 믿으면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12절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
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면 예수를 믿으면 높고 낮음, 잘난 자 못난 자, 힘있는 자 약한 자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를 생각하면 이 말씀이 금방 이해가 됩니다. 교회를 보세요. 각계각층이 모이지만 누구 하나 높은 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회에서는 누가 높다 낮다, 누가 잘났다 못났다가 없습니다. 하나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가족 개념으로 형제 개념으로 서로 돕고 사랑하고 위로하면서 더불어 살아감을 경험하는 축복의 센터입니다.
그러니깐 살아감의 의미를 압니다. 축복을 느낍니다. 못났다고 가난하다고 병들었다고 위축당하는 것이 없이 있는 자가 더 섬기고 높은 자가 더 사랑하고 강한 자가 더 베푸는 곳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사람 살맛이 나는 곳이 교회입니다.
왜 그런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종종 싸우는 교회도 있습니다. 말썽 많은 교회도 있습니다. 그런 교회 그런 성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그저 교회에 나와 보는 종교인일 뿐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계의 모든 나라 가운데 예수 믿어서 안 되는 나라 있습니까? 선진국은 하나같이 예수님을 잘 믿는 나라입니다. 인간 개인도 그렇습니다. 역사의 위대한 인물의 대부분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권력이나 명예나 돈이나 세상의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내용, 가치관과 의미를 통해 조명해 볼 때 그리스도인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하고 축복된 삶입니다.
많이 소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기준입니다. 어떤 지위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기준입니다.
예수를 믿는 생활! 이름하여 기독교 신앙생활은 현세에서도 행복이지만 내세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1. 예수를 믿으면 율법의 마침이 됩니다.
2. 예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3. 예수를 믿으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4. 예수를 믿으면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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